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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요정의 선물 (101/182)


101화 요정의 선물
2022.11.18.



 
루이지의 어머니, 백작 부인은 티 파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루이지가 성녀님과 잘 얘기하고 있겠지?’

블란쳇 공작가에서 백작가를 고소했다. 솔직히 고소하는 것 자체는 백작가에 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만큼 백작가는 부유했고, 제법 괜찮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집안의 명예가 떨어지겠지.’

황금 가지 계보도에 올라가 있는 가문인 만큼, 최대한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막고 싶었다.


‘성녀님께서 루이지를 도와주신다면, 블란쳇 공작도 더 나서지 못할 거야.’

그때 펠시스 후작 부인이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오늘따라 티 파티에 집중하지 못하시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별일 아니에요.”

제 입으로 루이지의 사고를 얘기할 수 없었던 백작 부인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 제 몸이 좋지 않아 티 파티는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아요.”

주위에 있던 다른 귀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처음 봤을 때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였어요.”

“건강이 가장 중요해요. 몸을 보하는 약초라도 보내드릴까요?”

백작 부인을 위로하는 귀부인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성녀와 공작 부인의 황실 재판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황실 재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귀부인들이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백작저 내부로 무도하게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누가 예의 없이 발소리를 낸담?’

“어머니! 어머니!”

그 발소리의 주인은 백작의 외동딸 루이지였다. 귀부인들은 루이지를 보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백작 부부가 호사스럽게 길러 안하무인으로 소문났다지만.’

‘잘하면 황실 재판 관련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겠는걸?’

백작 부인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루이지! 손님들도 계신데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니.”

“어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해. 이 어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를 했…… 아니, 루이지. 너 울었니?”

막 루이지를 혼내려던 백작 부인이 놀란 눈으로 루이지의 두 뺨을 감쌌다.


“우리 아가, 오늘 성녀님을 뵈러 간 것 아니었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울면서 돌아온 거니?”

“전 정말 너무 억울해요.”

루이지는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울컥했다.


“전 성녀님을 위해서 나섰을 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성녀님이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성녀님께서 너한테 뭐라고 하셨는데 그래. 침착하게 말해봐.”

백작 부인이 울먹거리는 루이지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루이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히끅거렸다.


“처음 성녀님께서는 저를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제 억울함을 알아주시며 재판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은 최대한 주신다고도 하셨고요.”

“그래, 잘됐네. 네가 울 일이 어딨어.”

“그런데 성녀님께서 증언해 주실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뭐?”

루이지가 급하게 성녀를 찾아간 이유는 블란쳇 공작의 고소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루이지는 다이아나 공주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교계의 여러 장소에서 블란쳇 공작 부인에 대한 말을 옮기고 다녔다. 물론 루이지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이지는 사실만을 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란쳇 공작은 루이지가 악의적으로 에스텔에 대한 거짓을 퍼뜨렸다고 고소했다.

그리고 루이지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선, 공신력도 있으면서 관련자인 성녀의 증언이 가장 필요했다.


‘성녀님이 증언만 해준다면, 재판이 아예 열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물론 황실 재판에 피의자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다른 재판에 얽매이는 게 고민되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루이지는 성녀에게 서운했다. 그리고 블란쳇 공작의 고소가 두렵기도 했다.


“저 이제 어떻게 해요? 블란쳇 공작이 공작 부인의 명예 하나만으로 끝낼 리 없어요.”

백작 부인이 침착하게 딸을 다독였다.


“……성녀님께서 따로 말을 전하지는 않으셨니?”

“제가 결백하다면 처벌을 받을 일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셨어요. 제 진실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기도도 해준다고…….”

“기도? 하!”

백작 부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헛기침했다.


“무슨 도움이든 다 준다고 했으면서, 고작 그런 식으로 말을 끌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던 백작 부인이 그제야 뒤에 있던 다른 귀부인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죄송해요. 이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어머, 당연하지요.”

“일 잘 해결되기를 바랄게요.”

귀부인들은 아무 이야기도 못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백작저를 나오던 한 귀부인이 은근히 한마디를 흘렸다.


“루이지 영애에게 마음이 쓰이네요. 루이지 영애가 성녀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러게나 말이에요. 루이지 영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녀에게 정말 실망이 클 것 같아요.”

“솔직히 성녀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은 행동투성이예요. 어쩌면 블란쳇 공작 부인에게 열등감을 품었다는 그 소문이 진짜일지도요.”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던 귀부인들이 가문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중 한 귀부인이 마차에 올라타 먼저 탄 선객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블란쳇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렇게 인사할 것 없다.”

요한은 다리 꼬고 앉은 채 귀부인에게 물었다.


“백작가의 분위기는 어떻던가?”

“공작님의 계획이 완전히 적중한 상태입니다. 성녀와 루이지 영애가 완전히 갈라선 것 같더군요.”

애초부터 요한이 노리던 것은 에스텔을 모욕한 백작가를 향한 고소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약하지.’

감히 제 부인의 명예를 깎아낸 대가인데, 고작 고소 정도로 끝낼 순 없다. 특히 아무 관련 없는 것처럼 넘어갈 성녀도 가만 놔둘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귀부인들의 반응도 좋았습니다. 다들 성녀의 실체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면 성국에서도 함부로 여론을 뒤집을 수 없을 겁니다.”

“이미 그런 식으로 했다가 미르유 일도 놓치지 않았나.”

“그건…….”

귀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요한은 귀부인을 보며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자책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미르유에 대한 여론이 그런 식으로 갑자기 변할 줄 몰랐으니까.”

과거 요한은 미르유의 결혼식에서 폭로된 상황을 빌미로, 성녀를 완전히 바닥까지 끌어내리려고 했다.

솔직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당사자였던 미르유의 입에서 성녀가 치료했다는 상처 자체가 가짜였다고 밝혀진 상황이었다.

성녀의 치료 행위 자체가 사기라고 사람들에게 트집 잡히며 쫓겨나기 딱 좋았는데.


‘성녀가 불쌍하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지.’

성녀가 미르유의 임신에 대해 거짓말을 했던 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성녀가 미르유에게 속았다고 좋게 생각해 줬다.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평범한 미르유에게 성녀가 속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나?’

물론 갑자기 핵심 인물이었던 미르유가 사망했던 것도 있지만, 수상할 정도로 여론은 성녀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갔다.


‘어떤 힘을 사용하기라도 하듯이.’

요한이 귀부인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도 성녀의 행적에 대해서 예의주시해. 어떤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고.”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귀부인이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 성녀가 초대했던 귀족 영애 중 한 사람이 이상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상한 말?”

“예. 스텔라 성녀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신전 바깥에 나온 적이 없다고 했는데, 세피로트 해안가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한 살기에 잠겼다.


“세피로트 해안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세피로트 해안가는 귀족들이 자주 놀러 가는 섬이다. 폐쇄적인 성국은 세피로트 해안에서 거리가 멀었다.


“그것참 재밌는데.”

불현듯 요한은 스텔라 성녀가 지나가듯 흘렸던 말을 떠올렸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지만, 저 역시 귀족가의 레이디였어요.’


‘이것은 나를 속이기 위한 함정인가?’

 

***

황실 재판으로 정신이 없어서 혼자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요한이 마침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러면 지금 시작할게요.”

나는 태피스트리에서 [이시도르]라고 적힌 부분을 다시 한번 뜯었다.

투둑, 태피스트리가 뜯겨 나갔지만 이전처럼 뭔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무님, 이거 한 번만 되는 거였던-”

그때 내 손에서 묘한 기운이 꿀렁거리며 느껴졌다.


‘이게 요정의 힘인가?’

어쩐지 싱그럽고도 미풍처럼 살랑살랑한 기운이 찢어진 태피스트리를 둘러쌌다.

잠시 눈앞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저 너머로 아주 크고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나무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나무 아래에는 한 남자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윤기 나는 백금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남자였다. 고상한 사냥꾼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저 남자, 요정이야.’

그때 왜 검은 넝쿨이 나를 보자마자 요정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외모가 인간보다 아름다워서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요정은 요정만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촤르륵-

바람이 불며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졌다. 내가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남자는 남색의 눈동자였다.


 


“요정?”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살아 있는 요정을 만난 건 처음이라서 왠지 어색하고 긴장됐다.


“저는 에스텔이에요.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요?”

“내 이름은 이시도르다.”

“이시도르요?”

그 검은 넝쿨에 봉인되었던 요정 남자의 이름도 이시도르였다.


‘요정한테 이시도르라는 이름이 엄청 흔한 이름 같은 게 아니라면…….’

내 표정을 본 이시도르가 긴 백금발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너는 바깥에 있는 나를 만난 모양이군.”

“아, 네. 정확히는 검은 넝쿨로 변해 있던 당신을 만났어요. 분명 당신은 소멸했었는데…….”

그러자 이시도르의 남색 눈동자에 슬픔이 어렸다.


“내가 소멸했나? 잘 소멸했던가?”

“아, 그건.”

“반응을 보니 말끔하게 잘 죽은 모양이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더러운 상태로 생명을 유지하느니, 죽는 것을 바랄 테니까.”

이시도르는 한결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여기 제 앞에 있는 당신은 무엇인가요?”

“나는 마지막에 혹시나 생존해 있을 요정을 위해 남겨둔 기록이다. 세상에 요정이 남아 있지 않으니, 살아남을 방법이 마땅치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이시도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마지막 요정의 후손이 어떤 아인지 한번 볼까. 손 좀 줘보겠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은 이시도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게 뭐지?”

“왜, 왜요? 많이 심각해요?”

“너, 혹시…….”

이시도르의 남색 눈동자가 심각했다.


“키스한 적 있나?”

내 두 볼이 시뻘게졌다.


“그, 그건 갑자기 왜요!”

“도대체 어떤 놈팡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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