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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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미끼
2023.03.28.
요한의 질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그 빵을 처음 먹었을 때라.’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기억이 잘 나진 않았다.
나는 요한을 한번 보고서 감자 수프를 한입 먹었다. 따듯하고 끈적한 수프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따듯하네.”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감자 수프를 떠먹었다.
‘맛있어.’
어떤 맛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왠지 요한의 요리를 먹고 있으니, 마음속 공허했던 부분에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다.
나는 말없이 감자 수프를 떠먹고, 요한이 준비해 준 파스타도 먹어보고, 마지막으로 대망의 빵까지 맛봤다.
‘다 맛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빵의 맛이 입안 가득 채웠다. 박혀 있는 견과류와 어우러져 고소하고 담백했다.
천천히 빵을 씹었다. 목이 멜 것 같은 기분인데, 잘 만들어진 빵은 억지로 오래 씹을 필요도 없이 부드럽게 사라졌다.
턱을 괸 채 건너편에서 나를 보고 있던 요한이 물었다.
“내가 주고 싶었던 빵이 어때?”
“……비슷해.”
전혀 다른 빵이다.
“있잖아, 요한. 그 빵을 먹었던 날 말이야.”
그런데 빵을 먹는 순간, 내가 먹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것임을 알게 됐다.
‘생각해 보면, 왜 크게 기억나지 않았는지 알겠어.’
그날이 크게 특별할 것 없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리베르탄 공작 부부는 나를 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굶긴 채 벽장에 가뒀다.
“그날 난 너무 배가 고팠어. 그래서 그대로 굶고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아주 운 좋게 벽장문이 열리고 말았어.”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이었다.
“처음에는 멋대로 나온 게 걸려서 혼날까 봐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갔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벽장 밖으로 뛰쳐나왔어.”
음식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한참 길을 잃었을 무렵, 겨우 사용인들이 쓰는 주방을 발견했다.
“그리고 난 주방에서 사람들이 먹다가 남긴 빵 쪼가리들을 발견했어.”
“그 빵이 부인이 찾았던 빵이야?”
“응. 빵 쪼가리를 얼른 입에 넣었어. 너무 딱딱했는데 입에 계속 넣고 있으니 달달하고 고소했어.”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너무 맛있어서 울었어.”
나는 주방에서 얼른 나와 벽장에 숨어 빵 쪼가리를 아껴 먹었다.
“그렇게 갇혀 있는 게 무서웠던 벽장이었는데, 빵이 있다고 진짜 안심됐어.”
벽장에서 풀려날 때까지는 아무도 나를 살피러 오지 않았다. 무서운 벽장 감옥이 빵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가 된 것이다.
“나중에 밖으로 나가서 다른 걸 먹다 보니, 그 빵에 대해서도 잊게 됐어. 사실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잖아.”
“…….”
“그때, 그 빵 진짜 맛있었는데.”
“에스텔.”
“이 빵도 진짜 맛있다.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였나 봐.”
그 빵은 나한테 무슨 의미였을까.
텁텁해서 목이 막히는 느낌마저도 맛있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이제 와서 그 빵이 먹고 싶었던 이유가 뭘까.
“고마워. 요한.”
뺨 아래로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평소라면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내가 먹고 싶었던 건 이런 거였나 봐.”
눈물을 훔치고 씩씩하게 요한이 차려준 요리를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요리인데도 속이 든든하고 따듯해졌다.
“이상하게 또 불안했나 봐. 요한처럼 좋은 남편이 있는데.”
“원래 임신 초기엔 그럴 수 있대.”
“딱히 임신 초기라서 내가 이런 것 같지는 않은데.”
오랜만에 음식을 전부 비웠음에도 속이 멀쩡했다. 배 속의 아기에게 나도 모르게 물었다.
‘너도 아빠 요리가 마음에 드니?’
이상하지만 이 아기가 벌써 내 마음을 알고 이 빵을 찾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요한은 어쩌다 나한테 요리해 줄 생각을 했어?”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가 임신하셨을 때, 직접 요리해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어.”
“요한이랑 똑같네.”
“그리고 어제 너를 보고, 네게 진짜 필요한 것,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지.”
붉은 눈동자가 나와 마주치자마자 달콤하게 휘어졌다.
“네가 블란쳇 숲의 나무와 어떤 사이였는지 잘 몰랐어. 하지만 네가 슬플 정도로 외로워 보였어.”
가슴이 뭉클했다.
“다른 건 몰라도 외로움 하나만큼은 나도 잘 알거든.”
“미안해.”
“뭐가.”
“그냥, 요한한테는 늘 미안해.”
요한이 그런 내 사과에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좁혔다.
“또 그런다.”
“이번은 그냥 들어줘.”
이건 내 반성이니까.
‘괜히 마물의 말에 고민했던 내가 부끄러워져.’
그런 말에 휘둘리고 상처 입는 것도 다 요한에 대한 내 사랑이 부족해서인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계속 흔들리면 안 되잖아.’
마물과 예스텔라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내가 가장 듣기 싫은 저주를 퍼부었다.
‘다 너 때문이다. 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는 건, 요정인 네가 살아 있어서다.’
‘당신이 모든 걸 망쳤어요. 당신 때문에 요한도 불행해지고 말 거예요.’
생각해 보면 예스텔라 말은 처음부터 다 틀렸다. 나도 모르게 계속 들으니까 영향을 받았다. 애초에 악질적인 소리를 무시했어야 했다.
‘어떻게 그를 행복하게 해줄 건데요, 그에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줄 수도 없는 게.’
‘말 그대로예요. 가짜인 당신이 요한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임신을 했다는 것 자체가 예스텔라의 소리가 다 엉터리라는 방증이다.
나는 나를 아껴주는 사람 말만 들을 거야.
“요한은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어떻게 요한처럼 대단한 사람을 남편으로 둘 수 있었을까.”
“내가 좀 잘나긴 했지.”
“요한이 나보다 더 평범하고 좋은 아내가 네 곁에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그건 그냥 들어줄 수 없는데.”
요한이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내가 좋은 남편일 수 있었던 건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이 내 부인이었다면 이러지 못했겠지. 그러니 그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이 안 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에스텔. 내 말 못 믿어?”
“아니, 믿어.”
나는 식탁에 올려진 그의 손등에 내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어떤 힘든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요한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요한은 그런 나를 보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충분한데?”
“요한은 나한테 기대하는 게 너무 적어.”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울던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요한이 나한테 그래 줬던 것처럼, 내가 얼마나 더 대단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줄게.”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쩐지 배 속의 아기가 동조하듯 맥박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
저녁쯤 귀환하자, 베티가 나를 반겼다.
“주인님과 데이트는 잘하셨어요?”
“응, 아주 감동적이었어.”
“이번에 주인님께서 한 준비가 아주 잘 맞았네요. 마님의 표정이 아주 좋아 보이세요.”
나는 내 두 뺨을 만지며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나?”
“네. 두 분 사이가 매번 더 좋아지시는 것 같아 보기 좋아요. 배 속의 아기님도 무척 기뻐하고 계실 거예요.”
배 속의 아기 얘기에 왠지 부끄러워져 하다 말고 갔던 일 얘기를 다시 꺼냈다.
“큼큼, 아무튼 지금 내가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을까?”
“마님께서 미리 처리해 두셔서 크게 할 일은 없어요. 그러고 보니 마님의 재단에 귀족들의 기부금이 막대하게 쏟아지고 있다고 해요.”
“어쩌다가?”
“아무래도 가짜 성녀한테 속았다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 피해자였던 마님의 재단에 기부하여 명예를 회복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것 외에도 마님을 응원한다는 의미에서 기부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고요.”
새삼 내 처지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실감 났다.
‘갑자기 돌변한 태도는 우습지만.’
“그래도 나를 따라 많이 기부한다니 좋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는 중요한 기회일 테니까.”
“아직도 기부금이 들어오는 중이라 나중에 다 정리되고 나서 활용처를 정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재단에서 알아서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뭘 그리 잘 안다고.”
“네?”
베티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님께서 이론적인 부분은 잘 모르실지 몰라도 다른 부분은 얼마나 뛰어나신대요.”
“그렇게 안 띄워줘도 돼. 부끄럽잖아.”
“띄워드리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에요. 여름에 마님께서 정리한 블란쳇 공작령 지원책 때문에 다들 얼마나 놀라고 있는데요.”
내가 블란쳇 공작령에 새로 세운 지원책은 별게 아니었다.
제국은 하층민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편이라, 고아뿐만 아니라 고아가 더 나오지 않도록 다른 사회적 빈곤 계층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도입했다.
“그치만 내가 크게 한 게 없는걸. 거기다 복지 정책이라 돈만 써서 원망이 자자할 줄 알았는데.”
“때마침 이번 가을에 흉년이 드는 바람에 마님께서 복지를 위해 미리 비축해 두신 재정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고, 매년 늘어나던 유행병 환자들도 많이 줄었거든요.”
“그, 그건 운이 좀 좋았네.”
“마님은 좋은 공작 부인이세요. 마님 정도 되시는 분이면 자긍심을 가지셔도 되지 않을까요?”
늘 생각하지만 베티는 날 너무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계속 칭찬 듣는 건 부끄러워!’
나는 수긍하는 척 가신들의 편지를 뜯었다.
[뒤늦게 인사를 올리는 무례를 저질러 사죄드립니다. 저는 그동안 부끄럽게도 블란쳇 공작 부인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 덕분에 이번 흉년으로부터 저희 영지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그 고귀한 혜안에 감사드립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 감사하는 의미를 담아 부족하지만 몇 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조만간 도착할 터이니 부디 공작 부인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불만 사항이 가득할 거라 여겼던 편지는 사죄와 감사, 칭송만이 가득했다.
“……다들 왜 이러지?”
“어떤 놈이 개소리를 했어요?”
베티가 눈을 부릅뜨며 편지를 살피다, 내용을 보고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한 말밖에 없는데요.”
“그런다고 이렇게 우르르 감사 편지를 보내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님께서 좋은 공작 부인이시니까 그런 거죠.”
나는 이제 대화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 블란쳇 나무들에게 물었다.
‘제가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는 걸까요?’
고맙기는 하지만, 왠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아 이 상황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 베티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어떤 부탁인가요?”
“저번 화실에 부부 인형 선물하는 거 도와준 게 베티라고 요한한테 들었거든.”
“예, 제가 제법 큰 도움을 드렸지요.”
“매번 요한한테 받기만 한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나도 요한에게 이벤트를 해주고 싶어.”
이벤트라는 이야기에 베티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벤트! 어떤 이벤트를 해주고 싶으신데요, 정해두신 날짜는 있으세요?”
“아직 정해진 건 없긴 한데.”
가만히 고민하던 내가 두 볼을 붉혔다.
“우리 결혼식 때 요한이 감동할 수 있게 선물을 주고 싶어.”
“아이참, 그런 건 제 전문이죠! 맡겨만 주세요! 두 분의 사이가 더 뜨거워질 수 있게, 이 한 몸을 불사 질러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
그날 이후 에스텔의 입덧도 잠잠해졌다.
여전히 전에 좋아하던 스테이크나 해산물을 먹지는 못하지만, 가벼운 가정식 요리는 잘 먹게 되었다.
특히 요한이 해주는 요리는 귀신같이 알아보며 잘 먹었기에, 요한은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에스텔을 위해 미리 요리를 준비해 놓고는 했다.
‘나 이제 다른 요리도 먹을 수 있는 것 같아.’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너한테 요리를 계속 해주겠어.’
주치의 헨리도 에스텔의 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워낙 몸이 약하셔서 걱정했는데, 식사를 꾸준히만 해주신다면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요한은 에스텔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면서도 약속했던 대로 에스텔의 복수를 완벽하게 준비했다.
리베르탄과 펠시스의 처형.
에스텔에게 지었던 죄를 모두 토로한 채 최악의 명예로 모든 대가를 치르는 것.
최소 이 두 가지는 이루어져야 했다.
삼 개월 동안, 펠시스 후작가에 대한 함정을 파고 몰아가며 이 복수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주인님, 펠시스 후작가의 끄나풀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끌려가기 전 남겨둔 것들이겠지?”
“예. 특정한 장소에 흑마법과 관련된 무언가를 묻어두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에리히의 보고에 요한이 무표정하게 웃었다.
“또 흑마법이라.”
역시 그 쓰레기 같은 성국은 아테아 신이 아니라 흑마법과 관련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성국에 간자를 들여보내는 건 어떻게 됐지?”
“워낙 방비가 철저해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래, 쉬우면 재미없지.”
현재 요한은 활용할 수 있는 패가 제법 많았다. 최소한 그들이 노리는 것이 에스텔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부터 그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타깃을 들킨 순간, 대비하기 쉬우니까.’
물론 감히 에스텔을 건드린 죄는 철저하게 보복할 예정이다.
“우리는 재판을 위해 미끼를 던진다.”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던 요한이 입가를 비스듬히 올렸다. 어둠 속에 가려진 붉은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그렇게 신을 들먹이며 고결한 척하던 성국을 이 싸움 위로 끌어들인다.”
***
첫눈이 내리는 겨울, 드디어 펠시스 후작가와 리베르탄 공작가의 죄를 판단하는 재판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