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아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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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아기 방
2023.04.25.
눈앞이 자꾸 흐릿해졌다.
의식을 잃고 온 정신이 컴컴해졌다가 뜨문뜨문 현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정신 차리세요! 마님!”
“의식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마님. 조금만 버티세요!”
어떻게든 나를 위해 노력하는 목소리.
‘……요한 목소리가 없네.’
그러다 결국 다시 의식을 잃었다. 깊고 검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어지러운 머리, 잘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 무겁게 눌리는 눈꺼풀, 가팔라지는 호흡.
먹먹한 귀에 이명처럼 째지는 소리가 꽂혔다.
-에스텔, 아가! 에스텔!
평소에 내가 듣던 나무들의 소리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들어본 적 있는데.’
멍한 정신으로 계속 떠올리다, 딱 한 번 들어봤던 소리를 겨우 기억해 냈다.
‘전에 마법진으로 이동할 때 들었던 목소리잖아.’
나를 지켜준다고 했던 목소리!
번쩍 눈이 떠졌다.
눈을 뜨고 나니,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던 물은 어디 가고, 나는 분홍색 꽃잎들과 함께 호수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하늘에서 꽃잎과 나뭇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풍경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네가 에스텔이니?
처음 듣는 나무 목소리가 들렸다. 호수 위에 둥실 떠 있던 내가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호수의 물이 움직여 나를 뭍으로 데려다주었다.
호숫가 주위에는 하늘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신기한 나무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인가요?”
-우리는 구름나무다.
-언제나 블란쳇 쪽 나무들한테 네 소식을 들어왔지. 이렇게 보게 될 줄 몰랐지만.
왜 구름나무인지 몰랐는데, 바람이 불자 그 의문이 풀렸다. 연하늘색 꽃잎이 바람에 날리니까 마치 작은 구름처럼 떠다녔던 것이다.
“나무님들이 저에 대해 뭐라고 말하셨는데요?”
-너무 귀엽고 착한 아이라고 했지.
-마지막 요정 아이인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매번 미안해했고.
“진짜 이상하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하늘색 꽃잎 뭉치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나무님들은 매번 제게 해주시기만 했는데, 마지막까지 미안해만 하셨다니.”
-마지막 요정인 네가 지고 있는 짐이 보통 짐이 아니었을 터이니 더 그랬을 거다.
-우리도 너만 보면 참 많이 아프고, 미안하다. 우리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너를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돕는 것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한계다. 미안하다.
-그래도 우리가 네 가장 행복한 미래만큼은 꼭 지켜주마.
구름나무들은 블란쳇 나무들과 달리 포근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건가요?”
-그건…….
구름나무들이 막 가지를 흔들며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숲 사이로 길쭉한 그림자가 졌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그 누군가가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룬?”
평소보다 더 자란 모습의 룬이었다. 키가 훌쩍 자라 이젠 소년으로 보였다.
하지만 순한 눈망울만큼은 여전했다.
룬이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울먹거리며 내게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미안해, 에스텔.”
“아니야, 룬. 그런데 여긴 내 꿈속인데 네가 어떻게…….”
문득 정령인 룬은 내 꿈을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울고 있는 룬을 다독이며 물었다.
“괜찮아. 룬. 네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울어.”
“그치만, 그치만…….”
룬이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훌쩍였다.
“룬은 정령인데도 에스텔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걸.”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안해, 룬은 아직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안 돼. 에스텔이랑 요한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품 안에 안긴 룬의 모습이 점점 자그맣게 느껴졌다. 나는 룬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룬이 최선을 다한 걸 알고 있으니까.”
“그치만 룬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는걸.”
“뭐 어때. 룬이 최선을 다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뻐.”
불현듯 요한이 이런 식으로 나를 위로해 줬다는 게 떠올랐다.
‘룬한테도 잘 통했으면 좋겠네.’
당시 나한테는 그게 제법 위로가 됐다.
“룬이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바뀌지 않는 일이 꽤 많았어.”
“…….”
“그때마다 너무 슬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
“여전히 속상해?”
“속상하긴 해. 대신 그때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상처 주지는 않아.”
룬이 쏙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룬을 마주 보며 예쁘게 웃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일단 무슨 일인지 나랑 얘기해 보자.”
“…….”
“같이 노력해 보면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룬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룬은 나에게 울었던 이유를 얘기해 주진 않았다.
“그래도 룬이 에스텔이랑 요한 아기는 최선을 다해서 지킬게.”
단지 굳은 다짐으로.
“사랑해.”
내게 속삭여줬다.
에스텔! 정신 차려, 에스텔!
숲 전체에 공허하게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와 함께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던 숲의 정경이 부서졌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현실에서 눈을 떴다.
***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여긴 어디지?’
주위에 익숙한 얼굴들이 앞다투어 나한테 말을 걸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좀 드세요?”
“아, 응. 괜찮아.”
갑자기 몸이 아팠던 것과는 달리 내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오히려 아주 상쾌했다.
‘왜 상쾌하지?’
최근 몸이 점점 무기력하게 늘어졌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
“…….”
헨리 씨와 베티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두 사람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상쾌했던 기분은 어디론가 가고 괜히 가슴 부근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베티가 헨리 씨를 힐끔 봤다.
“저, 그게요, 마님.”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그래요,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어요? 저번에 ‘잠자는 공주’도 다 나았다고 했잖아요. 그사이 또 심각한 병에 걸리기라도 했어요?”
내 질문에 두 사람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공기가 날카로웠다.
침묵이 두려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베티, 요한은 아직 안 돌아왔어? 내가 쓰러진 걸 알면 요한이 엄청 걱정했을 텐데.”
“…….”
“창밖이 아직 밝네. 내가 쓰러졌을 때도 그랬는데. 생각보다 오래 안 쓰러져 있었나 보다.”
“…….”
“왜 다들 아무 말이 없어. 그러니까 나 진짜 무섭잖아.”
베티는 아무렇지 않은 내 얼굴을 보다가 못 버티겠다는 듯 얼굴을 숙였다. 베티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마님.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경솔하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그러니까 뭘 잘못했다는 건데.”
나는 우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베티 대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헨리 씨를 바라봤다. 하지만 헨리 씨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죄송합니다, 마님.”
“헨리 씨도 왜 그래요.”
“주인님께서는 바깥에서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들어가시겠다는 걸, 제가 애써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
“이런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무척 유감입니다. 의사로서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머리가 징징 울렸다.
헨리 씨의 입술을 바라봤다. 헨리 씨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는데, 자꾸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뭐라고요, 안 들려요?”
“……마님. 흔히 귀족가에서 벌어지곤 하는 일입니다. 그러고도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여럿 봐왔고요.”
“그러니까 무슨…….”
귓가에서 이명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속이 뒤집힐 것 같다. 어지러운 것을 참기 위해 이불보를 꼭 쥐었다.
베티가 나를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
“--!”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겨우 심호흡하며 헨리 씨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상하다.’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이미 그 말을 들어버린 것처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제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계속 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중요해서 물어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선 것처럼 예민해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속이 아팠다.
“……이제 확인해 보니, 원래 달거리가 불규칙적이셨다지요.”
“……네.”
“아무래도 임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셨던 탓에 몸이 잠시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님의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돌려서 말하려는 배려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 배려가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아. 그러니까.”
“예, 마님.”
“저는 있지도 않은 아이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군요.”
헨리 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분명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입덧도 하고, 심장 소리도 들었던 것 같은데…….”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귀족가에서는 흔히 벌어지곤 하는 일입니다.”
“그게 다 제 망상이었다는 거잖아요.”
굳이 이렇게 말할 필요 없는데, 내 목소리에는 날이 한가득 서 있었다.
“……마님.”
헨리 씨는 무어라 말을 아꼈고, 베티는 울먹이면서 나를 위로해 주려 했다. 방 안에 가득한 다정한 공기가 나를 더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있던 아이가 사라진 게 아니고, 제가 있다고 착각했던 거라서.”
그들의 걱정과 달리,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참 잘 어울리네요. 이젠 하다 하다 아이까지도 지어내다니. 어쩐지 임신한 것치고 몸이 너무 멀쩡하다 했어요.”
“그렇게 자책하시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제대로 검진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괜히 임신한 척 유세는 다 부렸네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어지러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더 걱정해 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건데요, 뭐.”
“아닙니다. 실제 아이가 없었다 해도 무리를 했었기 때문에 그만큼 조심하시고, 정양하셔야 합니다.”
“…….”
“꼴에 할 건 다 하네요.”
“마님!”
“알았어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헨리 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밖에서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인님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실 겁니다.”
“그럴까요?”
“당연하지요. 지금 마님께서는 충격이 너무 크셔서 그러신 겁니다.”
솔직히 위로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똑똑.
그때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여왔다. 두드리는 소리만으로 난 누구인지 알아챘다.
“요한?”
“응, 부인.”
요한이 문밖에서 대답했다.
“내가 들어가도 될까?”
“편하게 들어와. 어차피 요한 집인데.”
“네가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하나도 안 불편해. 이 정도는 진짜 별거 아니야. 헨리 씨 말대로 나만 겪는 일도 아니고,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잖아.”
문이 열렸다. 요한은 나보다 더 심란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괜히 얼굴이 퀭하게 질린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다.
“왜 요한을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거 같지?”
“매번 볼 때마다 내 얼굴이 새롭게 좋아져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요한이 내 맞은편에 앉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고생 많았어, 부인.”
“고생이라니.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한 게 왜 아무것도 없어. 누구보다 힘든 일을 했는데.”
그 순간 고요했던 저택에 기묘한 소란이 울렸다. 다정하게 나를 보고 있던 요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조용히 시켰는데, 이것들이 말을 잘 안 듣네.”
베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다 주의를 주고 올게요.”
하지만 베티가 나가기 전, 페트리샤가 다급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페트리샤가 망설이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요한이 페트리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주인님. 잠시 주인님께 조용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내가 웬만한 일은 나중에 듣겠다고 했을 텐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나는 불쾌해하는 요한의 손을 잡으며 페트리샤에게 물었다.
“얼마나 중요하면 페트리샤가 그러겠어.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저, 그게. 마님이 계신 곳에서 말씀드리기엔 조금…….”
그때 창밖에서 정신없이 소리가 들렸다.
“룬 도련님! 도련님!”
“룬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페트리샤가 낭패라는 듯 얼굴을 구겼다.
“죄송합니다. 잠시 저택이 소란해진 사이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제 책임입니다. 분명 놀이방에서 놀고 계신 것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나서지.”
“나도 찾을게.”
요한이 고개를 저으며 나를 다시 눕혔다.
“부인은 쉬고 있어. 몸도 안 좋을 텐데.”
“아…….”
요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알았어. 나는 쉬고 있을게.”
***
하지만 나는 요한이 방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룬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꿈에서 룬을 봤던 게 신경 쓰여서였다.
‘내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헨리 씨가 쉬라고 했지만 억지를 부렸다.
딱히 쉬어야 할 정도로 몸이 나쁜 게 아니라 누워 있는 게 더 싫었다.
‘이상하게 참 차분해.’
큰 충격을 받아 마땅한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는데 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이상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데.’
나는 늘 나를 싫어했다. 그래서 이렇게 이상하고 짜증 나는 게 새삼스럽지도 않을 텐데, 새삼 어처구니없고 기분 나빴다.
그러던 내 발이 방 하나에 닿았다.
문이 꼭 닫힌 방이었다.
하지만 그 방문을 본 순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확 열었다.
끼이익-
아기자기한 모빌, 바닥에 꾸며진 귀여운 동물 인형, 잘 정돈된 아기 장난감, 구석에 쌓여 있는 아기 옷들.
아기 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