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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서로를 위한다는 이유 (161/182)


161화 서로를 위한다는 이유
2023.06.16.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흐릿했던 하늘에서 솜털 같은 눈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힐끔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요한에게 물었다.


“내 대답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니었어?”

“물어볼 거 있나?”

요한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잖아. 언제든 내 대답에 따라 네가 바꿀 수 있는 거고.”

“그렇게 불공정한 내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왜 내기에 응한 거야?”

“그거야 그 정도 조건이 아니면 네가 나한테 기회를 줄 리 없으니까.”

요한이 에스텔을 보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고민하긴 했는데,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정해져 있더라고. 정말 내가 널 사랑하는 게 맞았다면.”

“…….”

“그러니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에스텔이 요한의 손을 잡았다.


“요한.”

그 순간 요한은 바닥이 꺼지는 감각에 다리를 휘청거렸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다리 한쪽을 굽히게 됐다.

에스텔이 요한의 이마에 나기 시작한 식은땀을 드레스 소매로 닦아주며 물었다.


“괜찮아?”

“신경 쓸 거 없어.”

그가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왜 갑자기 마력 독이.’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그의 자존심이 뭉개지는 기분에, 요한이 자신을 부축해 주려는 에스텔을 확 끌어안았다.


“약한 모습 좀 보여주면 네 대답이 달라질까 해서 아픈 척 좀 해봤어.”

그는 에스텔이 제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 뒤 귓가에 대고 유쾌하게 속삭였다.


“그치만 역시 이런 건 적성에 안 맞네. 거짓말로 이 지경까지 와 놓고 또 거짓말하려고 하다니.”

“……요한, 그럴 필요 없어.”

“뭐가. 설마 지금 내 모습 때문에 조금 흔들렸어? 그러면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건가?”

요한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몸의 마력이 묘하게 뒤틀리는 와중에도 에스텔의 온기가 기껍게 느껴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 마력 독의 부작용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마력 독이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 많은 독이라지만, 이건 조금 이상했다.


‘아, 애초에 마력 독이 아니었으려나?’

에스텔의 말을 믿고 당연히 마력 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에스텔이 더 효과적인 다른 독을 준비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쿠우웅-

식장 안이 큰 진동에 휩싸였다.

감상에 젖어 있던 요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마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이건, 요한에게 무척 익숙한 기운이었다.


“……마기?”

문제는 이 마기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에스텔, 더 시간 끌면 안 되겠어.”

요한이 급하게 에스텔을 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여기로 마물이 올 거야.”

“정말?”

“그래. 근처에 저 마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빨리…….”

그러던 요한은 문득 말을 멈추고 에스텔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에스텔이 요한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 상황, 조금 익숙하지 않아?”

“……이미 알고 있었어?”

“전에 우리 둘이서 무도회 연습하고 있을 때. 그때도 갑자기 펠시스 공자가 습격했잖아.”

에스텔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참 세상이 신기해. 우리 둘이서 뭘 오붓하게 즐기게 놔두지를 않는다니까.”

새삼 요한은 에스텔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실감했다.


‘화재로 나를 못 막을 상황까지 예견해 마물을 준비한 건가?’

에스텔의 설계를 깨달을수록 더 감탄만 나왔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군.’

겨우 버티던 요한은 몸을 장악한 탈력감에 완전히 주저앉으며 아픈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호사네, 마지막으로 부인을 볼 수 있어서.”

쨍그랑- 쿠우웅!

식장 뒤쪽에서 마물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다가올 모양이다.


“어서 가. 그러다 진짜 도망치지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걱정 마. 아직 시간은 꽤 남았으니까.”

“그건 또 무슨…….”

우지끈-!

괴이한 형체를 갖춘 마물들이 식장 문을 부수고 나타났다. 조급해진 요한과 달리 에스텔은 무척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키에에엑!

그런데 뒤이어 이어지는 광경들은 요한이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당장 식장으로 들어와 그들을 습격할 줄 알았던 마물들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들어오려 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우리 결혼식이니까 최대한 둘만의 시간을 오래 가지고 싶었어. 이것도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에스텔은 제 손목에 차고 있던 마도구 팔찌를 풀었다.

그리고…… 요한의 팔목에 채워주었다.


“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요한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이젠 내 생각이 좀 궁금해?”

에스텔과 요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남색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심해처럼 어둠을 머금고 있다 생각했던 그녀의 남색 눈동자.

처음으로 요한은 그 눈동자가 고요한 바다가 아니라 불꽃 같다고 생각했다. 신비롭게 모든 것을 살라 먹는 푸른빛의 불꽃.


“그러게 처음부터 내 대답을 들었어야지. 요한은 그게 문제라니까.”

“……그러게, 내가 또 잘못했나.”

“이제 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가만 보면 요한도 참 허술해. 사람 마음을 잘 몰라주고.”

에스텔이 요한을 보며 달콤하게 웃어줬다. 목소리에서는 그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이 느껴졌다.


‘어째서지?’

그를 가지고 놀다가 버리기 위해서란 것치고, 연극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요한의 심장이 쿵쾅 뛰기 시작했다.

팔찌를 다 채운 에스텔이 요한을 제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요한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에스텔. 나를 사랑해?”

“응.”

에스텔이 요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그러면.”

“맞아, 요한이 이겼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다.


‘그러면 도대체 왜?’

지금까지 에스텔이 해왔던 모든 일이 더 의문스럽게 느껴졌다.


“요한이 많이 미웠어. 다시 얼굴 보기도 싫고, 너무 원망스럽고, 화도 났어. 요한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없겠더라고. 그런데…….”

에스텔은 조그마한 손으로 요한의 두 눈을 가렸다.


“그래도, 나는 요한이 좋았어.”

“…….”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요한은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인걸. 처음으로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내 가족이 되어주었는데.”

“…….”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에스텔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었다. 요한은 에스텔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힘이 다 빠진 사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입술만 움직여 그녀에게 물을 수 있었다.


“정말, 그게 정말이야? 그러면 왜…….”

“그치만 요한. 우리 사이는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왜?”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 사이에는 신뢰라는 게 없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믿기에는 받은 상처가 크니까.”

요한은 속에서 울컥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더 잘한다고 해도……?”

“응.”

“여전히 네가 날 사랑한다고 해도……?”

“그래. 내가 널 여전히 사랑해도,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어.”

에스텔이 쪽, 요한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왜냐하면 넌, 여전히 나한테 모든 진실을 다 털어놓지 않고 있잖아.”

“…….”

“왜 나한테 내가 임신할 수 없다는 얘기 안 했어?”

불길함에 요한이 목소리를 떨었다.


“에스텔, 그건…….”

말도 안 되는 변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 네가 상처 입을까 봐. 네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인데 네가 자책하고 무너질까 봐.”

그 비루한 변명이 전부였으니까.


“아니. 너한테 모든 것을 설명할 용기가 없었어. 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리석고 멍청해서 그랬어.”

“하지만 그게 나를 사랑해서잖아.”

그의 두 눈을 감싼 에스텔의 손이 살짝 떨렸다. 정말 에스텔은 요한을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해.”

그녀가 투정 부리듯 귀엽게 속삭였다.


“조금만 더 솔직하게 해주지.”

“……에스텔.”

“그러면 상처를 받았어도, 너무 힘들었어도 요한만 보면서 버틸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요한이 날 사랑해서였다고 노력할 수 있었을 텐데. 뭐, 나도 요정인 걸 숨기고 있었으니 잘한 게 없나? 그치만 요정인 걸 밝혔을 때 요한이 날 죽였을지도 모르잖아. 그걸 어떻게 알고 함부로 밝히겠어, 그치?”

“…….”

요한의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마력 독으로 아프던 때가 차라리 나았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된 걸지도 몰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요한이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거든.”

에스텔이 그를 죽여 복수하려 했다고 생각하던 때가 덜 고통스러웠을지 모른다. 죄책감이 온몸을 할퀴었다.

에스텔이 요한을 눈가를 쓸어주었다.


“울지 마, 요한.”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왜, 나를 원망하지 않아?”

충분히 그를 비난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뭉클해지는 가슴이 심장을 더 아프게 죄었다. 에스텔은 그 말이 이상하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내가 요한을 원망했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네가 왜 나를 원망하는지 않는지 모르겠어. 네가 왜 나를 이렇게까지 이해하려고 하는 건데.”

“말했잖아, 사랑한다고.”

담담한 고백이 서글프게 떨어졌다.


“요한이 나한테 복수하려다가도 결국 나한테 복수하지 못했듯이, 나도 그래. 원망할 이유가 있어도 그게 잘 안 되더라.”

“그러면 너는…….”

“결국 요한도 피해자인데, 요한이 고통받는 모습은 싫었어. 그치만 이상하게 요한의 곁에서 계속 살 자신도 없었어.”

“내가, 잘못했어.”

절절한 고백이 끓어올라 터졌다.


“염치없더라도 날 한 번만 봐줘.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나한테 기회를…….”

“안 그래도 그러려고.”

에스텔이 천천히 손을 떼고 일어섰다.


“이건 내 마지막 선물이야.”

그녀가 요한의 손목에 찬 팔찌를 돌리며 해사하게 웃어주었다.


“요한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요한은 아름다운 에스텔의 얼굴에도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마도구가 가동하기 시작한다.

그가 불길함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뭐 하려는 거야?”

에스텔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일어나 그에게서 멀어졌다.

한겨울, 이질적일 정도로 환하게 피어난 에덴 로즈. 에스텔은 그 사이에 뿌려놓았던 기름을 주변에 휙 부었다.

키에에엑-!

마물들이 식장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습격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쿠웅, 식장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한의 불길한 시선이 에스텔에게 따라붙었다.


“에스텔, 에스텔……!”

에스텔이 천천히 마물들을 보며 준비했던 화로를 확인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그러니까 이 계획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

솔직히 거울을 바라봤을 때부터 무척 두려웠다. 진실이라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거울이 비춘 것은 감방 안에 있는 예스텔라였다. 검게 물들어 무너져 가는 예스텔라의 모습.


‘요한이 죽이기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어?’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저주를 풀었기 때문이야.’

그동안 내 힘을 착취했던 대가가 고스란히 예스텔라에게 돌아가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요한이 죽이지 않았더라도 예스텔라는 고통받다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다시 한번 요한이 예스텔라를 죽이는 광경이 되풀이되었다.


“그렇구나.”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내 저주가 완전히 풀리게 되면, 요한이 예스텔라처럼 대가를 치르게 돼서. 그래서 나한테 이걸 보여주는 거였구나.”

나는 두 손으로 거울을 꽉 붙잡았다.


“그러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거울이 내 상상을 보여주듯 저주가 돌아와 무너져 가는 요한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미안해, 에스텔.]

내가 복수에 성공했을 때 보게 될 광경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널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진짜야. 믿을 수 없을지 몰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요한이 원망스럽고, 미웠던 건 그만큼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 요한을 진짜 많이 사랑했구나.”

그래서 그가 조금이라도 더 내게 솔직해지길 바랐던 거였다.

거울을 보며 울던 내가 얼굴을 감쌌다.


“내가 요정이기 때문일까?”

마물에 성황에, 요한은 여전히 날 둘러싼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내가 그를 원망하고 있는 와중에도.

사실 요한을 원망할 필요 없는 일일지 모른다.

애초에 내가 요정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니까.


‘그런데 예스텔라는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을까?’

예스텔라가 내 힘을 훔쳐가 사용했던 것이라면, 반대로 나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두 눈을 감았다가 뜬 내가 마물을 올려다봤다.

쿠웨에엑-

마물이 내가 이시도르에게 배운 요정 결계를 부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끝인가?’

무리해서 계속 쓴 탓에 요정의 힘이 점점 소진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요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걱정 마, 요한. 너는 더 상처 입지 않을 테니까.”

물론 내가 사라진다 해도 요한은 힘들 거다. 요한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를 또 힘들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지워버릴 거다.

요한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라는 사람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그가 원래대로 복수에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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