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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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목적
2023.08.15.
블란쳇 기사단의 조력으로 마수들은 금세 정리되었다. 막 마수 하나를 깔끔히 처리한 레이몬드가 오랜만에 보는 주군에게 인사했다.
“주군. 명에 따라 블란쳇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했습니다.”
“잘했다.”
요한은 혼란을 정리하고 도열한 기사들을 치하했다.
“모두 급하게 와준 덕분에 한결 쉽게 마수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무리 포탈을 이용했다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을 텐데.”
“주군의 분부인데 당연히 빨리 와야지요. 뭐, 주군께서 변고를 당하신 줄 알고 기사단 전원이 준비 태세였기에 더 빨리 올 수 있긴 했습니다.”
기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마을 사람들을 발견한 레이몬드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런데 주군, 방금 저희가 정리한 마수가 전부입니까?”
“조사에 따르면 그렇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나?”
“아, 저희가 오는 길에 마수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던 게 이상해서 말입니다. 그 덕에 장애물 없이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만.”
“한 마리도 없었다고?”
“예. 주군도 아시다시피 아무리 한꺼번에 움직이는 마수 무리라 해도 중간에 뒤떨어져 홀로 움직이는 녀석 한두 마리쯤은 있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레이몬드는 마수 사냥꾼 출신 아버지를 둔 탓에 마수에 매우 해박했다. 요한의 입가가 미미하게 굳었다.
“확실히 신경 쓰이는 정보군. 안 그래도 마수들이 예상보다 너무 쉽게 정리되어 이상하던 차였다. 다섯 개 정도 되는 마을을 단번에 몰살시킨 것들답지 않아.”
“마수들이 다른 곳에 숨어 있는 걸까요?”
“하지만 정찰 결과 마수들이 마땅히 숨어 있을 만한 장소는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온 마을이 이 영지의 가장자리라 마수들이 다른 곳으로 갈 만한 이유도 없어.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단도 없-”
그 순간 요한의 뇌리에 기묘한 생각 하나가 스쳤다.
‘그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것은 에스텔이 완전히 사라졌던 결혼식 날이었다. 식장 안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물들이 출몰했다.
‘식장 근처의 숲 인근에서 마수가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식장에서 ‘소환되어’ 나타났던 것이라면? 그렇다면 평소 상정하던 마수들과 다른 전투를 떠올려야 했다.
“에스텔.”
요한이 에스텔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스텔이 위험해.”
“예? 마님이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마님도 여기 계시다고 하셨지요. 안전한 곳에 머무르게 하신 게 아닙니까?”
“그렇게 대비해 놓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수들을 상대하느라 최소한의 인력만 근처에 배치한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펜테 마을의 경계는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조급하게 말에 올라타 펜테 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펜테 마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에스텔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집이었다.
방 안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뒤집혔고, 바닥엔 거울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요한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기사의 멱살을 잡았다. 에스텔의 안전을 위해 놓고 간 기사 놈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에스텔은?”
“그것은 저희도…….”
“납치당하는 걸 막지 못했으면, 최소한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납치당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요한의 분노를 정통으로 마주한 기사가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소, 송구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고도 네가 기사인가?”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어야지.”
기사의 멱살을 틀어쥔 요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붉은 눈동자가 음산한 광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너 하나 죽인다고 해서 에스텔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안다.”
“컥, 커억……!”
“하나 최소한의 역할도 하지 못하고 태만한 놈을 살려둘 이유를 모르겠군.”
기사는 요한이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기세에 눌려 숨을 헐떡였다.
“사, 살려…….”
“살고 싶나?”
요한은 픽 입꼬리를 올리며 기사를 바닥에 내던졌다. 바닥에 주저앉았던 기사가 요한을 올려다봤다. 요한이 그런 기사를 내려다보며 낮게 명령했다.
“그렇다면 네 존재 가치를 증명해. 네 친구를 써먹든, 무슨 짓이든 해서라도.”
기사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직감했다. 요한은 사지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기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딴 것들에게 맡겨서는 안 되었는데.’
인력이 부족해 많은 병력을 두지 못했다.
‘에스텔-’
당장 잘못된 것은 아닌지. 무사하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이미 잘못된 상태라면…….
까득, 요한이 이가 부러질 듯 짓씹었다.
불길한 생각이 쉴 새 없이 번졌다. 그 순간 펜테 마을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제가 늦었군요.”
“에리히 블로뉴?”
요한이 눈매를 좁혔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기사들과 함께 온 건 보지 못했는데.”
“상황이 꼬여 따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마님께서 납치당하신 상태가 맞습니까?”
“그래. 에스텔이…… 기억이 돌아왔나?”
에리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과 달리 다소 늦었지만 말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지?”
“베티를 비롯한 몇몇은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는 듯합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지금 마님께서 어디로 납치되신 건지 알 것 같습니다.”
요한이 숨을 멈추고 에리히를 바라봤다.
“사실 그것 때문에 급히 주인님을 뵈러 온 것이긴 합니다만, 제 부족함으로 결국 늦고 말았군요.”
“지나간 일을 탓하지 마라. 그래서 지금 에스텔이 어디에 있지?”
“현재 마님께서는 구름나무 숲 중앙에 있는 ‘무덤’에 계실 겁니다.”
요한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무덤?”
“아테아 신의 무덤입니다.”
아테아 신. 세상을 빚었다는 위대한 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등장에 요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곳에 아테아 신의 무덤이 있다고? 신이 여기서 죽기라도 했단 건가?”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에리히는 에스텔에 대한 기억을 되찾자마자 ‘요정’과 성국의 관계에 대해 면멸히 조사했다. 그러던 중 성황이 사라져 무너지기 직전의 지하실에서 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주인님, 그 성황이 요정을 모두 없애려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니 그놈의 목적을 다 확인하지 못했군.”
“불멸입니다.”
에리히가 차분히 답했다.
“신의 핏줄인 요정의 힘을 모두 모으면, 신에도 닿을 수 있다고 합니다.”
“…….”
그 순간 요한은 그를 조롱하며 가지고 놀던 악마의 목적을 직감했다.
***
예스텔라가 내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내가 가지지 못하면 아무도 가지지 못해.”
“…….”
“설령 내가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게 나 대신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사는 꼴은 못 보겠더라.”
“…….”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방금 한 대 맞았다고 겁에 질려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지? 너 그렇게 쉽게 끝나는 애 아니잖아.”
예스텔라가 킥킥 웃었다. 괴물처럼 일그러진 반쪽 얼굴이 그녀의 감정에 반응해 꿈틀거렸다.
“괜히 연기하지 말고, 어서 더 추잡하게 난리 쳐. 살려달라고 빌고 발버둥 쳐보라고.”
“그러면 살려주려고?”
“그거야 모르지. 그래도 빌어봐야 하지 않겠어? 지금 기적처럼 애도 가지고 있는데, 더 노력해야지.”
예스텔라는 검지로 내 배를 쿡 찔렀다.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안 그래?”
내 배를 바라보는 예스텔라의 푸른 눈이 질투로 번들거렸다.
“사실 나, 처음에는 네가 아기를 가진 게 끔찍할 정도로 싫었어. 주인공도 아닌 네가 요한 님의 아이를…….”
희번뜩 푸른 눈을 빛내던 예스텔라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이제야 순리에 맞지 않게 네가 그이의 아기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됐어.”
예스텔라의 손이 부푼 내 배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대기만 했던 예스텔라는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꾹 눌렀다. 배가 아파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야 너를 더 비참하게 없앨 수 있을 테니까.”
“으윽-”
“네게 아기가 없었다면 너를 이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했겠지.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하고 억울해.”
예스텔라가 붉은 입술을 비릿하게 들어 올렸다. 내가 고통스러운 게 몹시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 그만둬. 제발 아기만은…….”
나는 일부러 더 과장되게 아픈 척했다. 그러자 예스텔라는 충분히 협박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섰다.
“부탁하는 태도가 부족한데?”
“내가, 내가 뭘 하면 되겠어?”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다 없애버렸잖아. 안 그래?”
예스텔라가 방의 구석으로 가는 사이 나는 최대한 요정의 힘을 움직여 보았다.
‘왜 움직여지지 않지?’
분명 내 안에선 요정의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요정의 힘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평소처럼 나무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예스텔라가 무슨 수작을 부려둔 거야.’
최소한 이 공간에서 요정의 힘을 쓸 수 없는 건 확실했다.
‘어떻게 하면 도망을…….’
그 순간 바닥에 깔려 있는 풀이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살랑거리는 게 보였다.
‘설마.’
***
예스텔라는 히죽 웃었다.
‘저 버러지 같은 게 두려워하고 있어.’
애써 담담한 척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 같아서 더욱 기뻤다. 그래야 희망을 부수었을 때 더 짜릿할 테니까.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주마.’
예스텔라는 하얗고 고운 에스텔의 피부를 보며 뒤틀린 증오를 불태웠다.
‘너 같은 버러지는 내가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뎠는지 모르겠지.’
온몸이 불에 타는 고통부터, 제 아름다운 몸을 괴물이 비집고 들어와 오염시키는 끔찍한 고문까지.
그 고통스러운 시간 내내 예스텔라를 버티게 해준 건 에스텔에 대한 증오였다.
예스텔라가 검은색 구슬을 에스텔이 앉은 자리에 동그랗게 놓았다. 그리고 손에 피를 내어 원을 그렸다.
에스텔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무엇을 하려는 거야?”
“네가 만족스럽게 빌지 않아서, 이제 슬슬 네 아기를 끔찍하게 없애버리려고.”
“그게 무슨…….”
“그러고 보니 너는 어느 정도 익숙하려나. 영혼의 저주라고, 너한테 걸었던 저주인데. 그거보다 더 심한 저주야.”
에스텔은 반항하듯 몸부림쳤지만, 흑마법으로 결박된 몸은 결코 풀리지 않았다.
“이거 풀어!”
예스텔라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그 광경을 즐겼다.
“내 저주는 태어나지도 않은 네 아기의 영혼부터 좀 먹게 할 거야.”
에스텔이 고통스러울수록 예스텔라 안에 흡수된 마수도 예스텔라를 따라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무척 가여운 고통이겠지만 어쩌겠어. 그러게 누가 가져서는 안 될 걸 가져서 행복해지래?”
예스텔라가 키득거리며 버둥거리는 에스텔의 팔을 붙잡았다. 에스텔이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물었다.
“가져서는 안 될 애라니. 주인공도 아니다는 소리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거야 애초에 생길 수 없었던 아기를 네가 가졌으니까 하는 소리지.”
예스텔라는 에스텔의 반응에 잠깐 놀랐다가 기쁨에 잠겼다.
“설마 몰랐어? 요한 님이 너에게 그런 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니?”
“…….”
“세상에. 그렇게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굴더니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나 보구나.”
“…….”
“주인공인 내가 아닌 너는 원래 아기를 가질 수 없었어. 생겨났어도 곧 죽을 애였지.”
에스텔의 남색 눈이 흔들렸다.
“진짜로…… 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요한에게 그 얘기를 했어?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길 수 없다는 것도?”
“그래, 그렇다니까.”
“그렇구나, 그러면 요한도 아기가 생겼을 땐 몰랐던 게 맞네.”
중얼거리는 에스텔의 태도에 예스텔라는 확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알아 뭐하려고? 네가 아기를 가졌든 말든 죽을 거고, 너도 뒤따라 죽을 텐데.”
“그치만, 그치만 난 믿을 수 없어. 왜냐하면-”
에스텔은 울먹이는 얼굴로 예스텔라를 올려다보다가 무표정해졌다.
“지금이야.”
퍽! 거대한 돌이 예스텔라의 뒷머리를 내려쳤다. 예스텔라는 켁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예스텔라의 뒤에는 장신의 소년이 서 있었다.
요한을 닮은 검은 머리에 심해처럼 깊은 남색 눈동자. 성인처럼 키가 컸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린 티가 묻어나는 얼굴.
“룬, 룬 맞지?”
정령 아기였던 룬이 에스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에요, 에스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