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죄인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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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죄인의 말로
2023.06.06.
“너는…….”
렉서스가 어눌한 입술을 달싹였다.
렉서스는 레니샤에 대한 집착이 길고 깊었던 만큼 헬레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레니샤가 보낸 것이냐?”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렉서스는 요새 자신이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이들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약을 했다.
그리고 몽롱해진 정신으로 렐라인과 밤을 보내는 것이다.
이따금 정신이 들 때면 렉서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비참하게 종마처럼 살다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헬레나가 고요하게 식은 눈으로 렉서스를 응시했다.
렉서스가 머물고 있는 곳은 경비가 삼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점을 찾지 못할 것도 아니다.
헬레나는 바란다면 언제든지 렉서스의 목을 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렐라인은 헬레나를 신뢰했다.
헬레나가 황성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에 푹 빠져 있었다.
게다가 전 황후를 모셨다니!
“……당신의 후궁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헬레나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더 이상 당신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은 것 같더군요. 당신의 아이를 낳아 황제의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합니다. 플랜스 백작은 태어날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 하하…….”
렉서스가 광적인 웃음을 흘렸다.
볼품없이 마른 몸이 들썩였다.
헬레나가 비루한 벌레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렉서스를 응시했다.
죽일 가치도 없는 사람이다.
이미 렉서스의 목전에는 죽음이 버티고 있었다.
“얕은수를 쓰는군. 그거 아나?”
렉서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가 떨어뜨린 술병이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헬레나가 제 발치에 튄 술을 무감하게 응시했다.
다른 이들의 삶을 수도 없이 망가뜨린 범인이 그보다 더 비루한 꼴로 있었다.
증오가 들끓다가 식기를 반복했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야! 아무리 그놈들이 나한테서 씨를 뽑아내려고 애를 써도 절대로 안 될걸?”
렉서스의 안광이 희번뜩하게 빛났다.
사실 렉서스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꿈을 꾸는 거지! 멍청한 놈들! 레니샤가 정말로 몰라서 플랜스 백작을 두고 보고 있는 것 같아? 아니. 레니샤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플랜스 백작을 주축으로 모인 자들을 한 번에 밀어버릴 작정일걸?”
헬레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헬레나는 저런 비참한 꼴은 상상하지 않았다.
악당 렉서스는 저렇게 무너져서는 안 됐다.
헬레나의 모든 미움을 받아내려면 저것보다는 나아야 했다.
지금의 렉서스는 미워하는 것조차 아까운 모습이었다.
“레니샤는 제국을 청소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멍청한 새끼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렉서스가 두서없이 떠들어댔다. 간간이 욕설이 섞었다.
짙은 보랏빛 밤이 렉서스 위로 드리웠다.
렉서스의 목줄을 죽음이 쥐고 을러대는 것 같았다.
헬레나가 렉서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저놈에게 닿는 것조차 싫었다.
렉서스가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기 로테라 공작이 딸 교육 하나는 기똥차게 시켰거든!”
렉서스가 꺽꺽대며 웃었다.
“황제가 될 걸 알고 있었던 거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실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야. 모든 상황에서 이용당하지 않나.”
렉서스가 바닥을 기어 헬레나에게 다가왔다.
렉서스가 헬레나의 다리를 붙들었다.
광인의 힘에 헬레나가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깡마른 몸에서 어떻게 이런 악력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헬레나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렉서스를 실수로 자극하는 것보다는 그냥 뭘 하는지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 나를 보러 왔구나, 레니샤.”
렉서스가 훌쩍였다.
“나도 네가 보고 시, 싶었어. 레니샤, 우리는 여태까지 함께였잖아.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을 거야. 응? 내가 다 잘못했어.”
렉서스가 고개를 찧으며 헬레나의 구두에 키스했다.
소름이 끼쳤다. 헬레나가 뒤로 도망쳤다.
“레니샤, 그놈보다 내가 못한 게 뭐야. 응? 나는 황족이잖아. 아냐, 네가 황제 해. 나는 그냥 네 옆에 있을 수 있으면 돼. 레니샤…….”
렉서스가 몸을 웅크린 채로 신음을 흘렸다.
‘이런 것도 황제라고…….’
놈을 죽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온 스스로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렉서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놈한테는 왜 웃어주는 거야!!! 나한테도 웃어줘. 웃으란 말이야!!”
렉서스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생각했었던 것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다.
지금 헬레나가 렉서스를 죽인다면 오히려 후회할 것 같았다.
렉서스가 저 꼴로 좀 더 긴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
절망을 거듭하면서!
헬레나가 렉서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나는 너하고 살 생각이 없어.”
헬레나가 레니샤의 목소리를 비슷하게 흉내냈다.
렉서스는 절벽에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톡 하고 밀면 그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헬레나는 그 꼴을 보고 싶어졌다.
“나는 널 사랑하지 않거든, 렉서스.”
렉서스의 얼굴이 더 희게 질렸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숨소리가 가쁘다.
헬레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한 번도 너를 사랑한 적 없었어, 렉서스. 이대로 네가 죽는다 해도 조금도 아쉽지 않아. 나는 홀가분하게 널 잊을 거야.”
헬레나는 기민하게 렉서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헬레나가 박아넣듯이 웅얼거린 목소리에 렉서스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실의에 빠진 자의 눈빛이었다.
렉서스가 헬레나를 노려보다가 바닥을 굴렀다.
“아아아아악!! 아아악!! 그럴 리 없어!!!”
헬레나가 한참을 렉서스를 보다가 방을 빠져나왔다.
헬레나가 렉서스에게 올라가고 있는 약을 확인했다.
다행히 다 잠들 만한 늦은 새벽이라 운신이 조금이나마 자유로웠다.
달그락.
“이건가?”
도저히 어떤 병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단련된 약쟁이를 저런 꼴로 만들었다면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다.
헬레나가 눈이 보이는 대로 모든 병을 품 안에 안았다.
자리를 힐끗 본 헬레나가 흐트러진 그대로 두고 자리를 떠났다.
이런 것들은 이 불안정한 저택을 좀 더 흔들어줄 것이다.
헬레나가 움직이기 편하도록.
***
플랜스 백작 부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황제 폐하께 가는 약들이 사라졌다니 무슨 뜻이에요?”
“모르겠어.”
플랜스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렉서스가 그들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먹이고 있었던 독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했고, 종종 최음제를 먹여 렉서스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짓도 했다.
렉서스를 하나의 인격체로조차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플랜스 백작이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가 백작 부인을 닦달했다.
“그 애는 아직이오?”
플랜스 백작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빌어먹을!! 송장인 걸 데리고 왔더니 쓸모가 이토록이나 없을 줄이야!”
플랜스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황제가 불구라는 사실이…….”
“진짜일지도 모르겠군. 어쩔 수 없어. 렐라인은 반드시 임신해야 해!”
“무슨 방법이 있으신가요?”
플랜스 백작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플랜스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어도 만들어야지. 황제하고 비슷한 외양을 가진 남자를 찾아봐. 임신만 하면 돼.”
“여보! 우리 애는 몸 파는 애가 아니에요!”
“그러면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레니샤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리를 보고 있어!”
“그,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아. 당장 남자를 찾아봐!”
“알았어요…….”
플랜스 백작 부인의 시름이 깊어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플랜스 백작 부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
그리고 그 시각, 키엔과 루나는 잠시 방향을 틀었다.
렉서스는 약에 절어서 저택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었고 그 안에 헬레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잠시 눈을 돌려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와, 이놈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키엔이 허름한 차림새의 노인을 골목으로 몰아붙였다.
노숙하는 이들 중에 헨리를 닮은, 눈이 보이지 않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했는데.
“헨리. 자네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루나가 뚱한 얼굴로 노인의 멱살을 쥐고 끌어 올렸다.
“큭큭…….”
헨리가 다 갈라진 웃음을 흘렸다.
탁한 눈동자를 한 남자에게서는 코가 아플 정도의 악취가 풍겼다.
“……그 어린 X은 죽었나?”
헨리가 몸을 비척거리며 물었다.
“조그만 계집애 말이야! 금발에 잿빛 눈을 가진 그…….”
“닥쳐. 어디서 아가씨를 입에 올려. 네가 사람이냐?”
“나를 이 꼴로 만들었는데 내가 못 할 게 뭐야!! 나도 그럴 생각 없었다고!!”
헨리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그 어린애를 제물 삼을 생각은 없었어!! 그냥, 그냥…… 황제 폐하께 그 계집은 살려달라고 해볼 생각이었다고! 역적들을 발고하는 걸로 끝낼 생각이었어! 두고 봐! 황제 폐하가 이곳에 와계신다지? 나를 다시 등용해달라고 말할 거야!”
키엔이 웃음을 흘렸다.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루나가 미친놈을 보듯이 헨리를 응시했다.
저 꼴을 하고서 렉서스를 만나겠다는 것도 웃기고, 그를 아직도 황제라고 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렉서스나 헨리나 다른 게 무엇인가.
악당들의 말로는 처참했다.
헨리가 침을 튀기며 외쳤다.
“이건 다 레니샤 때문이야. 그 마녀 같은 여자가 나를 이 꼴로 만들어서 내가 그 어린 X을…… 우욱!!”
듣다 못한 루나가 헨리의 배를 걷어찼다.
“왜 이걸 들어주고 있는 거야? 별 쓸모없는 소릴.”
루나가 무감한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어린애는 건드리지 않아. 이건 재활용도 안 되는 새끼야. 그냥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고.”
키엔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숨은 붙여둬.”
키엔이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찾아냈다.
비명을 지르는 헨리의 입에 그것을 물렸다.
혀를 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왜?”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정신병자는 사회에서 영영 격리시켜야 한다고.”
“……힐로샤인으로 보낼 거야. 죗값은 제대로 치러야지. 그렇게 얻어맞다 뒤지는 것도 너무 호사스러운 죽음 아니겠어? 그놈은 더 고통스러워야 해.”
키엔이 이를 아득 갈았다.
그 작은 아이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키엔은 똑똑히 보았다.
환하게 피었던 이사벨라의 미소는 저놈 덕분에 망가졌고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
“크헉! 하, 하늘이 보고 계셔! 이 역적 놈들!!!”
헨리가 마지막 힘을 짜냈다.
“분명 천벌을…….”
“이게 천벌이다, 미친놈아.”
루나가 마지막으로 돌덩이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커억!!!!”
흰자위가 뒤집히는 걸 보고는 루나가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하여튼, 이런 것들은 맞아야 입을 다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