소설리스트

119화. 새로운 여정 (119/135)


119화. 새로운 여정
2023.05.19.



 
예니카가 긴장한 얼굴로 제도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이번 여정에는 예상하지 못한 인원들이 포함되었다.

다름 아닌 이사벨라의 일행이었다.

힐로샤인의 어린 아가씨와 함께하게 되니 이족들도 불편함과 동시에 부담감을 떠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사벨라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빛도 보지 못했는지 새하얀 얼굴에 단발머리를 빗어 내린 이사벨라를 본 순간, 그들도 알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레몬 빛에 가까운 밝은 금발도, 부서질 것 같은 미소도, 마른 몸도.

이사벨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힐로샤인의 기사들이 대체 왜 이사벨라를 싸고도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저 어린 아가씨가 큰일을 겪었다지?

눈앞에서 제 아비를 잃을 뻔했다지요.

세상에, 그런 일이! 안쓰럽군요.

그런 대화가 이족들 사이를 오갔다.

이사벨라는 멍한 표정으로 기사들 사이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밀랍 인형처럼 굳은 얼굴도 사람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경계심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첫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하루의 고된 일정을 마무리하고 노숙을 결정한 이들은 숲에 야영지를 금세 준비했다.

이족들은 오랜 도망 생활 동안 노숙에 이골이 나 있었고, 힐로샤인의 기사들은 전쟁터를 굴렀던 터라 익숙했다.

순식간에 야영 준비를 마친 이들은 어쩌면 그들이 합을 맞춘다면, 이 여정을 조금이라도 빠르고 편안하게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큼. 손이 빠르시군.”

“나만큼 천막을 빠르게 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는데…….”

하루 만에 감정적인 교류가 일어난 덕택에 저녁에 피운 커다란 모닥불 주변에는 이족들과 이사벨라 일행이 다 같이 둘러앉게 되었다.

종일 인형처럼 끌려만 다니던 이사벨라도 모닥불 앞에 앉았다.

뜨거운 스튜가 가득 든 그릇이 이사벨라의 손에 들렸다.


“아, 저는 괜찮은데…….”

이사벨라가 우물거렸다.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이 나이대는 많이 먹어야 키도 무럭무럭 크는데. 아가씨, 이게 별거 없어 보여도 제 특제 소스를 넣어서 끓인 스튜라 정말 맛있어요. 한 그릇 더 달라고 하셔도 못 드려요.”

이번 여정을 함께하는 이족 여성이 눈을 찡긋했다.

이사벨라가 묵묵히 수저로 그릇을 저었다.


“아니면 귀한 아가씨라 이런 건 못 드셔 보셨나?”

이족 여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사벨라가 입술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에서는 이것보다 못한 음식도 많이 먹어 보았다.

음식 탓이 아니라 요새 입맛이 없는 이사벨라 탓이었다.

힐로샤인의 기사들이 이사벨라와 이족 여성이 있는 쪽을 힐끗거렸다.

그들 사이에 별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사벨라가가 이족 여성의 재촉에 못 이겨 한 스푼 떴다.

까끌한 입 안에 고소하고 따뜻한 맛이 확 하고 퍼졌다.


“어때요, 맛있죠?”

이사벨라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한 스푼, 한 스푼 어렵게 뜨는 이사벨라를 보며 이족 여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여성이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샤미라예요. 샤미라. 이름 예쁘죠?”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 이름은 더 예뻐요. 에스텔. 별이라는 뜻이죠. 우리 에스텔이 딱 아가씨 나이였는데.”

샤미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에스텔은 도망치던 와중에 잃었다.

이족에 대한 반감이 극성일 때였다.

그땐 샤미라와 에스텔 둘 다 어렸다.

샤미라는 동생의 손을 놓쳤고 그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어렵게 에스텔의 소식을 쫓았을 땐, 이미 에스텔은 죽은 이후였다.


“그 애는 어떻게 됐어요?”

샤미라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별이 됐지요.”

“별?”

“네, 반짝이는 별이요. 저기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대요. 그리고 착한 영혼일수록 큰 별이 되는데…… 우리 에스텔은 정말 착했으니까…… 저 별쯤 될까요?”

샤미라의 손끝을 따라 이사벨라의 시선도 움직였다.

이사벨라가 눈을 깜빡였다.

이사벨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예전에 나를 돌봐주던 의사 할아버지도…… 그리고 슬린이랑…… 엘리퍼랑…… 로덴이랑…….”

이사벨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제가 아는 이름들을 읊었다.

먼 길을 떠난 자들의 이름이었다.

이사벨라의 작은 가슴에 고여 있던 이름들.


“별이 돼서 이사벨라를 보고 있을까?”

“당연하지요. 아가씨가 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잘 웃는지. 전부 보고 계실걸요.”

샤미라가 환하게 웃었다.

이사벨라의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렸다.

아이의 작은 얼굴이 샤미라의 마음에 걸렸다.

죽은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샤미라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저 친구는 젠이라고 하는데, 젠은 남편을 잃었어요. 그리고 저기 저 친구는…….”

이사벨라가 눈을 깜빡였다.

좁던 이사벨라의 세상에 타인의 아픔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이사벨라만이 아니었어?”

“네?”

“나, 나는…… 내가 나빠서……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래서 이사벨라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먼저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힐로샤인의 성에서는 모두들 이사벨라의 아픔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했었다.

가뜩이나 여린 마음에 상처가 가득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사벨라에게는 이런 위로와 공감이 필요했다.

이사벨라는 더 이상 보호받기만 해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네, 아니에요. 그게 왜 아가씨 탓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어린 아가씨가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그분들이 떠난 건 아가씨 탓이 아니라…….”

샤미라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별이 되기 위해서 떠난 거예요. 저기에서 불러서.”

“하늘이 불러서……?”

“네. 너희는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니 얼른 하늘로 와서 반짝이는 별이 되거라, 하신 거예요.”

샤미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건 그냥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위안일 뿐이라는 걸 샤미라는 안다.

죽은 이들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샤미라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건 죽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샤미라는 이 이야기로 위안을 얻었다.

에스텔이 어디선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살아올 수 있었다.

이사벨라에게도 그런 위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로?”

“네, 아가씨.”

이사벨라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이사벨라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내가 잘 먹는 걸 좋아하셨어.”

“그러면 이 스튜를 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이사벨라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라가 결심한 얼굴로 수저를 움직이는 걸 보면서 기사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이 여행을 통해서 이사벨라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들었다.


 
그 곁에는 제인이 있었다.

헬레나가 떠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이사벨라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제인이.

제인이 이 길을 따라나선 것은 이사벨라를 위함도 있지만…….

제인에게는 찾아야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헬레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

헬레나가 갈라진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잘 다듬어져 있었던 손톱은 엉망으로 뜯겨 나간 지 오래였다.

헬레나는 제 스스로 약속했다.

반드시 이 손으로 황제의 목을 꺾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한두 명이겠냐마는.

헬레나는 자신 있었다.

긴 길을 돌아와야 했다.

처음에는 황성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렉서스는 생각보다 의심이 많은 자였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끌던 차에 레니샤가 황성으로 들어갔고, 그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헬레나는 급변하는 시간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개혁이 성공했을 땐 렉서스가 그대로 죽은 줄 알고 허망했었다.

그녀의 맹세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신께서 도우신 것인지 렉서스는 살아서 황성을 탈출했다.

도망친 황제의 폐위 교서가 내려졌다.

헬레나는 그 이후로 렉서스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항상 단정하고 곱게 단장되어 있었던 헬레나의 외관은 많이 망가졌다.

머리카락은 엉망이 되었고 피부는 거칠어졌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주고 쪽방을 얻어 잠을 잔 탓에 몸도 무거웠다.

그 짧은 사이에 헬레나는 10년의 세월을 짊어진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헬레나라고?”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린 여자가 그녀를 불렀다.

여자의 이름은 렐라인.

황제의 마지막 후궁의 이름이었다.

헬레나는 플랜스 백작의 틈을 파고들어 이곳엘 들어왔다.

렉서스가 그 비천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네, 그렇습니다.”

“과거에 황성에서 일했었다지?”

“네, 부인.”

“흐응.”

렐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눈빛부터가 다르다 싶었다.


“황성에서 쫓겨 도망치느라고 꼴이 말이 아닙니다.”

헬레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왜 너 같은 걸 쫓아?”

“아…… 예전에 황후 폐하를…… 모셨던지라.”

“황후? 카나리아?”

헬레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런 부류의 여자들은 대개 황성의, 그것도 황후를 모셨다고 하면 혹하길 마련이었다.

그건 렐라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렐라인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로? 그러면 황후를 어떻게 모시는지 알겠네?”

“네, 그렇습니다. 황성에서 배운 모든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됐다! 사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아. 여기에는 엄청 귀한 분이 계시거든! 내가 나중에는 더 높은 신분이 될지도 몰라.”

렐라인이 꿈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그때를 대비해서 너를 곁에 두는 것도 괜찮겠다.”

“감사합니다, 부인.”

고개를 숙인 헬레나가 음습한 표정을 지었다.

렐라인의 허영은 헬레나가 이용하기 딱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다.


“큼. 그럼…… 렉서스 황제 폐하의 취향도 좀 알겠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전 황후께서 사용하시던 입욕제와 향수, 색조 화장품 같은 걸 알고 있습니다.”

“어머! 내가 카나리아 황후 같은 여자하고 같은 출신인 줄 아니?”

그러면서도 렐라인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큼. 그중에서도 귀한 것들만 골라서 얘기해봐.”

“네, 부인.”

렐라인의 귀가 팔랑거렸다.

렉서스와의 사이가 요새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렐라인에게는 그 사이를 풀어낼 열쇠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헬레나가 나타난 것이다.

렐라인의 마음이 봄날의 서리처럼 녹아내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황제 폐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거지? 큼, 물론. 렉서스 황제 폐하가 여기 있다는 건 아냐.”

헬레나가 속으로 이죽거렸다.


‘웃기고 있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