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어떻게 너 없이 (163/182)


163화 어떻게 너 없이
2023.06.23.



 
요한은 며칠 뒤에서야 깨어났다.


“이곳은…….”

“주인님, 정신이 드십니까?”

“주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주인을 잃을까 노심초사했던 블란쳇 공작가 사람들이 모두 안도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특히 페트리샤는 믿지도 않은 신을 부르짖으며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주치의인 헨리가 분위기를 수습하며 요한을 진찰했다.


“모두 진정하십시오. 헨리입니다. 정신이 좀 드시는지요?”

“그래. 내게 큰일이라도 있었나?”

“예. 공작님께서는 공작저로 이동하자마자 혼절한 상태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고요. 그러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 상태를 지금 좀 확인해 보겠습니다.”

헨리는 주치의답게 요한의 몸 상태에 관한 질문을 몇 개 던졌고, 요한은 무심하게 그 진찰에 대답했다.

요한의 대답을 들은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큰일을 겪으셨던 것 때문에 몸에 피로가 쌓여 혼절하셨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휴식하시며 몸을 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큰일?”

요한이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베티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리베르탄 공작가에 대한 복수를 마치셨잖아요. 그래서 긴장이 풀리신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복수를 위해 무리하셨던 게 터졌던 모양입니다. 그 여자를 완전히 속이겠답시고 마력 독까지 마시지 않았습니까?”

에리히의 말에 요한이 설핏 눈매를 좁혔다.


“……그랬지.”

“주인님께 복수하겠다고 주제도 모르고 독을 구해다 먹인 그 여자도 그 여자지만, 그 여자를 속이겠다고 마신 주인님도 정말 너무하셔요. 혹시라도 잘못되셨으면 어쩌시려고요.”

“맞습니다. 일이 잘 해결되어서 망정이지. 이제라도 일이 다 끝났으니 스스로를 좀 돌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의 눈빛에 공허함이 서렸다.


“그래. 그러지.”

가신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요한의 상태를 걱정했다. 수척해 보이는 요한이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것 같았다.


‘역시 인생의 목표였던 복수가 끝나고 난 뒤 허망함을 느끼시는 것이겠지요?’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드리기 위해 노력합시다.’

가신들은 어색하게 요한에게 말을 붙였다. 그 대화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던 요한이 뜬금없이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래서 에스텔은 어떻게 되었지?”

“계획대로 완벽하게 불타 사라졌습니다. 리베르탄 공작가가 전부 그랬듯이, 제 욕심에 속아 끝난 것이지요.”

요한은 분명 제가 짰을 게 분명한 계획을, 마치 처음 듣는 것 같았다.

그 멍청한 에스텔에게 진실을 폭로한 뒤 끝없이 상처를 준다. 리베르탄 공작가의 죄악에 자책하고 고통받게 한다.

그런 뒤 망가진 에스텔이 참다못해 요한에게 복수하고 도주하게 만든다. 그래서 고통에서 막 해방되었다고 느낀 찰나, 요한은 숨겨둔 마도구로 이동하여 그 여자만 불 속에 버리고 나온다.

아마 에스텔은 성공했을 거라 느꼈던 희망까지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으로 불에 타 고통스럽게 죽었으리라.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나도 모르는 새 정이 들었던 걸까?’

에스텔이 고통받으며 죽었다고 생각하자, 속이 후련해지기는커녕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상대는 리베르탄인데.’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제 가족들이 들으면 배신감을 느끼리라. 요한이 자기도 모르게 이불을 손으로 꽉 쥐며 물었다.


“화재가 난 곳은 완벽하게 수습했겠지?”

“예. 기사들과 함께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여자의 시신은 나오지 않았지만 물건이 남은 걸 보아 시체조차 안 남기도 죽은 모양입니다.”

“……이상한 점은 없었나?”

“그런 건 없었습니다만,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요한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답했다.


“모두 내 복수에 동참해 주어 고맙다. 너희가 아니었다면, 나 혼자 이리 잘 마칠 수 없었을 거다.”

“아닙니다.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저희가 어찌 그 강대한 리베르탄을 이토록 완벽하게 징치할 수 있었을까요, 다 주인님의 공로예요.”

베티는 에스텔의 첩자 노릇을 하며 가장 고생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특히 도주하면서 그녀에게 충성스러운 모습을 계속 보여줘야 했기에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이었다.

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군.”

요한은 혼자 쉬고 싶다는 이유로 가신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가신들은 떠나는 와중에도 요한을 위한 걱정을 여러 차례 남겼다.


“주군. 복수가 끝났다고 이상한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아셨지요?”

“맞아요. 리베르탄 공작가 같은 끔찍한 악을 없애버렸으니 저희도 이제 행복하게 살아야죠! 그동안 복수를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만큼이요!”

“어서 나가.”

“옙! 얼른 나갑시다! 조금만 더 있다간 주인님께서 화내시겠어요.”

인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혼자 남은 요한이 나직이 심호흡했다.


“……보고 싶다…….”

‘무엇을?’

머리로는 모든 게 잘 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 가슴에선 자꾸 착잡함과 슬픔이 새어 나왔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닦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왜?’

도저히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

요한은 아무렇지 않게 집무실로 복귀했다. 에리히가 피곤해 보이는 요한을 말렸다.


“주인님. 헨리 씨가 안정을 취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만큼은 업무에서 손을 떼시는 게 어떨는지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 거다.”

요한이 딱 잘라서 말하자, 에리히도 더 반대할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 요한의 결정에 계속 말을 얹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그들은 요한이 명령하면 움직이는 도구였으니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에리히 본인도 스스로의 행동에 어색함을 느끼며 요한이 요청한 자료를 건네주었다.

요한이 의식을 잃은 사이 벌어졌던 일을 기록해 둔 문서였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로 식장의 불은 주변에 번지지 않음.]

[식장 근처에서 마물의 준동이 발견됨. 식장 내부를 습격했던 것으로 추정.]

[식장 내부에서 벌어졌던 일을 추정할 수는 없으나, 에스텔 리베르탄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 중.]

[에스텔 리베르탄이 마물과 수작을 부려 블란쳇 공작님을 습격하고 공작님께서 마물을 물리치고 빠져나오셨던 것으로 의견이 모이는 상황임.]

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보고를 바라봤다. 에리히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 식장에서 발견된 마물들의 흔적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전부 처리된 걸 보아하니 주인님의 솜씨라 생각하고 있긴 했습니다.”

“아마 그럴 거다.”

이상하게 그때의 상황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는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력 독에 중독된 채 마력을 쓴 부작용인가?’

하지만 요한은 심장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문서에 적힌 에스텔이라는 글자만 봐도 눈가가 시큰거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 하다 마물까지 이용하다니. 핏줄 하나 섞이지 않아도 리베르탄은 리베르탄인 모양입니다. 하긴. 그 추악한 사상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라.”

“……예?”

요한의 목소리에 담긴 적대감에 에리히는 어깨를 움찔였다. 요한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습했다.


“……이미 끝난 일에 언급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다.”

“하긴. 그 더러운 걸 말해봐야 제 혀가 썩을 뿐이겠지요.”

에리히가 어색하게 웃으며 안경을 들어 올렸다.


“역시 주인님께선 다르십니다. 저는 복수에 성공했다는 것에 들뜨기만 했는데, 주인님의 태도를 보아하니 제가 다 부끄러워집니다. 정작 주군께선 아무렇지 않으신데…….”

“그런가?”

“예. 누가 보면 주인님께서 그 여자에게 동정심이라도 품으신 줄 오해할 정도로 복수의 기쁨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요한은 무심히 그 말을 넘겼다.

그러나 그 말이 뇌리에 박힌 듯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를 동정했다고?’

그저 복수 대상이었던 여자. 그 여자와 있었던 일은 모두 가소로운 연극에 불과했다.


“공작 부인의 방은 어떻게 했지?”

“아, 그 방 말이군요. 주인님의 지시를 기다리느라 모두 그대로 두었습니다.”

에스텔이 쓰던 공작 부인의 방.

그 안에선 요한이 완벽한 연극을 위해 그녀에게 주었던 선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랑받는 여자의 방처럼 화려하고 예쁘게 꾸며진 방이다.


‘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안 보이지?’

모든 물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사용한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방을 청소했나?”

“방 주인이 죽은 마당에 뭐가 예쁘다고 청소까지 했겠습니까?”

에스텔이 오래 머물렀던 에덴 로즈 정원.

겨울을 맞이한 정원에서는 장미가 모두 떨어져 온통 쓸쓸했다.


‘처음 에덴 로즈가 피었을 땐 이상했지.’

그때 요한은 죽은 그의 가족이, 억울했을 선조가 복수를 지켜보고 있다는 신호로 보았다.


‘……그랬던가?’

덤불 사이로 시들지 않은 에덴 로즈 한 송이가 보였다. 푸른색 꽃잎이 쌓인 눈 속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요한이 숨을 멈추고 장미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그가 떨리는 손끝으로 장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그락 손끝에 장미가 닿은 순간, 눈가에서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에스텔이 죽었다.’

기뻐야 한다.

즐거이 웃으며 죽음을 조롱해야 한다.

요한이 이를 꽉 깨물었다. 손에 닿은 장미가 바스락 부서져 사라졌다.

조각조각 떨어진 에덴 로즈는, 이 장미가 피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없었던 일처럼 느껴지게 했다.


“아니야.”

요한은 억지로 눈 속을 헤집으며 장미 조각을 찾았다.

정말 허상이었을까?

복수를 준비하다 드디어 미쳤던가?

손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결혼식장을 향해 달려갔다.


“주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주인님?”

쫓기듯 달려가는 요한을 가신들이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요한은 온통 그 결혼식장에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가짜 결혼식을 올렸던 흐릿한 그날처럼,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그는 다 타고 남아버린 폐허 앞에 섰다.

제법 화려하게 꾸몄던 것 같은데, 공평하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짜 끝났네.”

복수만을 위해 달려온 인생의 끝이 느껴졌다. 이 폐허, 요한은 이 폐허를 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니 이제 만족해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시신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불은 요한을 위해 무엇 하나 남겨주지 않았다. 공작저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의 물건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그 여자는 아무것도 없이 블란쳇 공작가에 들어왔으니까.


“주군!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이 날씨에 그리 얇게 입으시면 안 됩니다!”

“맞습니다! 이제 스스로를 챙기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왜 신발도 신지 않고 나오신 겁니까? 제 신발이라도 신으십시오!”

레이몬드를 비롯해 가신들이 주저앉은 요한을 찾아왔다.

그때 베티가 케이크를 들고 왔다.


“아이, 주인님! 이러시면 오늘 성공 기념 파티를 여기서 열 수밖에 없잖아요!”

“베티, 너는 이 자리까지 꼭 케이크를 들고 와야겠느냐?”

“그치만 이런 건 시간을 맞춰야 의미가 있는 거라고요. 지금이 딱 결혼식을 열었던 시간이잖아요.”

붉은 눈동자가 멍하니 케이크에 꽂혔다.


“……아니야.”

목 끝까지 절망이 차올라 숨도 쉬지 못하게 했다.

촛불 켜진 케이크가 죽어버린 에스텔을 보여주는 듯했다.


“죽지 않았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그 여자가 그 불 속에서 도망쳤단 겁니까?”

“주인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죠? 당장 주인님을 저택 안으로…….”

요한은 케이크를 엎어버렸다.

악몽을 꾸는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요한을 본 베티가 고개 숙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너무 들떠서 오지랖을 부렸나 봐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베티도 이리 무례한 행동일 줄 몰랐을 겁니다. 저도 같이 사죄드릴 테니…….”

요한이 숨을 헐떡이며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보였다.


‘주군, 그 반지는 안 빼십니까?’

 
반지를 빼라는 레이몬드의 말에도 빼지 않았던 반지다.

사파이어가 빛났다.

그 순간 부스러지던 푸른 장미와 케이크가 머릿속을 스쳤다. 끔찍한 두통이 머리에 내려쳤다.


“-으윽!”

하지만 요한은 꿋꿋하게 다리를 지탱하고 서서 폐허를 바라봤다.

빛을 받으면 사랑스러운 분홍색으로 변했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것 같았다.


“주인님……?”

머릿속으로 전혀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요한은 광인처럼 폐허를 헤집었다. 모두의 만류를 무시하고 폐허를 둘러본 요한이 하늘을 보며 광소했다.


“……에스텔.”

너는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내가 상처 입지 않을 거라고?’

이딴 식으로, 기억을 다 지워버리면 될 줄 알았어?

내 세상은 네가 되었다.

너는 내 모든 의미가 되어버렸다. 복수밖에 없는 인생의 유일한 의미였다.


“그런데 어떻게 너 없이.”

요한의 목소리에 절망 같은 울음이 섞였다.


“너 없는 내가.”

바람처럼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안녕, 요한.’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네 복수는 이루어졌어. 이제 네가 살고 싶었던 인생을 살고…….’

 

 

***

짙은 어둠.

에스텔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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