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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예니카가 보는 미래 (121/135)


121화. 예니카가 보는 미래
2023.05.26.



 
억눌린 카시우스의 목소리에 예니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흐릿한 시야에 카시우스의 잔상이 번졌다.

놀란 얼굴로 얼어붙은 이사벨라는 제인이 챙겼다.

제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사벨라를 달랬다.


“먼저 마차에 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

이사벨라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와 함께 있는 게 좋았지만, 투정을 부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 카시우스는 이사벨라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카시우스, 괜찮은 거지요?”

이사벨라가 카시우스의 소매를 붙들고 물었다.

카시우스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몸을 숙였다.

이사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카시우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이사벨라. 마차에 타 있을 수 있지?”

“……네.”

이사벨라가 제인과 함께 떠나고 나서야 카시우스는 자신의 감정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목소리는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예니카가 숨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슴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카시우스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들을 지키다 죽어간 남편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렸을 때도 제 아버지를 똑 닮아 있더니 커서도 그런 모양이었다.

예니카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허공을 헤매는 손을 보며 카시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뿌옇게 변한 예니카의 눈은 그 무엇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무거운 고개를 숙여 그 가여운 손에 제 뺨을 기댔다.

오랜 세월 헤어져 있었지만, 어머니의 온기와 모습, 음성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카시우스, 도망쳐. 도망쳐서 살아.’

‘어, 어머니를 두고 제가 어떻게 가요! 같이 가요. 네?’

‘정신 차려라, 카시우스. 네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할 참이냐? 이 어미에게 나라와 남편에 이어 자식도 못 지킨 사람이라는 굴레를 쓰게 할 참이야? 너라도 살아남아야지!’

카시우스의 등을 떠밀며 윽박지르던 목소리가 일순 상냥해졌었다.


‘사랑한다, 카시우스. 그것만큼은 절대로 잊지 마. 우리는 너를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했다는 것을.’

어찌 잊겠는가.

나무처럼 단단하게 갈라진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 카시우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어머니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마르고 거칠어졌으며, 이 손바닥은 고된 인생을 말해주듯 푸석했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카시우스도, 예니카도.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었다.

카시우스가 어머니의 손등에 키스했다.

살아남아 그가 있는 이곳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카시우스를 살린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 스스로의 목숨도…….


“정말 그리웠습니다, 어머니. 고작 이런 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나도 보고 싶었다, 카시우스.”

예니카가 제 손에 닿은 감각을 토대로 카시우스를 찾아 끌어안았다.

카시우스의 거대한 몸체가 구겨지듯이 예니카의 품에 안겼다.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었던 아들이었다.

카시우스의 고단한 삶에 대해서는 예니카 또한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금단의 힘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도……!


“카시우스…….”

예니카가 카시우스의 손바닥을 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커버린 아들의 손이 예니카를 서글프게 했다.

예니카는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니카의 목소리가 수분을 머금었다.


“너는…… 이 힘을 얻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구나.”

카시우스의 황금빛 동공이 커졌다.

예니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카시우스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방금 전까지 카시우스를 잠식했던 말로는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일순 물러섰다.

카시우스가 예니카가 한 말을 누가 듣지 못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카시우스와 예니카의 감동적인 재회에 오랜 관심을 주는 자들은 없었다.

카시우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이야기는 들어가서 이야기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니카가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멈췄던 일행이 다시 출발했다.

***

레니샤는 카시우스 일행을 성 앞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길을 달려온 전령이 레니샤에게 카시우스와 예니카에 대해서 고한 것이다.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까지.

레니샤가 괜히 긴장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카시우스의 가족은 전부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만남은 예상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레니샤가 같은 자리를 서성거렸다.


“긴장되십니까?”

린데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나조차도 이런 건 처음이거든. 자네는 아주 여유로워 보이는군.”

“저야, 뭐.”

린데이가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 일이 아니니까요.”

“오…….”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린데이를 응시했다.

예쁜 분홍빛 눈동자가 긴장으로 잔뜩 굳어진 것을 보고는 린데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여기 오기까지 레니샤는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한 번도 저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다.

린데이의 말에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반려자의 가족은 어려운 법이거든.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야. 나는 생각보다 더 평범한 모양이군.”

“괜찮을 겁니다. 분명 그분께서도 폐하를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나?”

“그간 폐하를 만나온 모든 사람들이 그랬으니까요. 그분께서도 폐하께 매료되실 겁니다.”

자신감에 차 있는 말에 레니샤도 웃었다.


“자네는 나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어.”

“그럴만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니까요. 여태까지, 항상.”

그들의 대화가 끝나갈 때쯤 카시우스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장 선 카시우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석양에 물들어 보석처럼 빛났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 같은 사람이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처음 만났었던 그날처럼.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당도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등에 키스했고 그의 눈짓을 받은 기사들이 손님들을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붙들었다.

답지 않게 어린애같이 구는 레니샤를 카시우스가 따뜻한 눈으로 응시했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고…….”

“들었군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실 테니까요.”

레니샤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려던 찰나, 예니카가 마차에서 내렸다.

레니샤가 뻣뻣하게 굳었다.

카시우스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지만, 레니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예니카의 뒤로 제인에게 붙들린 이사벨라가 조신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제인은 눈치 빠르게 지금 이 상황에 이사벨라가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자리다.

안쓰럽지만 이사벨라는 조금 기다려야 했다.

샤미라의 부축을 받아 예니카가 레니샤의 앞에 섰다.

예니카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레니샤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황제 폐하.”

“예니카. 멀리 오느라 수고했네.”

예니카가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의 손을 잡는 순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수많은 것들을 보았다.

황금빛의 소녀 뒤로 휘몰아치는 분홍빛 꽃잎과 바닥에 낭자한 붉은 선혈을 말이다.

레니샤는 그 길을 걸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예니카를 향해 고개를 돌린 레니샤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찬란한 황제의 관을 쓴 레니샤의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레니샤를 사랑하고, 지키고 있는 이들이었다.

망자들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가호를 받고 계시는군요.”

레니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그 체온에 안정을 되찾은 레니샤가 말했다.


“죽은 자라 하면…….”

예니카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누구 한 명을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아주 오래된 선조께서도 함께하고 계시니…….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이 자리를 약속받고 세상에 나신 분이로군요.”

생각지도 못했었던 말이었다.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카시우스를 보았다.

카시우스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가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자네는 다른 이들보다 많은 것을 보는군. 나는 이 운명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극을 보았다네. 내 삶 또한 평탄하지 않았지. 자네의 눈으로 보는 나는 어떠한가. 나의 제국은 앞으로 평탄하겠는가?”

예니카가 고요한 시선으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회색빛 눈동자가 무엇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레니샤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얼어붙었다.

그녀의 인생을 평가받는 기분이었다.

예니카와의 만남은 레니샤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더 어려웠다.


“말하지 말…….”

결국,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레니샤가 말을 하려 할 때였다.


“히엔트리에 새로운 영광을 가져올 분이시군요. 대륙에 천 년 평화를 이룩할 분이시니 세 뱀 신께서도 폐하를 굽어보고 계십니다.”

“……다행이군.”

레니샤가 안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네의 말이 내게 큰 힘이 되었어. 진심이네.”

레니샤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그녀의 선택이 항상 옳았는가.

그녀를 대신해서 목숨을 달리한 이들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새롭게 그녀가 하는 선택들은 과연 옳은 것인가.


“믿는 길을 걸어가십시오, 세 뱀 신께서 안배하신 이 땅의 지배자여.”

“……그 또한 고맙네.”

“저도 감사합니다, 폐하. 제 아들의 곁에 있어 주셔서.”

예니카는 장신의 사내가 레니샤를 오매불망 보는 것을 보았다.

레니샤는 타고난 지배자이자 황제였다.

레니샤의 운명에는 많은 사내들이 있었다.

각국의 왕자와 귀족들이 레니샤를 수도 없이 탐냈을 것이다.

하지만, 레니샤는 단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고 카시우스를 옆에 세웠다.

카시우스에게 레니샤가 없었더라면.

예니카는 그 또한 볼 수 있었다.

카시우스는 무너졌을 것이다.

악독한 전 황제의 술수에 휘말려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다시 전쟁터로 끌려가 착취당했을 것이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선택했고 그가 그 손을 잡았기에 카시우스에게 지금이 있을 수 있었다.

운명은 선택의 연속이고 갈림길은 수도 없이 나타난다.

레니샤는 그때마다 카시우스에게 올바른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레니샤의 분홍빛 눈이 흔들렸다.


“나 또한 그가 고마운 사람이네. 카시우스가 없었다면 나는 이 험난한 인생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르네.”

레니샤의 말에 예니카가 안도했다.

카시우스의 볼이 붉어졌다.

진심을 다한 고백을 들은 기분이었다.

레니샤는 여전히 카시우스를 설레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네는 아들을 참 잘 낳았어. 이 사람을 내게 보내줘서 정말로 고맙네.”

예니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다행히 아들의 반려는 말 한 마디도 고운 사람인 듯했다.

그간 짊어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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