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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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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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2022.08.19.
미르유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어, 어머님.”
“허.”
이사벨라 왕비는 미르유의 당황에도 굴하지 않았다.
“어찌 한낱 영애가 로이엄 국왕 대리인 나를 계속 사사로이 부르는 거지?”
이사벨라 왕비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람을 더 스산하게 하는 기세를 풍겼다.
“어머님, 그러지 마셔요.”
미르유는 급히 이사벨라 왕비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고집스럽게 울먹였다.
‘이사벨라 왕비는 냉정한 겉과 달리 마음은 여린 편이지.’
“전 정말 억울해요. 제발 저를 믿어주세요. 저도 로이엄 가족이고, 저를 딸처럼 아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저보다 더 이 결혼식에 많이 기대하셨고요.”
“그래, 한때 그랬지.”
“당장 미운 마음이 들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주실 수 있잖아요.”
“어디 한번 얘기해 보거라.”
미르유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봐,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계셔!’
이사벨라 왕비의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면. 미르유를 완전히 외면했을 거다. 이렇게 미르유에게 반응해 주고 있다는 자체가 가망이 있단 얘기였다.
미르유가 서럽게 눈물을 떨어뜨리며 애원했다.
“저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마음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결혼식 날이 되고, 갑자기 헤센이 도망쳐 버리고…….”
그 말에 이사벨라 왕비가 입매를 미세하게 움찔했다.
미르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두가 목격했더라도 일단 이 상황을 넘기는 게 더 중요했다.
“헤센이 떠난 자리에서 블란쳇 공작 부인이 보낸 편지가 발견됐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되었을 뿐이에요. 나머지는 다 진짜예요.”
“…….”
“저를 딸처럼 여긴다셨잖아요. 그 말이 진심이라면-”
“그래, 내 너를 딸처럼 귀히 여겼다.”
“맞아요, 그런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려서-”
막 미르유가 이사벨라 왕비를 보며 한층 더 눈물을 쏟으려던 찰나였다.
“그래서 그 말을 믿고 그리 방종하게 굴었더냐?”
“-무척 죄송, 예……?”
“네가 말하던 그 편지가 바로 이것이겠지.”
이사벨라 왕비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으로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눈물을 흘리던 미르유가 어색하게 편지를 받아 들었다.
“이 편지를 왜 어머님께서…….”
[미르유와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저를 모함하는 블란쳇 공작 부인의 편지가…….”
[저는 이미 로이엄 저택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다 잊었으니, 두 분의 결혼에 축복이 따르길 바라요.]
편지에는 미르유를 음해하는 말 같은 건 조금도 적혀 있지 않았다. 미르유가 편지를 붙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에스텔이 한 게 아니면, 헤센은 왜 갑자기 변한 거지?’
현실이 거짓말 같았다.
“미르유 쥬티. 애초에 너는 모자람만 가득한 신붓감이었다.”
미르유가 멍하니 편지에서 고개를 들어 이사벨라 왕비를 올려다봤다.
이사벨라 왕비는 우아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분노가 여실히 드러나는 눈동자로 미르유를 노려보았다.
“그런 너를 받아들인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였다. 네가 로이엄 왕세자인 헤센, 내 아들이 사랑한다며 데려온 여자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사벨라는 미르유를 데려오던 날의 아들을 잊지 못했다. 헤센은 그날 밤 아주 늦은 시각, 이사벨라를 찾아와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또다시 실망을 안겨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합니다.’
‘모든 잘못은 왕세자의 지위를 잊고 감정에 휘둘린 저이니, 그 사람을 꾸짖지 말아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이사벨라는 아들의 고백에 참담했다.
미르유가 부족한 신부라 생각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헤센이 어머니인 자신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에서 제 모습을 반성하게 됐다.
‘헤센. 그 아이가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라면, 떳떳해져라. 이 어미가 도와주겠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미르유를 위해 정말 모든 것을 해주었다.
“그간 나는 네 모든 부족함을 감수했다. 지참금 대기 어려운 부족한 가문과 사교계에서 제대로 힘쓰기 어려운 네 처지를 보살피고, 심지어 네가 내 딸과 친 사고조차 모두 내가 알아서 수습했다.”
그중에는 친부모도 딸에게 해주기 어려운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라 왕비는 그럴 때조차 미르유를 예뻐했다.
“사교계에서 흉이 되었던 네 흉터조차 아픔으로 여겨 로이엄 왕국에 너를 위한 곳을 만들기도 하였다. 네가 왕세자의 약혼녀로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도 다 괜찮다 여겼다.”
죽은 남편을 대신해 왕국을 보살피느라 어미로서 보살핌 하나 주지 못하고 엄하게 대해야만 했던 헤센, 다이아나와 달리 제 품에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던 헤센.
“하지만 너는 시작부터 모든 것이 거짓이었구나.”
“어, 어머님. 그게 아니라-”
“네 불쌍한 과거도, 마음 아픈 목의 흉터도, 하다못해 모두의 앞에서 거론하던 그 임신조차 거짓이었다니! 그러고도 네가 내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어?”
이사벨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는 감히 로이엄 왕국을 거짓으로 속이고, 죄 없는 자를 깎아내려 능멸했으며, 거짓 임신으로 로이엄의 마지막 남은 명예조차 떨어뜨렸다.”
이사벨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분하게 미르유의 죄를 열거하던 이사벨라는 목이 멘 듯 목울대를 울렁였다.
미르유는 헤센이 사랑하는 여자였다.
헤센이 미르유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넌.”
이사벨라가 벼락처럼 노호했다.
“감히 내 아들을 상처 입혔어!”
짜악-
이사벨라는 거칠게 미르유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어미인 나조차 상처입힐까 조심하던 내 아들, 헤센. 그 아이를 감히 네가, 너 따위가!”
어찌나 거친 힘이었는지 뺨을 맞은 미르유의 볼이 부풀어 오르고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사벨라의 눈빛은 여전히 맹수처럼 흉흉했다.
한낱 짐승도 새끼가 다치면 분노하는 법이다.
“너는 감히 멀쩡히 숨 붙이고 살 생각도 하지 마라.”
이사벨라 왕비는 연합 왕국의 중심인 로이엄 왕국의 국왕 대리였으며, 로이엄 왕국은 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왕국이었다.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네년을 짓밟고 말 테니까.”
미르유가 무엇이라도 할 듯이 빌었다. 그런 미르유의 위로 이사벨라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를 씹어 삼킬 듯이.
그리고 미르유가 맞이할 현실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가짜의 완벽한 몰락이었다.
***
결혼식은 완전히 망해버렸다.
“그 모든 게 가짜였을 줄이야. 어떻게 그런 짓을 벌였던 걸까요? 저는 무서워서 그럴 엄두도 나지 않을 텐데.”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으니 그랬겠지요. 그나저나 로이엄 국왕 대리님께서 그렇게 분노한 모습은 저도 오늘 처음 봤습니다. 항상 귀족답게 평정을 지키던 분이셨는데…….”
“오늘 일을 그 누가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저였어도 그랬을 겁니다.”
식장에 온 하객들은 결혼식에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소식에 고개를 저으며 사라졌다. 답례품보다 더한 구경거리를 얻어서 대부분 만족한 얼굴이었다.
“제 주위에 하루빨리 오늘 일을 전해야겠어요. 블란쳇 공작 부인이 그간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마지막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으니, 너무 안쓰럽다고요.”
“로이엄 왕국도 피해자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블란쳇 공작 부인이지요.”
“그런데 임신도 가짜였다니, 성녀님이 잠시 무엇을 착각한 걸까요?”
“솔직히 이번 일은 성녀님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
그리고 나는 다이아나의 위로를 받으며 블란쳇 공작가의 마차를 기다렸다.
“저 때문에 결혼식이…….”
“아니에요, 에스텔. 오히려 로이엄에서 에스텔에게 감사해야죠.”
다이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동안 로이엄 왕국의 입지가 예전 같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파혼하는 것이, 사람 하나 잘못 들여서 왕국 자체를 말아먹는 것보다는 낫죠.”
“정말요?”
“그럼요. 아마 오빠도 그런 마음으로 결혼식장에서 도망쳤을 거예요.”
헤센은 당장 결혼식장에서 뛰쳐나간 이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뭐, 나 같아도 결혼식 깨고 도망간 날에는 집에 안 들어올 것 같긴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이번 결혼식 파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준 다이아나를 향해 싱긋 웃어줬다.
‘미르유는 내가 헤센에게 말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헤센 왕세자에게 난 친분 하나 없는 귀부인일 뿐이다. 아무리 증거를 가지고 가도 거부감이 생기거나, 도리어 미르유를 더 불쌍히 여길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다이아나가 직접 헤센을 움직이게 하는 거였다.
‘다이아나, 제가 말해줄 수 없는 건 없어요. 하지만…… 다이아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한번 생각해 봐요.’
그런 식으로 다이아나가 내가 의뢰한 정보 길드에 가도록 유도하고, 그녀가 미르유에 대한 진실을 알게 했다.
처음 나를 몰아붙일 때도 용감했던 다이아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제 오빠에게 진실을 털어놓기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실제로 다이아나는 이전에 미르유의 금반지를 빼 와 나한테 상의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미르유가 가짜 임신으로 상황을 극복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가짜라는 점에서 그녀는 더 큰 덫에 걸리고 말았다.
‘애초에 결혼식장을 갑자기 추천받을 때부터 의심했어야지.’
미르유가 기쁘게 받아들였던 은백조 결혼식장은 내가 나디아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은백조 결혼식장의 주인인 테밀러 상단주가 나디아의 대부였으니까.
특히 은백조 결혼식장 근처는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나무들이 오는 타이밍을 통해 사람들의 기척을 파악하기도 쉽고, 곤경에 빠져 이성을 잃은 미르유를 내 편의대로 유도하기도 쉽다.
‘미르유는 평생 모르겠지?’
사실 헤센은 결혼식 전날, 미르유가 사생아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혼식 상황을 들어봤을 때, 그는 미르유가 사생아라는 것과 상관없이 미르유와 결혼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이아나를 통해 전달한 내 편지.’
미르유의 흉터에 음해만 받았던 내 선량한 편지. 그 편지는 헤센의 죄의식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 이후 헤센은 미르유와의 결혼을 포기하게 됐다.
‘뭐, 어떤 게 진짜 이유였을진 나도 모르지만.’
결국 미르유는 자신이 지은 죄로 모든 것을 얻고, 제 손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쥬티 남작가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미르유를 파문할 것이고, 가문의 보호조차 없는 평민 신세가 된 미르유에게 날아들 칼날은 더없이 위협적일 거다.
‘거기다 오죽 유명했어?’
귀족 신세를 벗어나 평민으로 살아남기도 어렵거니와 애초에 미르유는 지은 죄가 너무 많다. 다이아나가 내 손을 잡아줬다.
“어머니께서도 에스텔에게 많이 고마워하실 거예요.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보상할게요.”
“보상이라니요, 어떻게 제가 로이엄 왕국에서 그런 걸 받아요.”
“꼭 받아야 해요. 에스텔이 우린 로이엄 왕국을 구해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야.
“알았어요. 그러면 다이아나의 마음을 봐서라도…….”
열심히 피해를 보상받도록 하겠습니다!
***
블란쳇 공작가의 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다.
‘아직 해가 안 졌네?’
그 많은 일이 벌어지고도,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나도 모르게 생각에 빠졌다.
‘멍청한 미르유.’
절망에 빠져 소리 지르고, 악에 받쳐 발버둥 치던 미르유.
‘그러게 왜 그렇게 서툰 거짓말을 했니?’
모든 것을 가짜로 치장한 채 주제 모르고 진짜로 살고 싶어 했던 그녀.
나는 미르유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 애초에 내 모든 계획은 미르유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얼마든지 틀어질 수 있었다.
거기다 미르유는 본인의 선택으로 모든 일을 저질렀다.
내 선택과 달리 가짜가 되어버린 나와는 전혀 달랐다. 어찌 보면 미르유 역시 나를 한없이 가짜로 만든 가해자 중 하나니까.
하지만 나 역시 미르유처럼 가짜기도 했다.
‘가짜는 진짜와 달리 언제나 더 노력해야 돼. 더 처절하게 발버둥 쳐야 해.’
완전히 산산조각 나던 미르유의 몰락을 보며 이상하게 씁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진짜는 언젠가 기다리다 보면 증명받을지 몰라도-’
가짜의 끝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애초에 그냥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짜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에스텔.”
마차에서 나를 기다리던 요한이 내게 손을 뻗었다.
“준비했던 일은 잘됐어?”
“응, 잘 끝났어.”
나는 요한을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너는 내 진실을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미르유처럼 모든 게 무너져 버리기 전에 내 입으로 모든 것을 토로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남의 결정으로 폭로된 진실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요한이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른하게 말했다.
“에스텔, 너는 너무 마음이 여려.”
“……응?”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그래. 미르유 쥬티를 향한 네 방식, 너무 자비로웠어.”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나도 모르게 몸이 멈칫했다.
“그런 식으로 상대한테 기회를 주면서 움직이는 건 좋지 못해.”
요한이 내 계획을 모두 꿰뚫어 본 듯 말했다.
“그렇게 해서 상대가 제대로 무너지겠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했는데?”
“당장 감옥에 끌려 가 죽게 했어야지. 그 여자와 관계된 주동자들을 모두 엮여서 몰락시키고, 없는 증거를 만들고, 너를 음해하던 자와 친분이 있던 자들조차 지옥 속에 처넣어야지.”
“…….”
“그래야 가장 끔찍하게 않겠어?”
분명 요한은 미르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마냥 미르유에 대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없는 사람까지 당하면 어떻게 해?”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요한이 다정하게 내 귓가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줬다.
“어차피 제 주변의 억울함은 그자의 고통이 되어줄 거야. 네 복수를 위한 훌륭한 장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