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초야 (127/182)


127화 초야
2023.02.17.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에 가득 찼다. 나는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요한이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는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몰라 걱정되었다. 나는 진정성 있는 말을 듣고 싶었기에 그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게 조바심 나는 시간이 이어졌다.


“……에스텔.”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쩐지 방금 전까지 내려앉았던 요한의 얼굴 위 그림자가 한층 더 진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네게 그런 고민이 있는 줄 몰랐어.”

요한이 마주 잡고 있는 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엄지로 가볍게 문질렀다.


‘이 반지가 언제 생겼지?’

“이 반지는…….”

“네가 잠든 사이 끼웠어. 부인 눈색으로 반지로 맞췄는데, 마음에 들어?”

내 눈동자처럼 반짝반짝한 사파이어 반지였다.


“예쁘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목소리네?”

“아. 요한의 눈동자 색으로 된 반지를 가지고 싶어서.”

그러자 요한이 반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 루비로 하나 더 맞추면 되지.”

“이미 다른 반지도 있는데? 그래도 반지라는 의미가 있는데…….”

“열 손가락에 다 채워줄 때까지 선물할 거니까 앞으로는 원하는 거 있으면 모두 얘기해.”

휘황찬란한 보석 반지를 한가득 끼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피시식 웃음이 샜다.


“알았어. 앞으로 어떤 반지를 더 받고 싶은지 생각해 둬야겠네. 열 손가락 다 채우려면.”

“그렇지. 열 손가락 넘겨서 얘기해도 상관없어.”

“그러면 어디에 반지를 껴?”

“음, 그러면 인형 손가락에라도 끼울까?”

“인형?”

갑자기 나온 인형 얘기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요한은 근처 탁자에 넣어두었던 인형 두 개를 꺼내주었다.

화실에서 봤던 신혼부부 인형이었다.


“이 두 인형, 기억나?”

“응. 네가 선물해 준 인형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인형은 왜 선물해 준 거야?”

나는 요한을 닮은 남자 인형을 가지고 가 검은 머리카락 부분을 부드럽게 쓸었다.

요한을 닮아 눈매가 삐죽한데 인형이 되니까 귀여운 포인트가 된 게 신기했다. 그래서 난 요한 인형의 볼을 꾹꾹 눌렀다.

요한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인형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걸로 할 걸 그랬나.”

“아니.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아. 이렇게 인형 선물을 받으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고아원에 있을 때 인형은 과도한 사치였고, 리베르탄에선 인형 선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간혹 선물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었다. 운 좋은 입양아인 내가 가지고 놀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인형 선물 받은 거 처음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요한을 바라봤다.


‘이미 요한은 내가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요한에게 최대한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자.’

“그래서 너무 기뻐. 요한이 해준 선물이고, 나를 신경 써준 거니까.”

어찌 보면 유치하다고 볼 수 있는 인형이었지만, 오히려 내 어린 시절을 보상받는 듯한 충족감도 들었다.

요한이 남자 인형 옆에 여자 인형을 대어주었다.


“두 개 다 가져가. 혼자 떨어져 있으니 안 어울리잖아.”

“그런가?”

“그럼. 이 두 인형은 한 세트인걸.”

솔직히 말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두 인형이 동시에 있으니 더 앙증맞고 귀여운 건 사실이었다.

동화 속 행복한 연인 같았다.

어쩐지 요한과 나란히 기대어 앉아 우리를 닮은 인형을 보고 있으니, 요한과 내 미래 역시 행복할 것 같은 막연한 상상마저 들었다.


“그래서 부인의 부탁에 대답해 줄게.”

요한이 반지에 입술을 맞췄다.


“나도 부인한테 거짓말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솔직해질게.”

“…….”

“맹세해.”

행복해질 것 같았던 상상이 곧 현실이 되었다. 두 볼이 상기되고,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고마워.”

“고맙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요한이 진지하게 받아주고, 동의까지 해주자 방금 내 말이 어리광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당연한 건 아니지.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걸.”

나는 기쁨에 배시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얼굴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두 인형을 부딪쳐 뽀뽀하게 해줬다.

요한이 픽 웃으며 내 머리 쪽에 턱 부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건 지금 나랑 뽀뽀하고 싶다는 뜻?”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 하기 싫어?”

간질거리는 목소리에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요한은 바로 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난 뽀뽀하고 싶다고 신호를 준 거면 좋겠는데.”

“진짜?”

“진짜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목말라 있는데.”

마주친 요한의 붉은 눈동자가 진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드는 눈빛이다.


“넌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몰라.”

“…….”

“네가 막 쓰러졌다가 일어난 것만 아니면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고.”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말이었지만, 솜털이 바짝 섰다.


“그, 그러면 내가 좀 더 괜찮아지면?”

“큰일이 나겠지.”

요한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난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거니까.”

“그, 그렇구나.”

“어차피 우린 영원히 함께하기로 했잖아. 무서워할 게 뭐가 있겠어.”

요한은 내가 학대당한 것을 안다.


‘하지만 내 흉터를 보고도 괜찮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베티도 내 흉터를 보고 놀랐잖아. 첩자 출신인 베티가 보기에도 흉측하단 뜻일 거고…….’

요한이 그런 흉터에 익숙할 건 알지만, 그걸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날밤에 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 몸을 보고 불쾌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나는 슬그머니 요한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러면 뭘 봐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요한이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를 보고 너무 절제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건가?”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나는 두 인형을 옆에 놓고 요한의 손을 꼭 쥐었다.


“나도, 이제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 요한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

그 순간 요한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목덜미에 콧등을 비비던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미치겠네.”

“뭐, 뭐를?”

“지금 확 덮쳐버리고 싶어서.”

요한은 고개를 들고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내 이마와 볼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참을게. 부인이 기껏 허락해 준 마음을 멍청한 짓으로 깎아 먹으면 안 되잖아.”

요한이 침대에 날 다시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푹 쉬어. 이러다 정말 덮쳐버리겠다.”

요한은 날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날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부인을 해치려던 원흉 있잖아.”

“아, 그 괴물.”

나는 이불에서 고개를 쏙 빼내어 요한에게 대답했다.


“그 괴물은 갑자기 왜?”

“그 괴물이 부인을 습격한 이유가 리안드로 펠시스 때문이었어.”

“리안드로 펠시스……?”

“아마 너를 차지하기 위해서 흑마법에 손댄 모양이야. 내 앞에서 흑마법을 쓰다니, 그놈도 참 학습 능력이 없어.”

내가 잠든 사이 언제 또 이렇게 범인까지 찾아내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리안드로가 어떻게 흑마법을 사용하게 된 거야? 원래 흑마법과 관련되어 있었나?”

“그게 중요하지.”

요한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내가 봐도 속이 시커메 보이는 무서운 미소였다.


“이제부터 그놈이 어떻게 그런 수작에 손댔고, 부인에게 어떤 흑마법을 썼는지에 다 캐내서 처리해야지.”

“…….”

“괜한 걱정을 하고 있을까 봐 미리 얘기해 놓는 거야.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고, 리베르탄 처리할 때 엮어서 한꺼번에 끝장날 거야.”

그렇게 요한은 방을 나갔다.


‘요한이 이렇게 계획을 말해준 적이 있던가?’

아무래도 서로 더 솔직해지기로 한 것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헤헤 웃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하지?’

 

***



“허억-”

리안드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커멓게 물들었던 눈앞이 점차 밝아졌다.


‘이것이 흑마법의 부작용인가?’

온몸이 불쾌한 진흙탕에 처박힌 기분이다.


‘요한 블란쳇 공작은 잘만 사용하던 흑마법인데…….’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마법을 사용하던 요한을 떠올리자, 내면 깊은 곳을 가득 채우던 열등감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해도 그 남자만 못하단 건가?’

여태껏 리안드로는 어떤 대단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본인과 비교해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교해야 할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엔 리안드로는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요한과는 계속 비교하게 된다.


‘이미 블란쳇 공작이 앞서서 그녀를…….’


‘난 당신 도움 필요 없어요.’

앞서서 달린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제 앞에 요한 블란쳇 공작이 먼저 도착해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부정한 수법으로 차지해 버렸다.


‘완벽한 기사면 되는 줄 알았다.’

평생 명예로운 길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펠시스 후작가의 이름을 짊어지고 가는 기대주.

기사도를 인간으로 빚은 듯한 완벽하게 명예로운 훌륭한 기사.

분명 모두가 바라는 인생을 살고 있는데, 정작 에스텔은 완벽한 기사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무슨 희생이든 치를 수 있는 자신보다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결혼한 악한을 사랑했다.


-흑마법은 네 마음속 어둠을 끝없이 마주하게 하지. 인간의 정신이 마모되는 것도 그래서야.


-완벽한 기사인 넌 과연 얼마나 네 어둠을 견딜 수 있을까?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준 마물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리안드로는 거친 숨을 들이켜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에스텔. 당신이 원하는 그런 악한은 저도 언제든 될 수 있습니다.”

리안드로의 어둠은 에스텔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에스텔이 경멸 어린 얼굴로 리안드로를 질책했다.


‘날 그리 악녀라 부르더니, 결국 진짜 악이 누구였죠. 그러고도 내게 속죄 타령을 했나요, 양심도 없이?’

그는 에스텔의 얼굴을 마주 볼 수조차 없는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죄인ㄴ이기도 했다.


‘그 잘난 가문의 실체를 알게 되니 어때요? 나한테는 속죄하라 타령하더니 정작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네요. 그토록 명예롭던 기사님은 어디 가셨는지.’

조롱받는 와중에도 자신만을 봐주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그리워 계속 그 어둠을 붙잡았다.

자긍심이었던 가문의 명예가 부정당하고, 진심이 외면당해도 에스텔 그 여자를 원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어둠은 에스텔이 아닌 지독한 리안드로 자신의 얼굴로 변했다.


‘속죄하게 해주겠다는 것도 다 변명이었지.’


‘그건 다 그녀를 만나기 위한 구실이었어. 그녀의 곁에 계속 남아있기 위한 근거에 불과했어.’


‘넌 사실 그 여자가 가지고 싶은 거잖아.’

결국 리안드로는 어둠 속에서 제 진심을 발견했다.


“당신은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맨발로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걷자, 두 발이 검게 물들었다. 다행히 리안드로의 손은 부작용이 많이 사라져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하필 당신을 구해준 그 자리에, 그 남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리안드로는 어둡게 잠긴 얼굴로 웅덩이를 내려다봤다. 웅덩이 사이로 칙칙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얼굴이 깨진 것처럼 비쳤다.


“그러니 제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중에는 다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리안드로는 제 얼굴을 무시하고 웅덩이에 잠겨 있던 펠시스 가문의 문장을 꺼냈다. 흑마법에 사용한 문장은 타락해 버린 스스로를 상징하듯 붉게 금이 가 있었다.


‘이번 시도가 실패했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흑마법을 사용하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그래서 잃을 것이 두려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저보다 더 당신에게 진심인 남자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

벌써 합방날이 되었다.

그날 아침부터 헨리 씨와 얘기도 다 마쳤다.


“이제 건강에 아무 이상도 없다.”

그리고 요한은 그런 나한테 신호를 주듯 푸른 장미로 된 꽃다발을 우리의 침실에 장식하며 쪽지를 보냈다.

[오늘 밤이 싫으면 얘기해.]

하지만 나는 싫지 않았으므로, 에리히를 통해 장미를 기쁘게 받아주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기분이었다.

똑똑.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많이 기다렸어?”

은은한 달빛이 남자의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부스러졌다. 요한은 가운만 입은 차림으로 나를 보며 잔웃음을 흘렸다.

잘생긴 요한을 보자마자 심장이 다시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 곁에 다가온 요한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와인과 와인잔 두 개가 보였다.


“분위기 내려고 가져와 봤어.”

눈앞에서 와인을 흔들어 보인 그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부인은 안 돼. 필요하면 혼자 마시고.”

“왜?”

“그러다 또 누굴 곤란하게 만들려고.”

요한이 장난스럽게 내 볼을 꼬집었다.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진한 갈증이 느껴졌다.


“대신에 부인은 초콜릿을 먹어. 달아서 긴장이 풀어질 거야.”

요한이 준비한 초콜릿을 꺼냈다. 평소처럼 먹여줄 줄 알고 기다렸다. 하지만 요한은 내 입에 넣어주는 대신 제 입에 초콜릿을 넣고 내 입에 키스해 초콜릿을 넣어주었다.

달달한 초콜릿이 천천히 녹아든다.

요한은 몽롱해진 나를 보며 눈가를 달콤하게 휘었다.


“달콤하지?”

요한은 천천히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묻었다. 손등을 타고 손목, 팔 부근 위로 천천히 올라온 그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부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 날 느끼기만 하면 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