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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진범 (140/182)


140화 진범
2023.04.04.



 
쿵! 쿵!

간수가 감옥 문을 두드렸다.


“위에서 내려온 거다. 마셔.”

데미안은 근래 본 것 중 가장 깨끗한 물을 받아 들었다.


“이 물을 주는 이유가 뭐요?”

“재판에서 허튼수작 말고 똑바로 증언하란 의미로 주는 거다.”

마침 목이 탔던 데미안이 물을 마시고, 옆에 쓰러진 로자리아에게도 한 모금 주었다. 냉수를 마신 로자리아가 희미하게 정신을 차렸다.


“……여보, 방금 그거 꿈이 아니지?”

데미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짜 온 거야.”

“그렇구나.”

로자리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텅 빈 문을 바라봤다. 방금 전 그들을 찾아왔던 딸, 예스텔라의 환영을 보기라도 하듯이.

데미안 역시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사랑해요, 엄마, 아빠!’

 
예스텔라는 이미 사라진 뒤였지만, 그에게도 예스텔라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아빠 덕분에 제가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어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전 어떻게 이 시련을 이겨나갔을지…….’

 
기쁨에 차오른 환한 미소, 안도가 가득한 목소리.

예스텔라는 데미안이 영혼을 바쳐 그리워했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 얼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큰 결심 해주셨다는 거 알아요. 저, 부모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꼭 행복하게 살게요.’

 
로자리아는 순순히 승낙한 데미안과 달리 예스텔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엄마,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엄마가 돕지 않으면 제가 죽어요. 제가 죽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예스텔라의 물기 어린 호소에도 꿋꿋하던 로자리아도, 딸의 비수 같은 비난에는 더 버티지 못했다.


‘솔직히 이건 다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가 그 가짜를 잘 처리하기만 했어도 제가 이 고생을 할 일은 없어요. 아니! 엄마가 지은 죄만 아니었더라면 제가 고생할 이유 자체가 없었겠죠!’


‘스텔라!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애초에 엄마가 날 멀쩡하게만 낳았다면, 내가 힘든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그러게 왜 날 불치병으로 낳았어요?’


‘아가. 그건 엄마도…….’


‘그래 놓고서 날 제대로 치료해 주지도 않고, 보살펴주지도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젠 어차피 죽을 목숨도 날 위해 써주지 못한다고요? 그러고도 당신이 내 엄마예요?’

 
로자리아는 흐느끼며 예스텔라가 주는 낙인을 받아들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궁지에 몰려서 말이 험하게 나왔어요. 진심이 아닌 건 아시지요?’

 
그렇게 예스텔라는 효녀처럼 두 사람을 위로해 주다 떠났다.


‘부모님의 원수는 제가 꼭 갚겠어요. 그러니 남은 일은 모두 제게 맡기세요.’

 
예스텔라는 두 사람에게 생명력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에스텔에게 예스텔라를 위한 저주를 걸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허억……!”

가만히 숨을 쉬던 로자리아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손톱을 세워 푸른 핏줄이 선 제 목을 마구 긁던 로자리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시작된 건가.’

데미안은 씁쓸한 모습으로 로자리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윽고 데미안에게도 로자리아와 마찬가지로 끔찍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에스텔, 그 애도 이런 아픔을 느꼈겠지?’

아득한 고통 속에서 저주를 위해 들었던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해야 해.’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물론 대놓고 상처를 내는 건, 이 지하실에서만 해야 한다.’

 
지하실이 아닌 곳에서 큰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아이가 가진 모종의 힘이 발휘되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끝없이 그 애를 몰아붙여. 어차피 제물로 소모되면서 계속 고통스러울 테니 어렵지 않은 일일 테지.’

 
데미안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손가락을 물었다. 그래도 고통은 지워지지 않고 더 심해져만 갔다.


‘그 애는, 어떻게 이 고통을 견딘 거지?’

그동안 그 애가 멀쩡하게 버티길래 별것 아니라 여겼건만. 그는 이 잠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이봐! 너희들 왜 그래! 정신 차려!”

“윗분들에게 연락을 넣을게! 리베르탄 공작 부부가 이상증세를 보이면 보고하라고 하셨어!”

 

***



“다들 무엇하는가!”

황제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저 정신 나간 것을 어서 끌어내! 더 재판에서 볼 것도 없다. 감옥에 가둬 제 판결을 듣게 하라!”

예스텔라가 급히 오르테카 재상을 찾았다.


‘설마 나를 또 배신한 거야?’

오르테카 재상은 황제의 근처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지금 상황에 몹시 놀란 눈치였다.


“폐하, 진정하시지요.”

“재상. 저 만행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물론 저 역시 죄인의 태도는 단죄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죄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굳이?”

황제는 예스텔라의 이야기를 들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재상의 조언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좋다, 예스텔라 리베르탄. 어디 하던 이야기를 제대로 해보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기사들이 억눌렀던 두 팔을 놓아주자, 예스텔라는 뒤늦게 아픔이 올라오는 것처럼 입가를 떨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제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으리란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

“예. 그토록 강한 흑마법은 흔적은 남기게 마련이니까요.”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마음대로 조작해 놓고서 또 공작 부인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게 아닌가?”

“만약, 제게 흑마법을 건 것이 공작 부인이 맞다면, 바로 반응이 나타날 겁니다.”

예스텔라의 푸른 눈동자가 확신으로 빛났다.


“…….”

“폐하, 한번 조사해 보시지요.”

오르테카 재상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마지막 재판입니다. 피해자인 공작 부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증언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황제가 턱을 쓰다듬으며 오르테카 재상을 바라보았다.


“하나 재상.”

“예, 폐하.”

“왜 짐은 자꾸 그대가 저 성녀 사칭범이자 반역도인 여자를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모르겠군.”

오르테카 재상이 부드럽게 웃었다.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 그런 오해를 사고서도, 폐하께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올바른 대처를 하기를 바랍니다. 블란쳇 공작 부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오르테카 재상의 시선이 가만히 앉아 있는 에스텔을 향했다. 좌중의 눈도 자연스럽게 에스텔에게 따라붙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떳떳하시니, 응당 허락해 주시겠지요?”

 

 

***

나는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마님께서는 저 악한에게 입은 피해를 증언하기 위해 재판에 오신 것뿐이에요!”

베티가 확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갑자기 저희 마님을 끌어들이려 하시는 거죠?”

“끌어들어다니요, 오해입니다.”

오르테카 재상의 느긋한 대처에, 유독 조용했던 펠시스 후작이 나섰다.


“폐하, 저 역시 간청드립니다.”

“죄인인 펠시스 후작이 뭘 간청하겠단 거지?”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실 때 한 점의 오류도 없길 바라 간청드리는 것뿐입니다.”

황제를 바라보는 펠시스 후작의 표정은 충신이 따로 없었다.


‘아, 이게 예스텔라가 판 함정인가?’

어느새 제 편을 등에 업은 예스텔라의 눈동자에 의기양양함이 차올랐다.


‘요한은 이것까지 계산했을까?’

하지만 아직 요한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황제가 고심하는 것처럼 이맛살을 구겼다. 잠시 후 황제는 깊은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들었다.


“사안이 워낙 크고 중대하여 죄인의 증언이라 하여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 같다. 기사를 동원해 조사해라. 그리고 죄인은 시간을 끌지 말고 서둘러 그 증거라는 것을 고하라.”

“예, 폐하.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지하 근처에-”

그 순간.


“……크읍. 큿, 크르릅!”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던 펠시스 후작이 게거품을 물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저, 저게 뭐예요!”

“지금 펠시스 후작이 뭘 하려는……!”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뚜두둑,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후작의 몸이 검게 물들어갔다.

베티가 내 손을 잡았다.


“마님.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저거, 흑마법이야.”

“예?”

“흑마법이, 펠시스 후작의 몸에서 점점 팽창하고 있어.”

방금 전 흐트러지기만 했던 예스텔라의 흑마력. 그 마력이 펠시스 후작의 몸에 응집되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후작의 얼굴에 검은색 혈관이 투둑 돋아났다.


“꺄아아악!”

“괴물이야! 괴물! 도망쳐야 돼!”

재판장에 있던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후작의 변화에 기겁했다. 도망치기 위해 움직이는 자도 있었다.


“무,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뭐라고? 그러면 갇혔단 소리야?”

황좌에 앉은 황제가 고함을 쳤다.


“-조용!”

황제의 고성에 사람들이 잠잠해졌다.


“기사들, 펠시스 후작을 처리해라.”

“예, 폐하!”

기사들은 검을 들어 펠시스 후작에게 다가갔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변화하던 펠시스 후작은 갑자기 튀어 올라 기사들을 공격했다.

크와아악!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캉!

괴물이 검게 변한 손을 휘두를 때마다 기사들이 검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님.”

베티가 나를 자신의 뒤에 숨기며 말했다.


“저 기사들로는 괴물을 막지 못할 거예요.”

“그렇게 보이지?”

“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님께서는 제 뒤에 계세요. 제가 어떻게든 마님을 지켜드리겠어요.”

나는 배를 감싸며 예스텔라를 바라봤다.


‘어라?’

솔직히 난 예스텔라가 일부러 펠시스 후작을 괴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당황하고 있지?’

예상외로 예스텔라는 진심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펠시스 후작을 두려워하며 도망칠 곳을 찾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펠시스 후작은 왜 저렇게 변한 거지?’

“쿠웨에엑!”

펠시스 후작이 침을 튀기며 난동을 부렸다. 후작이 근처에 있는 예스텔라를 향해 뛰었다. 예스텔라는 주위에 있는 기사의 뒤에 숨으며 외쳤다.


“기, 기사님, 살려주세요. 저 괴물이-”

하지만 괴물은 주위의 기사만 해치고, 예스텔라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저렇게 보면 예스텔라 편인 것 같은데.’

 

***

예스텔라는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나, 나를 해치지 않았어?’

괴물은 예스텔라가 아니라 주위의 기사들만 공격했다.


“괴물을 막아! 폐하를 해할지도 모른다!”

기사들은 필사의 각오로 괴물을 막으려 애썼다. 그 잔혹한 전장 속에서 홀로 무사한 예스텔라는 몹시 동떨어져 보였다.


‘왜 펠시스 후작이 괴물이 된 거지?’

예스텔라의 계획대로라면, 괴물이 되는 건 에스텔이었어야 했다.


‘왜 저 가짜가 무사하냐고!’

그 순간 사람들이 외쳤다.


“저 괴물이 저 여자만 공격하지 않는 걸 봐요! 흑마법으로 펠시스 후작을 바꾼 게 본인인 거잖아요!”

“그렇네, 그러니까 저 여자만 보호하는 거지!”

“저 여자가 괴물로 우리를 지금 다 해치려고 한 건가?”

상황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오르테카 재상님은 뭔가 아시려나, 오르테카 재상님이-’

“크륵?”

괴물이 갑자기 이성을 되찾은 듯 눈을 끔뻑이며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 괴물의 머리에 검을 푹! 박았다.


“여러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검에 찔린 괴물은 실 끊긴 인형처럼 철퍼덕 바닥에 엎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우아하게 말했다.


“이 괴물은 별거 아닙니다.”

요한이었다.


“요한 블란쳇 공작!”

“공작이 괴물을 처리해 줬어! 우린 다 무사해!”

요한이 사람들의 찬사를 들으며 우아하게 좌중을 돌아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괴물을 무찌른 용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전부, 요한이 꾸민 걸까?’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다 요한의 계획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펠시스 후작이 괴물로 변한 것까지?’

요한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황제가 손사래를 쳤다.


“인사할 것 없네. 그래서 공작, 방금 전까지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건가?”

“그것은 아마…….”

요한의 시선이 오르테카 재상을 향했다.


“오르테카 재상이 더 잘 알지 싶습니다.”

“재상이?”

“예.”

요한은 충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르테카 재상이 이 모든 일을 꾸민 진범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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