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는, 경고했어2022.03.04.
요한이 여유롭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아무래도 요한은 내가 갑작스러운 습격에 겁에 질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떨고 있었는지 그의 손길에 안심이 되었다.
“부인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길 사람이니까.”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요한의 손끝을 꼭 쥐었다. 하얗던 손가락이 한순간 새카맣게 물든 그 모습이, 크게 상처 입은 것만 같아 보였다.
‘누가 습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위기 상황을 맞이하자 마음이 도리어 차분해졌다.
“저택으로 바로 돌아갈 수는 없나요?”
“당연히 있지.”
요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돼.”
그의 단호한 태도가 신뢰를 주었다. 건너편에서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 말소리가 뒤섞인 소란들이 둘의 공간을 침범했다.
“혹시 저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니죠?”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너머에 있는 적을 보는 듯한 눈은 싸늘했다. 그 모습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없애버릴 것처럼 냉혹했다. 주변이 부서지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적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레 단검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단검들은 허공에서 튕겨져 나가 내 옷깃 하나도 스치지 못했다.
“예쁜 부인의 눈에 담기엔 안 좋을 거 같으니 잠깐만 기다려줘.”
요한의 우아한 손이 내 두 눈을 덮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눈웃음치는 요한이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할게.”
귀로 무언가가 깨지고 무너지고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끊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 보지 않고도 따끔하게 느껴지는 적의 가득한 시선들. 오히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포심이 배가되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조금 떨리자, 요한이 나를 품에 꼭 안은 채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쉿. 이제 다 끝났어.”
“정말요?”
“그럼.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어.”
하지만 요한은 아직 내 눈을 가린 손을 치워주지 않았다.
‘상황은 해결된 것 같은데.’
주변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요한이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요한의 단단한 가슴팍에 기댔다.
‘요한에게 문제가 생긴 걸까?’
나는 요한의 목울대 쪽에 살짝 손을 대었다. 따끔할 정도로 강렬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 느낌만 보면, 요한에게 흑마법의 부작용이 생긴 것 같은데.
‘흑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
그것도 아무런 문제 없이. 그때 읽은 책을 떠올려 보면, 아무리 요한이 대단한 흑마법사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미안해, 부인.”
“네?”
“나 때문에 많이 무서웠지?”
요한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울대가 둔탁하게 일렁이는 것도 느껴졌다.
“좋은 시간을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다 망쳐버렸네.”
요한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요한의 상태는 평소처럼 안정적으로 보였다.
‘아니야.’
이건 멀쩡한 척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내 눈을 가리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공작님이 같이 지켜줬잖아요. 오히려 공작님께서 수고가 많았죠.”
그러자 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기던 요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부인. 나는 적이 많아.”
“……그렇군요.”
“그러니 앞으로도 나와 함께 있다면 이런 일을 겪을 수도 있어.”
요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그 말의 저의가 궁금해졌다.
‘왜 나한테 경고해 주는 거지?’
요한 입장에서는 해줄 필요도 없는 말일 텐데. 어차피 내가 무서워한다고 놓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
이렇게 행동하면, 나로서는 내 멋대로 착각해 버린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전 공작님 곁에 있을 거예요.”
어차피 나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요한이었다.
“어째서?”
나는 언제나 위험했으니까. 리베르탄에 있을 때나 여기에서나. 세상에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솔직히 말할 순 없겠지.’
내 눈을 가린 요한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와 눈을 마주 보았다.
“전 공작님의 부인이니까요. 어려울 때 같이 있어주는 게 부부잖아요.”
“이혼하면 아무 상관 없는 타인이 될 텐데?”
“괜찮아요. 제가 그러고 싶으니까요.”
붉은 눈동자의 빛이 더 강렬해졌다. 나는 그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아무리 위험해도 공작님 곁에 계속 있고 싶어요. 공작님을 좋아하니까요.”
*** 요한은 ‘부인이 날 그렇게 좋아해 준다니 감격인걸’ 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돌리며 나를 내 방에 데려다주었다.
‘드레스가 원피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말 괜찮은 게 맞나?’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요한을 자세히 관찰했다. 요한은 내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이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잠시 싸우느라 흐트러진 모습은 그의 위험한 매력을 증가시켜 주었다. 금장으로 장식되어 있던 제복 외투는 어디에다 던져놨는지 사라져 있었다. 내 시선이 그의 손을 향했다. 요한은 익숙한 듯 다시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부인. 한동안 바빠서 부인을 보러 오기 어려울 것 같아.”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춘 요한이 눈웃음치며 입을 열었다.
“감히 부인과의 시간을 방해한 그놈들을 처리해야 해서.”
“지금 바로요?”
“응. 이런 건 바로 처리해야 뒤탈이 없어.”
요한의 붉은 눈동자는 형형한 살기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겉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번에도 조금만 기다려줘.”
“……손은 괜찮은 거예요?”
내가 부작용을 언급하자 요한은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가 픽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요한이 움직이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물었다.
“……부인?”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장갑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다행히 요한은 잠시 움찔했을 뿐, 내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세상에.”
장갑 아래의 손을 본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커졌다.
“이게 뭐예요?”
손가락 끝만 검게 물들어 있던 손이 이제는 손 전체까지 검게 변해 있었다. 심하게 화상을 입은 자국처럼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등을 쓰다듬자, 손등의 핏줄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아플 것 같아.’
하지만 요한은 표정에 미세한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등을 다시 숨겼다.
“보기에만 이렇지 하나도 아프지 않아.”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내가 뭐 하러 부인에게 거짓말하겠어.”
“하지만 저는…… 공작님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여요.”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잠겼다. 왠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위협적인 시선에도, 나는 두려운 마음을 꾹 감추고 그의 소매를 걷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제가 봐도 상관없는 거겠죠.”
그리고 팔까지 번진 흑마법의 부작용이 보였다. 가만히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마력의 반작용이 느껴졌다. 나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그의 셔츠 윗단추를 살짝 풀었다.
‘역시 여기까지도 퍼져 있어.’
요한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부인. 침대 위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면 내가 참기 힘든데.”
“많이 아픈 거 맞죠? 그런데 이 상태로 적을 없애러 가려 했던 거예요?”
내 매서운 눈빛에 요한은 순순히 대답했다.
“부인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 걱정은 고작 이런 데 쓰기엔 아까워. 내가 내 상태도 모르고 움직일까 봐.”
“그건 모르는 일이죠.”
나는 요한의 몸을 끌어당겨 내 침대에 눕혔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요한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부인?”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혼자 아픔을 숨기려 했던 건 아닌가요? 적을 바로 처리하러 간다는 건 핑계고요.”
내가 원래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었나.
‘이렇게 요한한테 따지는 듯한 태도는 좋지 않은데.’
그동안 요한과 함께 지내면서 그의 부인 역할에 너무 몰입해 버린 모양이다. 벌써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요한의 미소가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내 부인이 너무 똑똑해서 속이기도 쉽지 않네.”
그가 다소 무표정해 보일 수 있는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차피 부인이 내 곁에 있어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
“폭주하는 마법사 곁에 있으면 위험해. 그 위험성은 알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요한의 긴 손가락이 내 뺨을 가볍게 쥐었다. 잠긴 목소리로 요한에게 물었다.
“어떻게 위험한 건데요?”
“마법사는 폭주할 때 이성을 잃고, 제정신이 아니게 돼. 그동안 써온 마력의 반작용을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퍼뜨려 모든 것을 부수게 되지. 특히 난 마법사 중에서도 반작용이 심한 편이야.”
흑마법사는 제물을 바침으로써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능력이든가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제물이다. 큰 제물을 바칠수록 부작용도 커지지만, 사용할 수 있는 흑마법의 힘도 강해지니까.
‘요한의 제물은…… 자신의 모든 것이었지.’
더 이상 복수 외에 소중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그였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부작용이 흑마법사 본인이 바친 제물과 관련되어 있다고는 하던데…….’
솔직히 흑마법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해서 어떤 식인지는 잘 모른다. 요한은 흔들리는 내 남색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픽 웃었다.
“쉽게 말해, 이성을 잃고 내 부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갑자기 요한이 나를 확 끌어당겨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요한이 내 바로 위에 있었다.
“그걸 부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래. 부인처럼 약한 사람은 단번에 망가질지도 몰라.”
신성력만이 흑마법의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다. 그것도 일반 신관이 아닌 성녀 정도 되는 힘이어야만 가능하다.
‘요한 말대로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여기서 최선의 행동은 그를 걱정해 주면서 당장 내 목숨을 챙기는 것이다. 원래 내 목적도 그거였다. 적당히 그의 신뢰를 쌓다가 흑막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
‘이런 위험한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해.’
이 무시무시한 흑막이 이런 부작용으로 죽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왜 물러날 마음이 들지 않을까?’
오히려 내 마음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요한을 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요정의 힘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공작님의 말이 맞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대로 공작님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이란 것도 알아요.”
요한이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요한의 본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저는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을까요?”
“…….”
“혼자 아픈 걸 감당하는 건, 외롭잖아요.”
요한은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다. 높은 지위, 완벽한 혈통, 빼어난 외모,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한 힘까지.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리베르탄의 사랑받는 딸이라는 것도 가짜, 지금 있는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도 가짜. 전부 가짜였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다 가진 요한에게서 묘한 동질감이 느꼈다. 그는 이토록 근사하게 반짝이는데. 이 아름다운 빛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부서지는 별처럼 슬퍼 보였다.
“주제넘은 말 해서 죄송해요. 공작님 마음에 거슬렸다면 앞으론 이런 얘기 하지 않을게요.”
나는 손을 뻗어 이 오만하고 잘생긴 남자의 뺨을 감쌌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무조건 제가 죽는 건 아니잖아요. 공작님만 허락한다면 저는 공작님 곁에 계속 있고 싶어요.”
요한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완벽하길 바랐다. 완벽한 블란쳇 공작이 되어 흔들림 없이 그들이 원하는 복수를 이뤄주길 요구했다. 그리고 요한은 그들의 바람대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까?’
주제도 모르는 상상이 자꾸 뻗어 나갔다. 어쩐지 요한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공허를 떠올리게 되었다.
‘요한, 당신은 감히 내가 동정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지만.’
나는 천천히 검게 물들어버린 그의 손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허락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 입술에 닿은 요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마주 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점점 검게 물들며 깊어졌다. 처음에는 무작정 따갑고 아프기만 했던 마력의 기운도 조금 익숙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제가 견뎌볼 테니까요. 정 위험하면 최대한 빨리 도망칠게요.”
요한의 눈에 조금씩 초점이 사라졌다. 살짝 힘이 풀렸던 손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더운 숨결이 목 뒤로 다가왔다.
“……공작님?”
“나는, 경고했어.”
마주치는 붉은 눈동자는 짐승에 가깝게 흉포해졌다.
“참지 못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