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너를 더럽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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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너를 더럽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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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너를 더럽히고 싶어
2022.08.30.
눈앞에 페티 모리슨이 있다.
‘망설이지 마?’
나른한 요한의 목소리가 귓가를 찌르르 울려 가슴 깊은 곳까지 퍼졌다. 고요한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무엇을?’
페티 모리슨은 의자에 사지를 묶인 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부디 자비를…….”
평범하고 흔한 갈색 눈동자에선 공포가 느껴졌다.
‘공포라니.’
나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시선이다.
보통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악의와 경멸, 아니면 분노나 증오 같은 것들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시선 대부분은 약자를 바라볼 때였다.
“내가 당신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요한이 뒤에 있다는 이유로, 나는 한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됐다.
‘이런 기분이구나.’
누군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멋대로 심판해도 될 것 같은 위치.
‘요한은 언제나 이 위치에서 나를 바라봤겠지.’
나는 고요한 시선으로 페티 모리슨의 눈을 마주 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페티 모리슨의 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집안 형편상 자극적인 기사를 써야만 해서…….”
그는 몸 둘 바를 모르고 내 시선을 피했다.
“그것 외엔 할 말이 없어요?”
이 위치에서 보니, 아래 있는 자의 애원이나 절박한 표정 같은 건 그저 우습게 느껴졌다.
페티 모리슨은 이미 내게 죄를 저질렀고, 그가 뭐라 하든 난 피해를 입었으며, 내 결정 한 번이면 쉽게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당신은 아무 관련 없던 나를 이유 없이 깎아내리고, 흠잡고, 상처 줬어요. 그 덕분에 나는 죄 없이 악녀가 되었고, 온갖 사람에게 심판받았어요.”
“저, 저는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이 쓴 기사 몇 줄, 지어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나는 내 인생의 가능성을 잃었고요.”
리베르탄의 악녀라는 그 소문.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수모를 겪진 않았을 거다.
‘최소한 내가 무언가를 더 할 기회가 있었겠지.’
하지만 리베르탄의 악녀라는 소문 때문에 나는 저택에 감금되었고, 리베르탄에서의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됐다.
내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하던 페티 모리슨이 주저하며 빌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 말을 믿어?”
요한이 시니컬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변명일 뿐이잖아.”
“아, 아닙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고, 이대로 용서해 주신다면 어떻게든…….”
“그러면 네놈이 뭘 할 건데?”
요한은 장난스럽게 페티 모리슨이 묶인 의자를 발로 툭 쳤다. 의자가 살짝 방향이 움직인 것만으로도 페티 모리슨은 칼에 찔린 것처럼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죄를 알면 죽어야지. 왜 변명하려 해?”
요한은 페티 모리슨의 반응이 우습다는 듯 픽 웃다 내 어깨에 제 팔을 둘렀다. 그의 엄지가 내 목덜미를 쓸었다.
“에스텔, 네가 남 생각해 주는 건 좋지만, 그렇게 해봐야 너만 손해야.”
“그런가요?”
“네 상처만 생각해. 그게 가장 중요한 거 아냐?”
언뜻 듣기엔 요한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내 처지 같은 건 알아주지도 않았잖아.’
나는 고개를 들어 요한과 눈을 마주했다. 요한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단검까지 내 몸의 일부가 된 듯 심장 소리가 커졌다.
어쩌면 내가 극도로 흥분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 별거 아닌 사람이 저지른 죄보다, 네가 받았을 상처가 더 신경 쓰여. 그러니 네가 더 편해질 수 있게 하고 싶어.”
요한은 친절하게 단검으로 찌를 위치까지 정해줬다.
“찌르고 싶은 만큼 찔러.”
요한의 큰 손이 단검을 쥔 내 두 손을 잡고 이끌어 페티 모리슨의 목 위에 날이 닿게 했다. 날 끝에 페티 모리슨이 공포에 떠는 게 느껴졌다.
“늘 당하기만 했던 게 억울하지 않아?”
***
요한은 눈매를 좁히며 에스텔을 바라봤다.
에스텔이 페티 모리슨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날에 살짝 긁힌 페티 모리슨의 목에서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맞아.”
에스텔의 희고 긴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이대로 당하기만 하는 건 억울하고 짜증 나.”
“그래, 그럴 만해.”
“나한테 이렇게 한 이유가 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요한은 에스텔의 감정에 공감해 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목소리만으로도 에스텔 내면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씨 착한 에스텔이 망설이긴 했어도, 이번 무대는 좀 다를 거다.
그녀는 참지 않을 거다.
‘내가 그랬듯이.’
그렇게 에스텔도 자신과 같은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요한은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흑마력을 움직였다. 페티 모리슨이 공포에 차 발버둥 치려 했지만, 흑마력에 몸이 먹혀 반항하지 못했다.
‘지금이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 안에 묘한 마법진이 떠오르며 흑마법이 발동됐다.
이제 에스텔이 할 행동은, 이 멍청하고 죄 많은 놈을 죽여버리는 것만 남았다.
“페티 모리슨 씨.”
에스텔은 단검을 그대로 찌를 듯 잡았다가 날을 꺾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있어요?”
“그,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러면 이제 죽어도 후회 같은 건 없겠죠, 본인 잘못으로 죽는 거니까?”
에스텔이 페티 모리슨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페티 모리슨은 사색이 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딱 페티 모리슨의 눈앞, 그 위치에서 단검이 멈췄다.
에스텔은 피식 웃으며 무심하게 단검을 바닥에 버렸다. 요한이 에스텔의 행동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죽이지 않을 건가?’
에스텔의 행동은 요한이 기대했던 대로가 아니었다.
“에스텔, 다른 방식으로 복수하려고?”
에스텔은 요한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에스텔은 페티 모리슨을 넘어 옆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페티 모리슨에게 했듯,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까지 날 미워한 이유가 뭐예요? 솔직하게 말하면 기회를 줄게요.”
당연히 대답은 시원치 않았다.
“그,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스텔은 다시 그 사람의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려준 뒤 옆으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볼 모양이다.
‘그래 봐야 아무 의미 없을 텐데.’
요한이 그들을 납치해다가 제물로 바치기 위해 묶어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여기 모아놓은 놈들은 모두 쓰레기다.
죄질이 적당히 나쁜 놈들이었다면, 나중에 에스텔이 알았을 때 신경 쓰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요한은 에스텔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진심으로 분노했잖아.’
에스텔의 울분에 찬 반응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에스텔의 복수를 확신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저희 출판사가 영세한 바람에 제국의 이목을 급하게 끌려면 어쩔 수 없이-”
그런데 에스텔은 금세 분노를 털어낸 듯 담담하게 그들의 변명을 들었다.
‘왜 복수하지 않는 거지?’
원한이 부족해서일 리는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날 만한 상황이다. 에스텔이 납득할 수 있도록 친절히 증거들도 전부 준비하지 않았나.
‘왜 이 여자는…….’
요한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가.
“변명이 안 되는 거 아세요?”
“…….”
“몰라도 어쩔 수 없죠. 나도 그랬으니까요.”
에스텔이 마지막 사람에게 대답을 들은 뒤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요한이 에스텔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네가 복수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 해줄까?”
생각해 보면 곱게 자란 에스텔에게 복수란 너무 무거운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에스텔이 말간 남색 눈동자를 그를 바라봤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왜?”
요한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에스텔의 뺨을 감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복수하지 않고 놓아준다고?”
“누가 복수하지 않는데?”
에스텔이 배시시 웃었다.
“이게 내 복수의 방식이야.”
“…….”
“난 저 사람들이 죄를 짓고 그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돌아보고 바로잡을 기회는 있어야지.”
에스텔은 이 참혹한 인간쓰레기들 사이에서 더없이 고결했다. 요한이 입매를 비틀었다.
“설마 저들이 바뀔 거라 믿는 건 아니지?”
“그냥 내가 그러고 싶은 거야.”
“…….”
“많이 고민해 봤는데, 결국 내가 바라는 게 이거더라고.”
요한은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에스텔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곧 죽어도 피해를 입은 만큼, 몇 배로 갚아주고서야 직성이 풀렸으니까.
요한 자신을 괴롭힌 만큼 더 거대한 지옥 속에 처박기 위해 노력하는 괴물이었으므로.
‘너를 더럽히고 싶어.’
마음속 깊이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음에도 반짝임을 가진 여자.
‘아니, 네가 그대로였으면 해.’
요한은 에스텔을 제가 있는 지옥까지 추락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녀는 한없이 더러운 줄 알았던 요한 안의 잊어버린 마음을 되새겨줬다.
에스텔을 괴롭히던 자들을 처단하고, 그들을 제물로 에스텔의 병을 치료하려 했던 그의 완벽한 계략.
‘완전히 실패했네.’
에스텔은 또다시, 그의 계획을 부정해 냈다.
***
나는 바닥에 버린 단검을 힐끔 쳐다봤다.
‘진짜 죽일 뻔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들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다. 아니다. 그걸 내 손으로 하기는 싫으니까 요한한테 부탁해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
불현듯 스친 생각만 아니었다면.
‘이러면 내가 요한과 다를 게 뭐지?’
요한의 행동을 이해하지만, 나는 요한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너무 슬플 것 같아.’
누구보다 완벽해 보였던 요한의 계획에서도 나라는 억울한 피해자가 존재했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최소한 나는,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 자신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아 슬퍼했던 어린 시절의 나한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들어봤다.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결론적으로 내 예상대로 용납할 수 없는 변명만 나왔지만, 나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런 내가 답답했다면 미안해.”
요한의 눈빛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짙어졌다.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새겨진 강렬한 열기, 뼈째로 먹잇감이 된 것처럼 찌릿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넌 이들에게 어떤 기회를 주고 싶은데?”
“최소한 돌아가서 정정 기사부터 내라고 해야지.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시인할 수 있게. 어차피 지금 돌아가면 여론이 많이 바뀌었을 테니 어려운 일도 아닐 거고.”
“그래도 마찬가지라면?”
“그때부터는 내가 더 할 말이 있을까?”
나는 제 무덤을 파는 멍청이들의 인생까지 책임져 줄 생각은 없다.
“요한이 알아서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처분해 줘. 모름지기 기회를 저버린 만큼 대가를 더 치러야지.”
“참 이상해.”
요한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나를 확 끌어안았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문질렀다. 목덜미에 번지는 숨결에 솜털이 서고 소름이 돋았다.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이럴 수 있는 건, 다 요한이 있기 때문이야.”
이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만큼, 이들이 다시 죄를 지었을 때 벌해주기도 하겠지.
‘요한 입장에서는 내가 짜증 날 수도 있겠다.’
솔직히 요한과 나는 입장 자체가 다르다. 나는 저들을 벌하지 않아도 내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저 사람들한테 한 가지 감사하는 게 있어서 조금 더 마음 써준 것도 있어.”
“그게 뭔데?”
“저 사람들이 나쁜 소문 내줘서 요한을 만날 수 있었던 거잖아.”
나는 요한의 목을 잡고 그에게 사르르 눈웃음 지었다.
“그래서 난 괜찮아.”
그리고 요한의 모양 좋은 입술에 쪽, 입술을 맞췄다.
요한이 열기에 찬 숨을 들이쉬며 내 두 볼을 쥐어 가깝게 당겼다.
“역시 난 넌 못 이기겠다.”
그 순간, 재갈에 물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인형들이 끔찍하게 찌그러지더니, 폭죽처럼 터졌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징그러운 피 분수 같은 게 아니었다.
“이건…….”
반짝이는 별 가루와 꽃잎들이 마구 휘날렸다.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던 내 눈동자가 요한과 마주쳤다.
요한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내가 너한테 복수 같은 끔찍한 짓을 시킬 리 없잖아.”
***
“뭐야, 나만 깜짝 놀랐잖아!”
에스텔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장난칠래?”
“미안, 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 장난치게 되네.”
거짓말이다.
이건 간단한 눈속임일 뿐이다. 요한은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저들을 대가로 바치려 했다. 흑마법에 오류가 나서 이상한 반응이 왔을 뿐이다.
나른한 웃어 보이는 요한의 심장은 검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흑마법 따위로는 그녀를 치료할 수 없다. 그리고 요한은 자꾸만 흑마법에 문제가 생기는 이 상황에서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충분히 놀라게 했으니 이제 진짜 안 놀랄 곳으로 데려가 줄게.”
에스텔은 이미 저주에 걸려 있다.
에스텔을 치료하기 위해선, 그 저주부터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