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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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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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2022.11.11.
내가 다이아나 소식을 들은 건 베티를 통해서였다.
“……그러니까 다이아나가 카를로스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서 황궁 감옥에 가게 되었다고?”
“네. 다이아나 공주님께서 먼저 폭력을 쓰셨기 때문에 로이엄 왕국 측에서 할 말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다이아나 소식을 듣게 된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쩌면 좋지?’
특히 다이아나 공주와 관련해서 내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라 더 위험했다.
베티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트리샤 님께 말씀드려서 단호하게 그 이야기를 부정하고 관련 없다고 하셔야 해요.”
“그렇게 한다고 잠잠해질까?”
“어차피 이번 일에서 마님과의 연결 고리는 얼마 없어요. 마님께서 부정하시면 아무리 황태자가 나섰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거예요.”
왠지 나를 위해 계속 나서줬던 다이아나 공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베티가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마님, 마님의 마음은 이해해요. 아마 다이아나 공주님께서는 진심으로 마님을 위해,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고자 나선 것이겠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님은 더 큰 문제에 휩싸이게 되셨어요. 이럴 때는 나서지 않는 게 가장 좋아요.”
베티는 내 시녀답게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준다.
“……성녀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요?”
“네. 성녀가 두 사람의 다툼을 중재하고, 마님을 옹호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한데, 다들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리는 것 같더라고요.”
어쩐지 나는 계속 성녀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미르유 때도 이랬어.’
미르유와 성녀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한 순간, 미르유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었다.
‘어쩌면 다이아나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베티에게 말했다.
“내 입장에서 늘 생각해 줘서 고마워. 일단은 로이엄 국왕 대리님께 내 편지를 전해줘.”
다이아나 입장에서 정확히 어떤 식으로 상황이 진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베티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님께서는 다이아나 공주님을 구해주시려 할 줄 알았어요.”
“응?”
“제가 그 자리에 있던 귀족 영애와 아는 사이에요. 마님께서 상황을 파악하시기 쉽게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 볼게요.”
“그, 그래. 고마워.”
베티가 내게 인사를 올리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문 너머에는 장신의 미남이 서 있었다. 요한이 밖으로 나가는 베티를 보며 물었다.
“로이엄 왕국에 편지를 쓴 거야?”
“응. 요한도 다이아나에 대해서 들은 거 있어?”
“들은 거라면 제법 있지. 로이엄 왕국에서는 다이아나 공주를 구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던데.”
“……뭐?”
내가 아는 로이엄 왕국은 가족끼리의 유대가 굉장히 강한 곳이었다.
‘이사벨라 왕비님답지 않은 행동이야.’
하지만 요한의 입에서 나온 정보이니만큼 잘못된 정보는 아닐 거다. 나는 빛나는 요한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도대체 로이엄 국왕 대리님께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이아나 공주를 구하고 싶어?”
요한이 문에 등을 기댄 채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 올렸다.
“네가 구하고 싶다면, 내가 구해줄게.”
“어렵지 않겠어?”
“못 할 일은 아니지.”
솔직히 내 이름이 엮이기는 했어도, 나와의 연결 고리는 부족한 사건이다.
그런 만큼 블란쳇 공작 부인이 갑자기 끼어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반발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에스텔, 그 여자를 꼭 구해야 할까?”
“구하지 않으면?”
“애초에 네가 그 여자를 구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어. 물론 지금은 너와 친분이 있고, 너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인 것도 맞지. 하지만 이렇게 된 상황에서 무리해서까지 구할 가치는 없는 여자야.”
요한의 목소리는 악마처럼 달콤하고 그윽했다. 가만히 목소리를 듣고 있기만 해도, 취한 것처럼 기분이 몽롱해지는 목소리다.
“이번 일도 그래. 다이아나 공주가 경솔하게 행동해서 일이 커진 거지. 저번에 미르유의 편을 들어주려고 무작정 너를 공격하고 모욕했던 것처럼.”
“…….”
“앞으로 그렇게 구해주다가 또 피곤하고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겠어?”
“…….”
“다이아나 공주는 로이엄 왕국을 이을 사람도 아니고, 이제 기사 작위도 없어서 나중에 큰 쓸모가 있을 사람도 아니야. 다이아나 공주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왕국 대리가 너에게 앙심을 품을 리도 없고.”
마주친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왜인지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요한은 내가 다이아나를 외면했으면 좋겠어?”
“선택은 네 몫이야.”
요한이 코앞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는 요한에게선, 위압감이 느껴졌다.
“난 네 선택이 이뤄지도록 도와줄 뿐이지.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어?”
“나는…….”
***
이사벨라 왕비는 감옥에 갇힌 다이아나 공주를 찾았다.
다이아나 공주가 명백히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 데다, 신분도 있었기 때문에 감옥은 귀빈실만큼 호화스러웠다.
하지만 감옥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딸의 모습은 이사벨라 왕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참 잘했구나. 헤센에 이어서 이제 너까지 이 어미의 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구나.”
다이아나 공주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저를 파문하세요.”
“진정으로 그리 말하는 것이냐?”
이사벨라 왕비가 속이 탄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되면 너는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다. 제국이 신분 낮은 자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죄송해요, 어머니.”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귀족 영애들을 만나고 왔다. 그리고 이번 일의 전말을 대충 듣고 왔다. 블란쳇 공작 부인 때문이라지만, 어찌 그리 어리석은 일을 벌였느냐.”
그제야 다이아나 공주가 고개를 들어 이사벨라 왕비를 바라봤다.
“어머니, 설마-”
“내가 움직이지 않았어도, 하루 만에 소문이 쫙 퍼졌다. 네가 무도하게 굴도록 사주한 것이 블란쳇 공작 부인이라고.”
“블란쳇 공작 부인과는 아무 관련 없어요. 애초에 관련도 없는 일이잖아요.”
“블란쳇 공작 부인 얘기로 벌어진 일인데 왜 관련이 없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독단……!”
이사벨라 왕비가 다이아나 공주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블란쳇 공작 부인이 알아서 잘 처리했을 거다.”
“……그래도 저는 제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아요.”
“너희는 정말 이 어미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냐. 네가 이 어미에게 끼어들지 말라 했으니 그래, 그렇게 하마. 다 네가 알아서 해라.”
다이아나 공주는 이사벨라 왕비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성녀와 황실의 힘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다이아나 공주가 지은 죄는 없다. 하지만 황태자는 성녀가 황실의 귀빈이라는 점을 이용해 황족의 안전 문제라며 그녀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제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그때 근위병이 들어와 다이아나를 외진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선 방금 전 봤던 성녀가 베일을 쓴 채 경건하게 앉아 있었다.
다이아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성녀가 왜 이곳에.”
“감옥에 갇혀 계시느라 많이 힘드셨지요?”
성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다이아나를 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너무하셨어요. 공주님을 갑자기 그리 감옥에 넣으시다니…….”
“그래서 성녀가 여기에 온 이유가 뭐죠?”
“다이아나 공주님을 구해드리고 싶어서요.”
성녀가 고결한 얼굴로 다이아나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레 다가온 성녀의 온기에 다이아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전 다이아나 공주님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공주님께서 감옥에 가신 일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성녀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래서 다이아나 공주님께서 아무런 피해도 없이 원래의 행복을 찾으시도록 돕고 싶어요.”
성녀의 태도는 다이아나가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다이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성녀님이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하지만 공주님을 꺼내드리는 데 장애물이 있어요. 황태자 전하의 명이라고 모두에게 알려진 상황이라 다이아나 공주님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꺼내드리면 전하의 체면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성녀와 마주 잡고 있는 다이아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성녀는 그런 다이아나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그러니 모두의 앞에서 블란쳇 공작 부인과의 연관성을 인정해 주세요.”
다이아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지금 나에게 블란쳇 공작 부인을 배신하라고 하는 건가요?”
“배신이라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성녀는 다이아나의 귓가에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흘렸다.
“생각해 보세요,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블란쳇 공작 부인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신 거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블란쳇 공작 부인이 공주님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말도 안 돼요.”
“하지만 그것 외에 공주님을 구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어요.”
상냥하게 웃고 있던 성녀가 처음으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블란쳇 공작 부인을 끌어들어 봐야, 공작 부인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어요. 조금 귀찮은 일이 생길 뿐이죠. 그래도 어차피 블란쳇 공작께서 공작 부인을 구해주실 거예요. 그렇다면 공주님 본인의 안위를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똑똑.
“성녀님, 오르테카 재상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 일에 대해 성녀님께 여쭤볼 게 있다고 하십니다.”
“네, 지금 나갈게요.”
성녀는 우아하게 자리에 일어서며, 다이아나에게 다시 한번 속삭이듯 말했다.
“잘 생각해 봐요. 이건 배신 같은 게 아니니까.”
***
스텔라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상님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 나와주실 줄 몰랐어요. 시종을 시켜도 되는 일인데…….”
“아닙니다. 성녀님을 보살피는 게 제 일 아닙니까?”
오르테카 재상은 스텔라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앞으로 이 제국의 어머니가 되실지도 모르는 분이시고요.”
“어머나, 너무 과분한 칭찬이세요.”
스텔라가 두 볼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저처럼 유약한 여인에게 그런 자리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면 어떤 자리가 어울린다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세상 모두에게 주어진 자리가 있듯이 제게도 그런 자리가 있겠지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황실처럼 너무 거대한 책임에서 벗어나 소박하게 부군과 함께 가문을 돌보는 삶을 꾸리고 싶어요.”
오르테카 재상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그러실 수 있겠지요. 안에서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스텔라는 오르테카 재상의 극진한 예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슬슬 내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
“황제 폐하, 스텔라 성녀님께서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라.”
성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알현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 바로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옥좌에 앉은 황제, 그리고 그 옆으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보였다.
소박한 흰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자신과 비교될 정도로 화려한 차림의 에스텔이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성녀님.”
“블란쳇 공작 부인?”
예상치 못한 에스텔의 등장에 성녀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에스텔은 스텔라의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고 황제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제국의 황제로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네.”
성녀는 제법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
‘황제가 부른 게…… 저 가짜가 날 불러서였어?’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성녀는 순진한 얼굴로 에스텔에게 물었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 저를 찾으셨다고요? 도대체 무슨 연유로…….”
“아, 항간에서 떠도는 소문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아아, 지금 벌어지는 일이라면, 미안해요. 모두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진실을 믿어줄 거예요.”
성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에스텔을 자극했다. 에스텔의 순한 눈매가 붉어지며 물기가 살짝 어렸다.
“어떻게 그래요.”
하지만 에스텔의 입에서 나온 건 성녀가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성녀님께서 저를 질투해서 또 이번 일을 꾸몄다는 소문인데요.”
“……뭐라고요?”
“역시 못 들으셨군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도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그러니까요!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에스텔과 성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에스텔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누가 냈을까요?”
물론 그 소문을 낸 건 에스텔이었다.
‘소문은 너만 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사람들은 에스텔을 미워하는 것만큼이나 갑자기 나타난 성녀에게 관심이 무척 많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