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스트로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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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스트로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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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스트로베리
2023.07.11.
베리턴의 별명이 스트로베리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갈색 머리 남자애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네가 바로 그 유명한 황태자 전하구나?”
“…….”
“난 클러그 덴버스.”
“덴버스 후작가?”
베리턴이 고개를 갸웃했다.
덴버스 후작가에 대해서는 베리턴도 알고 있었다.
덴버스 후작은 특히 레니샤의 최측근 아니던가.
마담 투리엘과 덴버스 후작 부인, 린데이 시녀장……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옛날부터 함께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덴버스 후작에게는 이렇게 큰 아이가 없었다.
덴버스 후작이 아이를 얻은 것은 고작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아. 나는 덴버스 후작의 동생이야. 네가 아는 덴버스는 우리 형.”
“형??”
베리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형.”
“그, 그게 돼?”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이 있을 수도 있지.”
클러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귀족들 호적 복잡한 거 알만하지 않냐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베리턴이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베리턴이 목을 가다듬고는 물었다.
“그런데 왜 말 걸었어?”
“유명한 스트로베리가 궁금해서. 다들 너 보겠다고 졸졸 쫓아다니니까. 저 여자애들도, 그리고 저기에 남자애들도, 그리고 저어어어기에 여자애들도.”
“스트로베리 아니야. 베리턴이야.”
“왜? 우리 형도 황성의 스트로베리라고 부르던데.”
베리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람 좋게 봤더니! 덴버스 후작에 대한 호감도가 팍 깎였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것 같은데.”
“왜?”
“너, 네 어머니가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처음으로 들어보는 부모님 이야기다.
황성에서는 레니샤에 대해서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황제는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없는 자리에서는 황제 욕도 한다고.
게다가 솔직한 애들이 가득 모여 있는 아카데미 아니던가.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벚나무.”
“벚나무?”
베리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황제 폐하 눈동자 색이 선명한 분홍색이잖아. 웃으시는 모습이 샤랄라하다고 해서 그렇게들 부른다던데. 나는 뵈지 못해서 모르겠고. 그런데 네가 외모는 폐하를 꼭 닮았다며.”
안 그래도 그 덕분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네 눈동자도 선명한 분홍색이거든. 잘 익은 딸기 같아.”
“베리턴이야, 그래도.”
“알아, 스트로베리.”
클러그가 짓궂게 웃었다.
베리턴이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참았다.
친구 사귀는 게 왜 이렇게 어렵냐!
그 순간 클러그와 베리턴은 이미 친구가 되었다는 걸 두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
레니샤가 부모님의 묘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오래 걸렸죠?”
바람이 레니샤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쉬운 길이 아니더군요. 아버지,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레니샤가 허리를 굽혀 묘비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마치 눈물을 닦는 것처럼 레니샤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묘비가 깨끗해지고 손에 낀 장갑이 더러워질 때까지.
“보고 싶어요, 아버지. 어머니.”
레니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 많이 보고 싶어요.”
그들이 남긴 흔적과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터질 것처럼 옥죄었다.
힘들고 아픈 순간에도 두 사람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가장 서글펐던 건 아이를 낳을 때였다.
분명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레니샤의 손을 꼭 잡아줬을 텐데.
어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레니샤를 응원하고 얼렀을 것이다.
아버지는 레니샤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을 거다.
‘괜찮다, 레니샤. 좀 더 힘을 주렴!’
어머니를 대신해서 레니샤의 손을 잡아준 건 예니카였다.
그녀는 지난해 명을 달리했다.
레니샤가 사랑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레니샤가 눈물을 삼켰다.
“너무 힘들었어요. 아팠고, 슬펐어요. 포기하고 싶던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레니샤가 침을 삼켰다.
“그럴 수가 없더라구요.”
레니샤가 어깨를 움츠렸다.
레니샤가 실패하면 사람들은 물론이고, 죽은 부모님마저 그녀를 손가락질할 것 같았다.
레니샤를 향한 사랑으로 모든 걸 끌어안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말이다.
레니샤가 떨리는 손으로 묘비를 만지작거렸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레니샤의 옆을 바람이 스쳤다.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방금 그 바람이 레니샤를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아주 잘했다는 듯이.
“……사랑해요, 어머니. 아버지. 다음에는 제 아들하고 올게요. 이름은 베리턴이에요. 저를 꼭 닮은 아이니 분명 어머니,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
레니샤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밀린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시간이 훌훌 흐른 것이다.
레니샤는 해가 질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안아주었다.
“……내가 아는 두 분이라면 당신을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겁니다.”
“나도 알아요.”
레니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카시우스 또한 부모님이 보내주신 선물 아니던가.
두 분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레니샤를 챙겼다.
그 깊은 사랑에 눈물이 흘렀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랑을.
***
브릭스턴과 헤일린 덕분에 힐로샤인에서 자리 잡는 건 쉬웠다.
두 사람은 힐로샤인에 따로 마련해둔 저택으로 내려갔다.
성이 완벽하게 황성으로서의 기능을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다행히 8년 동안 헤일린은 천도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도로를 정비하고 강에는 다리를 세웠다.
구역을 나누어 상점을 세워 두었으며, 폐쇄되었던 지역을 개방하여 주변의 도시들과 연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힐로샤인에서 뻗어나간 도로망이 전국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게다가 레니샤의 명대로 철도를 놓을 부지 또한 이미 골라둔 상황이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어요, 헤일린.”
헤일린은 레니샤의 오른팔이 되었다.
새로운 작위는 헤일린이 거부했다.
‘제게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폐하. 제 딸이 또 떠난다고 하면 이번에는 따라가 볼 생각입니다. 브릭스턴하고 셋이서 걸음을 맞추다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지난 8년 동안 힐로샤인을 이만큼이나 일궈낸 헤일린을 더 이상 붙잡지 못했다.
다만, 헤일린은 레니샤가 완전히 힐로샤인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돕기로 약속했다.
“별말씀을. 저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제가 로테라와 레니샤에게 입은 은혜를 잊을 수 있나요.”
헤일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과거 헤일린의 친정은 렉서스의 칼날에 풍비박산 났다.
그런 헤일린을 감싸고 친정 부모님의 목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 죽은 로테라 공작이었다.
덕분에 헤일린은 좀 더 부모님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1년 후, 그들이 영원한 여행을 떠날 때까지.
헤일린은 로테라에 제 인생을 바치기로 했다.
그러니 헤일린은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다.
“그래도 고생했어요. 브릭스턴 재활도 그렇고…….”
레니샤가 망설이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상을 주세요, 폐하.”
“뭐든지 말만 해요.”
“저희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귀한 황태자 전하는 초상화로 뵌 게 전부지요. 저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카를 보고 싶습니다.”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조카?
그간 바빠서 생각도 하지 않았었던 일이었다. 베리턴의 동생이라.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
헤일린이 미소 지었다.
“아, 샴디르의 왕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레니샤가 얼른 말을 돌렸다.
샴디르의 왕녀는 수재였다.
아카데미 8년 과정을 5년 만에 끝내더니 힐로샤인으로 떠나버렸다.
자신의 쓸모는 힐로샤인에 있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헤일린이 활짝 미소 지었다.
“예리카나 말씀이시군요.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힐로샤인이 이만큼 발전하는 데는 그 아이의 도움이 컸지요. 확실히 예리카나에게는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선견지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철도 이야기를 꺼낸 것도 예리카나였다지요?”
중앙 귀족들과 레니샤의 갈등을 알게 된 힐로샤인에서 내놓은 해답이 철도였다.
철도를 이용하면 힐로샤인에서 예전 제도까지 3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었다.
“맞아요. 그 애가 이곳에 오기 전에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죠?”
일전에 예리카나가 처음 히엔트리에 왔던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자신이 사신이 되겠다고 자원했던 것이다.
“보고,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이에요. 예리카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하루가 짧더군요. 한 달만 둘러본다고 했으니 금방 돌아올 거예요.”
헤일린의 말대로였다.
힐로샤인을 비롯하여 주변 도시들을 순방한 예리카나는 시끌벅적하게 귀가했다.
“세상에, 황제 폐하!!!”
예리카나가 레니샤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예리카나가 레니샤에게 예를 취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아프신 곳은 없으시고요? 얼굴이 마르신 것 같은데…….”
“그만.”
레니샤가 예리카나의 말을 막았다.
“나는 너무 괜찮다.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로.”
“……저 혼자 살찌고 있었나 봐요.”
예리카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만약, 레니샤가 황제가 아니고 예리카나보다 어리기라도 했다면 분명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예리카나의 가장 아끼는 인형 같은 신세가 되었겠지.
지금도 레니샤를 힐끔거리는 눈이 불순했다.
“사실 제가 황제 폐하 드리려고 이것저것 사봤거든요!”
린데이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예리카나가 레니샤 앞에 싸 온 것들을 펼쳤다.
“이건 동쪽 바다에서 온 진준데, 정말 알이 크죠? 황제 폐하의 목걸이를 장식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남쪽에서 들여온 다이아몬드예요. 귀걸이로 만들 수 있게 한 쌍이에요. 이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다고 알려진 물소의 가죽인데, 정말 부드럽죠. 폐하의 구두하고 가방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예리카나는 끊임없이 물건을 펼쳐 놓았다.
어지러울 정도의 진열이 끝나고 예리카나가 활짝 웃었다.
“전부 다 지녀주실 거죠? 꼭 사용해 주셔야 해요!”
“나는 인형이 아니다, 예리카나.”
레니샤가 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아아…… 이쯤 되면 황제 폐하를 닮은 인형이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예리카나.”
“정말 예쁘세요. 어떻게 황제 폐하 같은 분이 있을 수가 있는 거죠?”
넋이 나간 예리카나가 중얼거렸다.
레니샤가 혀를 내둘렀다.
지금 레니샤가 무슨 말을 하든 예리카나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듯했다.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레니샤에 대한 찬양을 들어주고 나서야 예리카나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사실 예리카나, 너를 이곳에 부른 건 약속대로 내 보좌관이 되어주겠느냐고 묻기 위해서다.”
오늘 하는 걸 보니 이게 옳은 결정인지 확신이 서진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