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어차피 다 네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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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어차피 다 네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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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어차피 다 네 건데
2022.05.06.

요한이 깊은 눈매를 좁혔다.

‘자상이라고?’
잘 보이진 않아도 흉터라는 건 확실했다.
아무리 입양아라도 공녀의 몸에 자상이라니. 말도 안 된다.

‘하물며 에스텔은 리베르탄에서 사랑받던 딸인데.’
귀족 여성에게 흉터는 굉장히 큰 문제였다. 그런데 리베르탄에서 아끼던 딸에게 흉터가 남아 있다니.

‘리베르탄은 신전과 친분이 있지.’
병약한 에스텔을 위해 신관들이 자주 공작성을 드나들었다.

‘신성력 한 번이면 나을 상처를, 그대로 뒀다.’
입양아인 에스텔이 들어오기 전 있던, 친딸 예스텔라가 있었을 땐, 블란쳇 공작 부부가 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바쳐 신관이 공작성에 상주하기도 했다.
신관에게 아픈 친딸의 시중까지 들게 했다고 했는데.
어쩌면 에스텔은……

‘날 버리고 가.’
그 순간, 요한은 마물 숲에서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비에 젖어 달라붙은 여자의 예쁜 얼굴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를 밀어내는 작은 손이 너무 차가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요한은 그녀가 자꾸 죽으려고 해서 화가 났다. 생명체라면 당연히 살고 싶어 해야 마땅한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어느샌가 요한은 냉철한 판단과 이성을 잃고 감정에 휩쓸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얼굴로 에스텔에게 화냈다.

‘도대체 왜! 왜 자꾸 죽겠다는 소리만 지껄여?’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붙잡아 윽박질렀다.

‘살고 싶다고 빌어!’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언제나 요한에게 예쁘게 웃어주던 에스텔. 귀신같이 요한이 듣고 싶은 말을,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운 행동만 하던 에스텔이 부서졌다.
남색 눈동자가 파도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처럼 빛을 잃었다.

‘살고 싶어 하라고?’

‘내가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에스텔이 서럽게 분노했다.

‘그게 쉬워 보였어?’

‘왜 그게 쉬웠을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그게 쉬울 수 있겠어.’
요한은 에스텔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일시에 치솟던 분노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충격적이었다.

‘요한이 나에 대해 뭘 알아?’
처음으로 숨겨진 진짜 에스텔을 본 것 같아서.
예쁘고 사랑스러운 리베르탄의 입양아 안에 있던 ‘에스텔’이라는 이름의 여자.
사람들이 수없이 말하던 리베르탄의 딸이 아닌 에스텔.

‘그런 주제에, 살고 싶어 하라고?’
요한은 에스텔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옷깃을 쥔 손이 강하게 떨렸다.

“넌 어떻게 그런 표정을…….”
너무나 서럽고 슬퍼서, 처절하기까지 한 얼굴.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그 얼굴에 담긴 감정과 표정이 진짜 그녀를 보여주었다.
강렬한 감정이 파도치듯 요한에게 몰아쳐 그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에스텔, 네 말이 맞아.”
요한은 그동안 에스텔에 대해 충분히 알아봤다고 판단했다.

“난 너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어.”
에스텔 리베르탄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그는 공작저에 직접 첩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첩자들의 보고는 세간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그 가짜를 굉장히 싸고돕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서 같이 지내더군요.’

‘몰래 가짜의 방에 잠입해 봤습니다. 온갖 사치품 속에서 행복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때마다 같은 방을 쓰는 하녀를 괴롭혔습니다. 리베르탄의 피를 잇지는 않았어도 리베르탄과 똑같은 모양입니다.’
몇몇 첩자는 에스텔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망종입니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의 위세를 믿고 있는지, 사람을 정말 기분 나쁘게 무시하고 천대하더군요. 자기도 평민 출신이란 것도 잊었나 봅니다.’

‘저도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했지만, 정말 대단하더군요.’
첩자들은 기본적으로 감정 변화가 거의 없다.
그런 첩자들조차 싫어하게 만드는 여자라니.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몰랐어.”
블란쳇 공작 부인이 된 에스텔은 첩자들의 보고와 다르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리베르탄의 입양아.
새로운 장소에 와서 아닌 척하고 있지만, 곧 첩자들을 질리게 했던 본색이 드러나겠지.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 너를 더 알려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빗속에서 요한이 목격한 얼굴은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나만은, 너에 대해 더 알았어야 했는데.”
요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그 역시 그녀를 그저 형식적 아내로 생각했다. 진짜 그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에스텔, 넌 리베르탄에서 사랑받았던 게 아니라 방치되었던-”
에스텔이 쌔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에스텔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도 잘 자고 있었다. 고이 잠든 얼굴은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다.
투둑, 툭- 창가에 긴 빗줄기가 때리고,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지독한 장마였다.
요한이 침대에서 일어선 순간, 시커먼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쾅! 콰강!
그때 얌전히 잠들어 있던 에스텔이 흠칫 몸을 일으켰다.

“에스텔. 잘 잤어?”
요한이 다정하게 목소리로 에스텔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에스텔은 요한이 있는 쪽을 바라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닥을 응시할 뿐이었다.

‘눈에 초점이 하나도 없어.’
사랑스러운 얼굴은 파랗게 질려, 두려운 듯 울음을 참고 있었다.

“……에스텔?”
요한이 에스텔의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얹으려 할 때였다.

“시, 싫어요-!”
에스텔은 의식 없이 급하게 몸을 웅크렸다.
어찌나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는지, 붙잡은 팔에 붉은 자국이 남는 것도 모자라 손톱에 찍혀 피가 나올 것만 같았다.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요한은 이를 아득 깨물며 에스텔을 진정시키려 했다.

“에스텔, 정신 차려. 여기는.”
에스텔은 말이 전혀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몸이 상하게 둘 수는 없었다.
요한은 힘겹게 에스텔의 손을 떼어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에스텔의 눈가가 벌겋게 변해 눈물이 흘러내렸다. 겁에 질린 에스텔이 두 손을 싹싹 모아 빌었다.

“아프다고 안 할게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에스텔!”
콰강! 다시 천둥이 쳤다.

“꺄아아악-!”
에스텔이 몸을 마구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싫어! 아파! 아파서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몸부림치던 에스텔의 발이 다시 침대 밑에 찍히며, 벌겋게 부어올랐다.
아무래도 저 천둥이 문제인 것 같다.
요한은 커튼을 쳐 창밖을 가리고, 소리를 차단했다.
그래도 에스텔은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어딘가에 목이 졸리는 것처럼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워낙 발음이 뭉개져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에스텔.”
요한이 에스텔의 두 뺨을 조심스레 잡아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그녀의 얼굴엔 혈색이 전혀 돌지 않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어.’
요한은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묻고, 숨을 불어넣었다. 에스텔은 밀려드는 따듯한 온기에 조금씩 진정되었다.

“이제 괜찮아?”
몸의 떨림이 멈추자, 요한이 다시 에스텔을 살폈다.
에스텔은 다시 곤히 잠들었다.

‘방금 전이 거짓말 같군.’

악몽이 아닌 현실임을 알려주는 건, 에스텔이 침대에 부딪혀 부어버린 발목밖에 없었다.
요한이 에스텔의 발목을 들어서 살폈다. 침대 밖에 겨우 빠져나온 여자의 발은, 몹시 앙상했다.
그는 에스텔의 발목에 붕대를 감아준 뒤 잠든 에스텔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어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녀가 무너질 것 같았다.

“괜찮아, 에스텔.”
요한이 들리지 않을 그녀에게 쉬지 않고 속삭였다.

“내가 있잖아. 지금 내가 있잖아.”
그의 목울대가 분기와 슬픔으로 들끓었다.

‘고작 방치가 아니다.’
에스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방치 같은 수준일 리 없어.’
***
나는 선명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었다.

“저 가짜는 어떻게 처리할 셈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니. 간도 크지.”
빛나는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조심스럽게 연분홍색 입술을 달싹였다.

“너무 그러지들 말아요. 그녀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햇살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굽이치는 금발,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와 상냥하고 자애로워 보이는 미소, 그린 듯한 청순가련해 보이는 미녀였다.
그간 초상화로만 봤지만, 누군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예스텔라였다.

‘예스텔라는 죽지 않았었나?’
죽었다고 하기엔, 그녀는 건강해 보였다.
예스텔라의 옆에는 그녀는 보호하듯 낯익은 남자들이 있었다.

“예스텔라, 넌 너무 착해.”
가냘픈 예스텔라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있는 황태자.

“맞습니다, 예스텔라 님. 저건 당신을 사칭한 것도 모자라 해하려 한 악녀입니다.”
한 손으로는 예스텔라를 지키기 위한 검을, 다른 손은 소중히 예스텔라의 고귀한 손을 붙잡은 채 서 있는 리안드로.

“하지만 그래도…….”
내 주위로 예스텔라의 수많은 추종자가 생겨났다. 추종자들이 내게 돌을 던졌다.

“사라져, 가짜!”

“분수도 모르는 추악한 악녀!”
예스텔라는 나를 빤히 보며 긴 속눈썹을 떨구었다.

“모두 그만하세요. 저는 이미 그녀를 용서했어요.”
그러자 리안드로가 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죄인은 죄인입니다. 예스텔라 님께서 용서하셨다고 해도, 죄인을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 예스텔라. 네 고운 마음씨는 아름답지만, 세상엔 아름답지 않게 처리해야 할 일들도 있어.”

“아…….”
안타깝게 나를 바라보던 예스텔라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요한! 제게 와주셨군요!”
어느샌가 내 옆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역시 제 믿음은 틀리지 않았어요. 드디어 절 당신의 진짜 부인으로 받아주시려는군요.”
예스텔라는 남자의 팔짱을 끼며 나를 쓱 바라보았다.
우월감이 어린 시선이 날 훑어내렸다.
도톰한 입술을 피식 올린 예스텔라가 화려한 금발을 팔랑이며 뒤돌아섰다.
***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이건 대체 무슨 꿈이지?’
가슴이 내리눌린 것처럼 갑갑했다. 나는 앞섬을 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왜 내 꿈에 예스텔라가 나왔을까.’
물론 예스텔라 꿈을 꾼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베르탄에서 나온 뒤 예스텔라 꿈을 꾼 적은 없는데.’
리베르탄에서 꿨던 예스텔라 꿈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보통 예스텔라가 나와서 날 괴롭히고, 리베르탄 공작 부부를 시켜서 벌을 주게 하고,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비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예스텔라는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예스텔라가 살아 있었다면, 애초에 리베르탄에서 날 입양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나무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 진짜 이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이었는데?

-예스텔라가 살아 돌아 와 저를 쫓아내는 꿈이요.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는데…….
예스텔라를 떠올리는 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전 평생 죽은 예스텔라의 그림자에 갇혀 살았어요.

-아가…….

-괜찮아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블란쳇 공작가에선 날 ‘복수 대상’으로 볼지언정, ‘에스텔 리베르탄’으로 봐주니까.

-그러니까 이건 정말…….
그때 붕대가 감긴 발목이 보였다.

‘아프진 않은데?’
붕대를 풀어보자, 안에는 멍이 보였다. 언제 또 다쳤담.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또 괜한 오해를 사게 생겼네.’
생각해 보니 간밤에는 요한과 함께 잠들었다.

‘요한이 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겠다.’
자길 부른다는 걸 알았는지 요한이 벌컥 들어왔다.

“요한. 어젯밤에-”
방금 막 씻고 나왔는지, 아래에는 긴 수건을 두르고 다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곧은 빗장뼈와 넓은 어깨. 우아하고 탄탄하게 각이 진 몸.
보고 있는 것만으로 욕망을 자극하는 퇴폐적인 몸이 물기에 젖어 빛났다.

‘어떻게 저런 남자가 있지?’
실존하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요, 요한. 왜 다 갈아입지도 않고 왔어?”

“잠시라도 에스텔과 떨어지기 싫어서.”
요한은 머리를 털며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오늘은 널 치료하기 위해 내 연구실에서 진찰할 거야.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어.”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옷 갈아입고 와.”
자꾸 요한의 근사한 몸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시선을 떼려고 했지만 막상 떼려니 눈이 움직이지 않고 자꾸 긴 수건에 감싸여진 아래를 훔쳐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씻어야겠다. 그동안 요한은 준비하고 있으면 되고.”

“아아, 그렇지.”
요한은 막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씻을 필요가 있겠어. 그러면 내가 씻겨줄게.”

“뭐?”

“이참에 옷 입을 거 없이 그대로 가면 되겠네.”
갑자기 너무 저돌적이잖아요!

“너무 놀랄 거 없는데.”
요한이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촉촉이 젖은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으면 다 봐. 넌 그래도 되니까.”

“왜, 왜요?”

“어차피 난 다 네 거니까.”
요한이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이제 나도 널 씻겨주느라 볼 거고.”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싫다고 해야 하는데.’
침대를 짚은 내 손을 감싸는 그의 큰 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요한의 뜨거운 온도가 내 안의 욕망을 달구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 내 거예요?”
그러자 요한의 붉은 눈이 희열로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