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속이 안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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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속이 안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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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속이 안 좋네
2023.03.14.
황제의 금안은 일말의 동요 없이 싸늘했다.
“호오.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펠시스 후작은 황제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버지를 몰아내고 황좌를 차지한 황제는 제 반대편에 선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 겨우 상황을 해결한다 해도.’
황제의 칼날에 휩쓸리게 될 터다.
하지만 훗날도 결국 살아남아야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제가 어찌 폐하께 반기를 들 수 있겠습니까.”
펠시스 후작은 최대한 영리하게 머리를 굴리며 스스로를 낮췄다.
“다만 제가 계속 충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폐하께서 도움을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수틀리면 짐을 협박하기라도 할 기세던데?”
“물론 펠시스 후작가가 쥔 것이 적지는 않습니다. 펠시스 후작가는 선황부터 기사단장으로 황제 폐하의 앞날을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지요. 저희를 귀히 여기신다면 앞으로도-”
“터뜨리게.”
황제는 비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어차피 후작이 쥔 증거라 봐야 선황의 부덕 정도겠지. 짐은 그대를 그리 귀히 쓴 적이 없어 무엇이 있을지 도리어 궁금하군.”
실제로 황제는 펠시스 후작가보다는 오르테카 재상을 통해 더러운 일을 많이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후작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가 쇠창살을 꽉 쥐고 말했다.
“폐하, 황실 전체의 명예에 금이 간다 해도 상관없으시겠습니까?”
“그건 좀 상관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황실의 권위가 무너진다면 폐하의 권위에도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합니다.”
“하나 누가 그대의 말을 믿어주겠는가?”
황제가 쇠창살 너머로 후작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증거가 나와도 적당히 말을 바꿔놓으면 그만이야. 부덕한 펠시스 후작가가 황실까지 모함하려 한다. 황실의 이름마저 더럽히려 하는 추악한 펠시스 후작가의 실체.”
“…….”
“후작도 잘 알지 않나. 어차피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닐세. 물론 억울할 일도 없지. 후작이 블란쳇 공작가처럼 없는 죄로 누명을 쓴 건 아니지 않나?”
황제는 손에 힘을 주어 후작의 머리를 터뜨릴 듯 죄었다. 머리가 눌리는 상황에도 목에 힘을 주던 후작이 쇠창살을 붙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 모가지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많이 억울한가 보군.”
“펠시스 후작가를 따르는 귀족들도 제법 남아 있습니다. 탄원서에 모두 서명까지 마쳤습니다. 폐하께 쓸모가 있을 겁니다.”
“아아, 그 탄원서.”
황제는 황실에 끌려온 순간부터 후작이 아등바등 모아온 그 이름을 낱낱이 떠올리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소식 못 들었나. 그 탄원서의 귀족들 대부분이 반역죄의 공범으로 잡혀갔다.”
“그 무슨……!”
“블란쳇 공작이 솜씨가 참 좋아. 오르테카도 잘하긴 하지만 확실히 블란쳇 공작만큼 뒤처리가 깔끔하고 빠르진 못하지.”
펠시스 후작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리안드로 놈은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아비로서 그가 부탁한 건 고작 성녀에게 뒤집어씌우도록 도와달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리안드로는 그마저도 실패했다.
“더 말할 것도 없군.”
황제가 할 말을 잃은 후작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한때 선황의 충신이었으니 한 가지는 말해주지. 명심하게, 발악할수록 후작은 더 비참해질 걸세.”
“폐하!”
“후작, 그렇게 짐의 심기를 더 거스르면 큰일 나지 않겠나.”
황제는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손을 털며 옥사를 떠났다.
“펠시스 후작님.”
황제가 막 사라진 자리,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충신인 오르테카 재상이었다.
“재상, 역시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신-”
“그럴 리 있겠습니까.”
오르테카 재상은 후작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전 후작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 할 뿐입니다.”
“……제안?”
“예. 이렇다 할 싸움 없이 재판장에 끌려가 도축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천하의 펠시스 후작가가 말입니다.”
펠시스 후작의 푸른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좋은 수라도 있나?”
“해결책이라기보단.”
오르테카 재상이 후작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검은색 돌이었다. 돌은 후작의 손에 닿자마자 먼지가 되어 파스스 사라졌다.
“후작의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겁니다.”
검은 돌에서 번진 기운이 후작의 손바닥을 타고 점점 퍼졌다.
또렷하게 눈을 뜨고 있던 후작이 피곤한 듯 눈을 끔뻑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눈을 다 감은 후작의 눈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펠시스 후작님.”
후작이 매우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었으니까.
“……예스텔라 리베르탄.”
“후작님을 돕고 싶은 마음에 찾아오게 되었어요.”
“성국에서도 버려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가?”
예스텔라가 적개심 어린 후작의 눈동자에도 생긋 웃었다.
“그거야 알 수 없지요.”
예스텔라의 푸른 눈동자가 반달처럼 휘었다. 쇄골에 박힌 검은 백합 낙인이 비수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중요한 건 저희 둘의 목적이 같다는 것 아니겠어요?”
후작이 홀린 듯 검은 백합 낙인을 바라봤다. 검은 백합이 막 튀어나올 것처럼 꽃잎을 꿈틀 움직였다.
***
똑똑.
“마님, 점심 드실 때 되셨어요.”
“요한은?”
“주인님께서는 바깥일로 바빠 아직 들어오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저녁 식사 시간에는 맞춰 오실 거예요.”
요한은 펠시스 후작가와 예스텔라를 완전히 묻어버리겠다고 다짐한 이후 매우 바빠졌다.
‘아니, 그동안이 오히려 억지로 한가한 척했던 걸지도.’
원래 블란쳇 공작은 할 일이 많았다.
나도 페트리샤를 비롯해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안주인으로서 할 일이 정말 많기는 했다.
‘그나마 저녁 시간에 맞춰주는 것 자체가 최대한 나를 배려한 거겠지.’
“오늘 식사 메뉴는 뭐야?”
“신선한 해산물이 들어와서 가리비 관자 요리가 나올 예정이에요. 그리고-”
베티가 신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오늘 요리사가 새로운 특제 디저트를 준비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특제 디저트?”
“네. 몇 달간 준비하는 걸 봤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힌트를 드리자면 초콜릿을 활용한 디저트예요.”
요한이 신신당부해서인지 요리사는 매번 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엄청 연습한다고 했다.
‘그런 거 안 해도 잘 먹는데.’
이제 쓰러지지도 않는데 너무 과보호다.
“그런데 베티가 요리사 몰래 이렇게 힌트 줘도 돼?”
“뭐, 어때요. 전 마님 편인데요.”
“흐음, 그래서 에리히한테 보낸 팔찌를 네가 빼돌렸구나.”
베티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마님, 그건 에리히한테 간다니까 아까워서 그런 거예요!”
“진짜야?”
“그럼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에리히한테 마님의 선물을 주는 건 너무 아까워요. 잘해줄 필요 없는 인간이라니까요.”
이 팔찌 얘기는 요정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확인해 보면서 알게 된 거다.
‘혹시 몰라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 훑어보면서 확인했지.’
그 결과 베티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던 비밀이 그거였다. 내가 에리히한테 전해주라고 했던 선물을 안 주고 빼돌렸던 것.
‘에리히 그놈한테 마님의 정성은 과분해. 에리히가 마님이 리베르탄의 딸이라면서 얼마나 괴롭혔는데.’
솔직히 너무 사소한 문제라서 정말 이게 베티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문제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확했다.
‘죄, 죄송합니다. 마님. 마님에게 반기를 들어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거나 횡령을 할 마음 같은 건 아니었어요.’
‘어쩐지 에리히가 팔찌를 하는 걸 못 봤다 싶었어.’
‘제게 벌을 내려주세요, 마님. 대신 제발 마님의 전속 자리에서 버리지는 말아주세요.’
나름 베티에게는 큰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베티 말고 다른 사람도 확인해 봐야겠어.’
그래서 근처의 다른 사용인들에 이어 페트리샤, 에리히까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확인해 봤다.
‘……내가 이 상황에서 다이아나 공주의 고백을 받아도 되는 건가. 아직 주인님과 마님의 문제도 다 해결하지 못했는데-’
‘언젠가 주인님과 마님 사이에 태어날 아기님을 위해 뜨개질 양말 연습을 꼭 성공해야지. 아기님이 태어나시기 전까지 가장 완벽한 시녀장처럼 보이도록 성공해야 해.’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다이아나와 에리히의 애정 전선과 페트리샤의 취미 개발까지 알아버렸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은근히 떠본 결과 그 사람이 생각하는 가장 큰 비밀을 보는 것이 맞았다.
‘……요한이 날 죽이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하구나.’
그래도 그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요한의 비밀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베티가 주방장의 자신작을 가지고 왔다.
“여기 가리비 관자 요리예요. 저번에 마님께서 한 번 더 드셨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번에 또 만들어봤대요.”
나는 기본적으로 고기 요리를 좋아하지만, 블란쳇 공작가에서 온갖 요리를 먹어보면서 내가 해산물 요리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맛있겠다. 잘 먹을게.”
먹음직스럽게 익은 가리비를 소스에 찍어 한 입 먹으려고 했을 때였다. 입 근처에 딱 들어가려고 했던 가리비에서 상한 듯한 느낌이 났다.
‘왜 이렇게 역하지.’
가리비를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역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먹으려던 가리비를 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음식 냄새를 이미 맡고 나니 메스꺼움이 더 커졌다.
음식이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평소와 달리 음식을 먹지 않고 물만 여러 차례 마시자, 베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 입맛이 좀 없네.”
“그래요? 다른 건 몰라도 가리비 요리는 나올 때마다 항상 좋아하셨는데. 제가 대신 한번 맛볼까요?”
베티는 갸우뚱하며 가리비를 입에 넣었다.
“흐음, 저번이랑 비슷한데.”
베티가 가리비를 먹는 걸 보니 입에서 침이 나오며 먹고 싶어졌다.
“이제 보니 또 먹어도 될 것 같아.”
“아, 그런가요?”
하지만 막상 먹으려고 입 가까이에 대고 나니 해산물 비린내가 너무 크게 느껴져 속이 역했다. 나는 한 입 정도 먹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 해산물이 몸에 받지 않는 것 같아.”
가끔 나는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잘 먹던 음식도 먹지 못할 때가 있었다. 베티가 그런 나를 심각하게 걱정해 줬다.
“그래도 아예 굶으시는 건 몸에 안 좋은데, 디저트만이라도 드셔보시겠어요?”
결국 난 주방장이 열심히 준비했다는 디저트를 먹지 못했다.
***
[부인은 죽은 괴물을 보고 슬픔에 주저앉았습니다. 괴물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아래로 내려가 그의 죽음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왜, 어째서, 왜 내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이런 선택을…….”]
[부인이 슬퍼하며 처참하게 죽은 괴물의 눈가 위에 입을 맞췄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그는 알 수 없었습니다.]
[“왜 나한테 아무 기회도 주지 않은 거예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전까지의 여자들과 달리 부인은 그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괴물의 죄를 알고도 감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어떻게 하라고요.”]
[부인의 배 안에 괴물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새로운 희망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요.]
***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져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동화책 <아름다운 괴물>이 보여 다시 한번 펼쳐봤다.
다시 봐도 참 슬픈 결말이다.
‘그러면 이 부인과 아이는 어떻게 된 걸까?’
아름다운 괴물이 주인공인 동화답게 동화는 그 뒤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나머지는 내가 추측해야 할 뿐이다.
‘괜히 이 책을 보고 있으니 마음만 심란해지네.’
요한은 무슨 생각으로 이 동화책을 사다 준 것인지 모르겠다. 부인이 괴물의 비밀을 들춰내 자살을 하게 만들었듯, 그의 비밀을 캐내지 말라고?
“부인, 쉬고 있어?”
그때 요한이 정장 차림으로 방에 들어왔다. 나는 읽던 동화책을 덮고 요한을 반겼다.
“일은 잘하고 왔어?”
“부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잘하지 못했어.”
“거짓말, 어차피 잘하고 왔을 거면서.”
“진짜야. 내가 부인 생각을 얼마나 하는지 알고 나면 놀라서 도망칠걸?”
요한은 익숙하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내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물었다.
“오늘 속이 안 좋아서 점심을 안 먹었다면서.”
“응. 약속했던 대로 조금 더 먹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음식이 잘 안 들어가네.”
“저녁은 먹을 수 있겠어?”
“…….”
“먹고 싶은 건 없어?”
가만히 생각하던 내가 말했다.
“……있기는 한데.”
“뭔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구해다 줄 텐데 뭘 망설이는데.”
“그게 좀 이상한 음식이야.”
“어떤 이상한 음식이든 다 구해다 줄 테니까 말만 해.”
나는 요한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리베르탄 공작가에 갇혀서 몰래 훔쳐먹던 딱딱한 빵이 먹고 싶어.”
“……?”
“그 특유의 고소한 느낌이 그리워. 구해다 줄 수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