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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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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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2022.09.30.
블란쳇 공작 부인이 피를 토했다.
“그게 사실인가?”
고요한 예배실에 거대한 소란이 퍼졌다.
“피, 피라니. 어디 암습이라도 당하신 건가?”
“막 신관들을 따라가 봤기에 그건 확실히 알 수 있네. 암습 같은 건 없었어. 성녀님과 단둘이 있으신 상황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셨어. 그래서 성녀님께서 공작 부인을 해친 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 거지.”
아직 사람들은 에스텔의 악녀 이미지에 익숙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더 부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의, 의혹이긴 하겠지만 이런 끔찍한 일과 성녀님과 또 엮이다니.”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블란쳇 공작 부인과 성녀님이네요. 성녀님께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해도 성녀님이 일방적으로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지 않나요?”
“방금 블란쳇 공작 부인을 부른 것도 성녀님이었잖아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순간 독실한 귀족이 나서서 성녀를 보호했다.
“헛소리! 다들 성녀님께서 신성력을 써서 사람들을 치료해 줬다는 이야기 못 들었나? 성녀님께서 사람을 해칠 분이야?”
“그건 그렇지만…….”
“분명 무슨 사정이 있으시겠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봐도 늦지 않네.”
한 사람이 강경하게 나서자 분위기는 다시 성녀를 옹호하는 쪽으로 뒤집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 사이에 남은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은 몰라도 벌써 두 번째잖아.’
‘성녀라고 그대로 믿기보다는 직접 가서 한 번 더 확인해 봐야겠어.’
예배실의 귀족들은 조심스럽게 블란쳇 공작 부인이 쓰러졌다는 현장으로 향했다. 공작 부인이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상황은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
성녀 스텔라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시몬 추기경에게 달려갔다.
“시, 시몬 추기경!”
에스텔이 쓰러지는 순간에 맞춰 도착한 사람들이 성녀를 향해 꺼림칙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중에는 그녀의 편을 계속 들던 영애도 있었다.
시몬 추기경이 울먹거리는 성녀를 토닥이며 차분히 상황을 물었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추기경.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눈가를 붉게 물들인 스텔라는 결백해 보일 정도로 순진무구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피를 토하고 쓰러진 에스텔보다 더 강렬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스텔라의 변명을 듣기보단, 쓰러진 에스텔을 보고 연신 충격에 빠졌다.
투명하게 빛나는 백금발에, 유난히 창백하고 하얀 얼굴, 아름다운 얼굴 아래로 비극적일 정도로 물든 붉은 피.
미동 하나도 없어서 자칫 잘못하면 쓰러진 게 아니라 숨이 멎었다고 착각할 수 있을 법한 모습이다.
신관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혼절한 에스텔의 상태를 살폈다.
“추기경님,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시몬 추기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공작 부인께서는 왜 눈을 뜨시지 않는 것이냐?”
“그, 그것은 저희도 잘…….”
“갑자기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기도 한데 자세한 정황을 모르니…….”
신관들의 시선이 마지막 순간까지 에스텔과 함께 있던 스텔라를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스텔라를 향했다.
스텔라는 하얗게 질린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눈가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바로 떨어질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세요? 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어요.”
사실 사람들은 특별히 스텔라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의문스러운 상황에 해명을 요구하는 평범한 눈빛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호감과 선망 외의 시선엔 익숙지 않은 스텔라는 그 시선이 적의처럼 느꼈다.
스텔라가 더 혼란스럽고 두려워할수록 아무 생각 없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의심으로 물들었다.
시몬 추기경이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텔라를 위로했다.
“성녀님, 진정하십시오. 모두 성녀님을 믿습니다. 어찌 성녀님께서 사람을 해하려 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정말인가요?”
“예. 하지만 블란쳇 공작 부인과 마지막까지 있었던 분이 성녀님이시기에, 그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황을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 공작 부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텔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가녀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떨었다. 시몬 추기경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성녀님?”
“블란쳇 공작 부인과는 평범한 대화를 하고 있었어요. 너무 평범한 대화라서…….”
“그런 이야기면 충분합니다. 성녀님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테니, 차분히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시몬 추기경의 다정한 질문에도 성녀는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전 그저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와 신전 입장에서 곤란하게 되었다고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또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다 공작 부인께서 갑자기 저를 밀어버리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그 뒤는 저도 잘-”
“저희 마님께서 성녀님을 밀었다고요?”
그 순간 성녀의 증언 사이로 날카로운 비웃음이 내리꽂혔다.
에스텔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왔던 에리히였다. 에리히는 에스텔을 살피고서 서슬 퍼런 눈으로 스텔라를 쏘아봤다.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그렇지만 사실인걸요.”
“지금 성녀님의 증언을 의심하는 건가?”
시몬 추기경이 에리히의 의심에 불쾌한 반응을 내비쳤다. 추기경은 성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이니만큼 귀족도 그와 척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블란쳇 공작가의 안주인이 성녀님과 단둘이 있는 사이 쓰러졌는데 의심도 하지 말란 겁니까? 성국에선 도대체 일을 어떤 식으로 하길래 질문 하나 제대로 못 하게 합니까?”
“질문을 하지 말란 게 아니라 성녀님을 향해 예의를 갖추라는 걸세.”
“성녀님께서 공작가의 안주인 시해범 죄명을 벗으시면 예의를 갖추겠습니다.”
“시해범?! 성녀님을 죄인으로 모는 건가?”
상상하지 못할 말에 시몬 추기경이 경악했다. 에스텔을 살피느라 몸을 숙이고 있던 에리히가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뭐 그러면 성녀는 죄를 저질러도 죄인이 안 된다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러면 공작가의 안주인이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가해자로 의심되는 성녀한테 말까지 가려가면서 예의를 지키라는 겁니까?”
에리히의 청회색 눈동자가 맹견처럼 살벌하게 번뜩였다.
순간적으로 기세에 눌린 시몬 추기경은 움찔했다 언성을 높였다.
“아직 성녀님께서 죄를 지었다고 밝혀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게 성녀님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행동이지!”
“그러는 추기경께서는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쓰러진 저희 마님 앞에서 감히 언성을 높입니까! 우리 마님께서는 연약해서 개소리에 민감하단 말입니다! 개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에리히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추기경에게 소리쳤고, 시몬 추기경은 너무 황당해서 바로 말하지도 못했다.
‘뭐, 뭐 이런 자가…….’
시몬 추기경은 인생에 이렇게 대놓고 무례한 자는 처음이었다. 그 순간 시몬 추기경은 상대가 블로뉴 남작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블란쳇 공작가의 미친개 블로뉴 남작.’
그는 블란쳇 공작이 가장 신뢰하는 가신 중 하나이자, 성질머리로는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더러운 광견으로 유명했다.
‘블란쳇 공작을 대신해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행동한다는.’
미친놈과는 상종하는 게 아니다. 시몬 추기경은 자기도 모르게 슬쩍 물러서며 헛기침했다.
“미, 미안하네. 하나 블란쳇 공작가에서도 성국의 입장을 배려했으면 해서 말한 것뿐이네.”
“이해했습니다.”
에리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성국 측에서 블란쳇 공작 부인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사건을 덮으려 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뭐, 뭐?”
“그게 아니면 성녀님께서 더 확실히 입장을 밝히든, 신전에서 범인을 찾아내시든 해야지요.”
그때 스텔라가 시몬 추기경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 하지만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는 지병이 있으시잖아요. 갑자기 지병이 도져서 그러신 것을 제가 어떻게 해요.”
설핏 듣기에 그 말은 타당했다. 에리히가 잠시 멈칫하자, 시몬 추기경 역시 힘을 얻고 소리쳤다.
“지금까지 신전의 책임이니 뭐니 하면서, 제 주인의 몸 상태도 확인하지 않았던 건가? 그러고 보니 블란쳇 공작 부인의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 성녀님의 도움을 받지 않았나?”
“…….”
“그러고도 어찌 바로 성녀님을 의심할 수 있어!”
주위에 귀족들이 점점 더 몰려들었다.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 누구도 바로 나서진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 원래 지병이 있었다고?”
“단순히 병약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신전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큰 병이었다고?”
그때 사람들 사이에 있던 영애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성녀님, 블란쳇 공작 부인의 병은 성녀님께서 다 치료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
스텔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쏟아지는 시선에 고민하던 영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저번에 블란쳇 공작 부인의 병을 신성력으로 완전히 치료했다고 들어서요. 그러면 지병이 다 낫지 않았던 건가요?”
시몬 추기경이 고개를 홱 돌려 스텔라를 바라봤다.
“……그건 말이죠.”
스텔라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쥐었다.
“아무래도 블란쳇 공작 부인의 병이 재발한 모양이에요.”
“신성력이면 다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신성력을 만능으로 알며 성녀를 추앙하던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성녀는 긴 속눈썹을 내리뜨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간혹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경우 병이 다시 생기고는 한답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성녀님께서 지금 블란쳇 공작 부인을 치료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전에 치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쓰러진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던 차였는데,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성녀는 천천히 에스텔의 앞으로 다가와 두 눈을 꼭 감았다. 하얀 신성력이 신성하게 성녀의 주위에 오오라처럼 피어올랐다.
경외심이 일어나게 되는 광경이다.
‘저것이 신성력?’
‘역시 성녀님은 다르군.’
다들 은연중에 감탄했다.
“아테아 신이시여, 블란쳇 공작 부인께 축복을 내려주세요.”
성녀는 애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성력이 에스텔의 몸 주위를 에워싸며 흡수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얌전히 감겨 있는 에스텔의 두 눈만을 바라봤다.
‘이제 의식을 되찾는 건가?’
‘이런 기적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에스텔은 눈을 뜨지 못했다.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언제 신성력이 드는 거지?’
‘성녀님께서 직접 신성력은 죽기 직전의 사람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지 않나?.’
깜빡깜빡, 사람들의 인내심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중에서 가장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몬 추기경이었다.
‘이미 일어나고도 한참 지났을 시간인데.’
성녀의 신성력은 효과가 바로 나타난다. 그래서 다들 성녀의 위대함에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성녀님의 신성력에 문제가 있을 리 없는데.’
그 순간 시몬 추기경의 마음속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설마 성녀님께서 진짜 블란쳇 공작 부인을 해쳐서 일부러 치료하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
그때 에리히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언제까지 신성력을 쏟으며 기도하고 있을 겁니까? 정말 저희 마님이 치료되시는 건 맞습니까?”
스텔라는 어깨를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왜 신성력이 듣지 않는 거지? 어째서?!’
***
나는 두 눈을 뜨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어디지?’
주위는 아주 컴컴했다. 그리고 돌이 가득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게 동굴 같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피를 토한 거지?’
나무들이 말해주길, 이제 다시 피 토할 일이 없을 거라 했다.
‘성녀가 나를 잡은 것과 관련된 건가?’
그렇다면 여기 이 장소도 뭔가 큰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주위를 더듬어가며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쨍그랑-
그때 바닥에 있던 잔 같은 걸 나도 모르게 건드려버렸다. 금잔이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이 왜 여기에 있지?’
그 순간 환한 빛 아래에 축 늘어져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금발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맹수처럼 선명한 금안이 커졌다.
“내가 또 꿈을 꾸는 건가?”
카를로스 황태자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길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 당황한 사이 카를로스 황태자가 광인처럼 달려와 나를 붙잡았다.
“내가 미쳐서 너를 보고 있다 해도 상관없어. 너를 보고 있으니 더 선명해졌다.”
금안에 이해할 수 없는 애절함이 가득했다.
“내가 잘못했다.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미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