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떠나는 자
(12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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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떠나는 자
2023.06.16.
바로 메테오 왕자를 불러들였다.
레니샤가 당장 샴디르로 날아갈 수 없으니 메테오 왕자를 불러 궁금증을 푸는 게 우선이었다.
“왕자의 동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메테오 왕자가 비죽하게 웃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만나주지 않으시더니.”
서운한 기색이 가득했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나도 메테오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해볼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나. 나는 빚지는 게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야. 샴디르와 왕자가 준 도움은 보은이라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지. 이제는 상황이 뒤집혔다는 말이야.”
“저와의 관계를 그렇게만 단정 지으시는 겁니까?”
메테오 왕자의 눈동자에 정염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가장 비참하게 추락했다가 화려하게 비상한 여인이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레니샤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레니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목소리에 반해 내용은 냉랭하기만 했다.
레니샤가 메테오 왕자를 칼날 같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우리에게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확히는 내가 왕자에게 어떤 여지를 준 적이 있느냐고 물었네.”
메테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내 곁에 남은 것은 자네의 선택이었고, 선을 넘어선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것도 자네의 선택이었어. 나는 왕자의 노고에 감사하고 그에 관한 적절한 보상을 해줄 참이야. 하지만, 우리 사이는 그것이 전부 아니던가?”
“황제 폐하…….”
메테오의 목소리가 끓었다.
“역대 황제 중에 후궁을 두지 않은 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후궁으로 들여주십시오. 샴디르의 왕자가 아니라 폐하의 연인으로 머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메테오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그거였다.
처음엔 레니샤를 데리고 샴디르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레니샤와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것.
그런 단꿈을 꾸었으나 상대가 꼼짝도 하질 않으니 메테오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황제가 되면 후궁을 둘 수 있다.
결혼을 여러 상대와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자존심도 상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레니샤를 생각하면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메테오 왕자…….”
또다시 어제의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레니샤가 눈가를 꾹 눌렀다.
“그건 불가하네. 왕자도 알다시피 그렇게 되면 후궁을 노리는 자들이 늘어나. 결국은 혼란이 생기는 거지. 나는 후궁을 들일 생각이 일절 없네. 정부 또한 마찬가지지. 내 후계에 어떤 의혹도 남기지 않을 생각이야.”
“……혼인 동맹이 가장 강력한 동맹이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대신들의 마음을 달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지요. 언젠가는 포문이 열리게 될 겁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황제라고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지켜볼 생각이네.”
“지켜주시려는 것입니까?”
“카시우스를?”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지금 오가고 있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상쾌한 웃음이었다.
레니샤가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지키려는 건 내 사랑이야. 나는 내 마음을 지키고 싶네. 나는 카시우스를 사랑해. 그 마음을 배반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메테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고들 여지가 보이질 않는다.
“자네는 돌아가는 게 좋겠군. 이곳에 있어봤자 헛된 꿈만 커지게 될 거야.”
이제는 축출까지 명하니 더 이상 버틸 재간도 없었다.
메테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차피 각오하고 있었던 일 아니던가.
카시우스를 보는 레니샤의 눈빛이 깊어질 때부터.
레니샤는 하나만 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 앉았다.
카시우스를 보는 눈이 흔들릴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메테오가 뜨거운 침을 삼켰다.
놓인 물잔의 물을 전부 마셔도 불타는 것 같은 마음은 가라앉질 않는다.
메테오는 그럼에도 이 자리에 한 남자가 아니라 왕자로서 앉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제게 마음 한 자락 안 주신다 하시니 대가라도 받아야겠습니다.”
레니샤가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댔다.
오만한 지배자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샴디르의 국왕은 막내 왕녀를 받아달라고 하시더군. 그건 무슨 의미인가?”
“그 아이가 황제 폐하께 반해 이곳으로 오겠다고 떼를 쓴 지 오래되었습니다. 로샤의 눈물로 인한 부작용도 어느 정도 호전되었습니다. 시야가 명확하진 않아도 사물을 구분할 순 있게 되었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황제 폐하의 궁정에서 일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어떤 형태라도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황제 폐하를 보고 배우고, 그 곁에서 모시고 싶다고 성화입니다.”
“샴디르의 막내 왕녀에게는 후계권이 있어. 왕이 후계권을 가진 아이가 밖으로 나가는 걸 두고 보겠나?”
“이미 포기각서를 쓴 상황입니다.”
메테오가 피식 웃었다.
어쩔 때는 막내 여동생의 그런 과단성과 고집이 부러웠다.
사랑만 받고 자라 모자란 게 무엇인지 모르니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왕은 고된 역경을 치른 막내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했다.
“……포기 각서까지. 왕녀의 결심이 대단하군.”
“그러니 받아 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쓰임에 맞게 써주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를 교두보 삼아 두 나라의 동맹이 굳건하길 바랍니다.”
레니샤가 턱을 쓰다듬었다.
샴디르와의 동맹이라.
사실 나라 전체의 덩치로 보자면 샴디르는 히엔트리 제국과 동등한 위치에 설 재목은 되지 못한다.
레니샤는 히엔트리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을 작정이었다.
“동맹이라…….”
“저는 황제 폐하를 모르지 않습니다. 내부를 다지고 나면 외부로 눈을 돌리시겠지요. 거기서 저희는 제해달라 부탁드리는 겁니다.”
“부탁.”
레니샤가 깔깔 웃었다.
사실 지금은 레니샤가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다.
메테오는 얼마든지 자신의 우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메테오는 자신의 몸을 낮추고 레니샤에게 ‘부탁’이라는 말을 했다.
정당한 요구가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에 메테오도 따라 미소 지었다.
레니샤는 저렇게 웃는 게 어울린다.
그녀가 가는 길에 어려움 하나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메테오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였다.
레니샤를 황위로 안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이다음엔 메테오는 없을 것이다. 그게 여러 가지 의미로 아쉬웠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왕자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군.”
“대륙에 폐하만큼 폭풍을 몰고 올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요.”
“왕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왕자의 말대로 히엔트리 제국은 샴디르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왕이 바라는 대로 왕녀를 받아들이지. 왕녀는 자신의 능력만큼 인정받으며 이곳에서 지낼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폐하.”
레니샤와 메테오의 독대는 그것으로 끝났다.
메테오가 이곳을 떠나고 나면 한동안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어쩌면 영원히.
***
렐라인이 떨리는 눈으로 주치의를 응시했다.
“아이를 가진 게 맞소? 내가 달거리를 하지 않게 된 지 4주가 흘렀다오.”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주치의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간 렐라인이 고대하던 임신에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황후의 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렐라인이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그래, 렐라인. 그간 고생했구나.”
렐라인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정체도 잘 모르는 남자를 침실에 들이며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었던가.
플랜스 백작이 방 안에서 사람들을 물렸다.
렐라인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떻게 해줄까. 네가 이렇게까지 해줬으니 해달라는 대로 해주마.”
렐라인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간 느꼈었던 수치심을 되갚아줄 차례였다.
“이 일에 대해 아는 자들은 전부 죽여주세요.”
플랜스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말은…….”
“네. 유모뿐만 아니라 하녀, 그리고 그 남자. 전부요.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주세요.”
“좋다, 렐라인. 큰일을 하려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겠지.”
“그리고 황제도…….”
렐라인이 눈을 반짝였다.
전에 렉서스가 졸랐던 목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렉서스는 손쓸 수 없이 망가지고 있었다.
“황제도 죽여주세요.”
어차피 쓸모없는 말이다.
렐라인은 렉서스에게도 복수하고 싶었다.
그 남자가 렐라인의 발아래를 기는 꼴을 보고 싶었다.
렉서스는 황성엘 가고 싶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남자가 제게 비는 꼴을 보고 싶어요, 아버지.”
“전부 네 뜻대로 해줄 것이다. 그러면 헬레나는…….”
렐라인이 요새 끼고 다니는 하녀의 이름이었다.
렐라인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쳤다.
헬레나는 렐라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짧은 황궁 생활 동안은 알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헬레나가 가르쳐준 것들은 렐라인의 새로운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역할을 해줄 이들은 나중에 주변에 널리지 않겠는가.
렐라인이 아이를 낳고 실권만 잡으면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 말이다.
렐라인은 헬레나도 다 쓴 장기 말이라고 판단했다.
“헬레나도 더 이상 필요 없어요.”
렐라인은 이미 상상 속에서 화려한 황후의 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이가 황위를 물려받는 날 그녀는 황태후가 될 것이다.
***
헬레나가 자리를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주제도 모르고.’
헬레나가 이를 악물었다.
렐라인 따위에게 죽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렉서스의 목숨을 렐라인 따위에게 넘겨주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게 아니었다.
헬레나가 입술을 싸늘하게 끌어 올렸다.
밖에서 배회하고 있는 기사들의 도움을 받을 때가 온 것 같다.
헬레나가 밖으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그 쪽지는 여러 사람들의 손을 통해 루나와 키엔에게 전달되었다.
“뭐래?”
“때가 됐으니 렉서스 황제와 헬레나를 빼돌려 달래.”
“때가 됐다는 건…….”
“그 여자가 임신한 모양이야.”
키엔이 씹고 있던 풀을 퉤 하고 뱉었다.
헨리를 잡은 이후로는 시간만 죽이고 있었는데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루나와 키엔이 높으면서도 조금도 높지 않은 플랜스 백작의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엔 숲이 우거져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은폐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처음부터 간파당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시체를 두 구 구해야겠어. 어차피 불탈 것이니 성별만 맞추자고.”
“불태운다니?”
루나가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플랜스 백작이 황제의 죽음을 포장하기 가장 좋은 길 아니겠어?”
“오호라. 그런 짓을 하면서 왜 구하는데?”
“아직 황제께서 렉서스의 죽음을 명하지 않으셨으니까.”
키엔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