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서로가 있는 곳으로 (180/182)


180화 서로가 있는 곳으로
2023.08.22.



 
나는 룬과 함께 오두막을 나왔다.

쿠와아앙! 쾅!

오두막은 우리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졌다. 오두막 안에서 예스텔라의 찢어지는 괴성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룬이 얼굴을 찌푸리는 내게 물었다.


“기분이 안 좋으세요?”

“아. 조금?”

“예스텔라 그 여자의 죽음 때문에요?”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처참했던 예스텔라의 최후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죽음 자체로 끔찍해서 그런가 봐. 아기한테 그런 걸 퍼부으려 했다고 생각하니 더 끔찍하고.”

“아마 이제 더 이상 예스텔라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이미 그 여자는 영혼 끝까지 다 제 손으로 써먹어버렸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오두막 주위에 있던 마수들은 예스텔라의 죽음과 동시에 물감이 녹아버리듯 알아서 사라졌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근처에 보이는 건 온통 나무들뿐이다. 바로 나무들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은커녕 가지 한 번 흔들어주지 않았다.

그때 룬이 나서서 대답해 줬다.


“이 근처 나무들과는 다른 나무들처럼 대화할 수 없을 거예요.”

“어째서?”

“여기 나무들은 이미 죽은 나무거든요.”

“죽었다고? 하지만 저렇게 싱싱해 보이는데?”

“정확히 말하면 영혼이 죽은 나무들이에요. 몸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죠.”

멀쩡해 보였던 나무들이 슬플 정도로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무의 영혼이 죽을 수도 있어? 이 근처 나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인간이 영혼을 잃게 되는 건 대부분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대서였다. 방금 전 예스텔라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나무들이 인간처럼 금지된 마법에 손댈 리 없어.’

애초에 나무들은 바라는 게 크게 없는 존재다.


“영혼이 죽어버릴 정도로 너무 슬픈 일을 겪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일인데?”

“신의 죽음이요.”

룬은 깜짝 놀란 내 표정에도 담담히 말했다.


“신의 죽음을 목도한 이 주위의 나무들은 너무 슬픈 나머지 영혼까지 죽어버렸어요. 구름나무들 정도나 겨우 살았고요.”

“…….”

“하지만 구름나무들도 크게 충격받아 기억을 많이 잊어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이 ‘무덤’이구나.”

어쩐지 심상치 않다 했다. 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에스텔이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야 해요. 무덤이랑 너무 가까운 장소예요.”

룬은 발걸음을 재촉해 나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몸이 무거워서 아무리 움직여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무덤이랑 가까우면 문제가 생겨?”

“요정이 신의 핏줄인 건 아시죠? 그래서 요정의 힘 끝에는 신의 힘이 닿아 있어요.”

앞장서던 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제 에스텔 하나만 잡아먹으면 모든 요정의 힘이 한 존재에게로 흡수돼요. 저는 그 비극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요.”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거다.’

성황, 성황의 배후에 있던 마물까지 전부 나를 노리던 이유.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룬에게 물었다.


“모든 요정의 힘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데?”

“존재를 초월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미 초월한 존재라면.”

룬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신이 될 수 있어요.”

신, 그 자체로 압도적인 단어.

전지전능을 이르는 표현. 무리하게 걸었던 나는 숨이 차 비틀거렸다. 룬이 내 어깨를 붙잡아줬다.


“에스텔, 많이 힘들어요?”

강아지처럼 순한 눈망울이 나를 걱정해 줬다. 아기 때는 요한을 엄청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라고 보니 룬은 온화한 스타일의 미남이 되었다.


“그러면 제게 업히- 아, 아기가 있구나. 역시 임신한 몸으로 산을 돌아다니는 건 무리였나 봐요. 제가 안아드릴까요?”

룬은 제 머리를 짚으며 끙끙 앓았다.

정령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순진하고 솔직한 반응이 어우러져 훨씬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아직 아기네.’

딸랑이 흔들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나는 큰 바위에 앉아 숨을 돌리고 룬의 손을 잡으며 다독였다.


“괜찮아. 앉아서 조금만 쉬면 다시 걸을 수 있어. 그런데 잠시 쉬는 동안 상황이 어떻게 위험한 건지 말해줄래?”

“아…… 그러니까.”

룬은 당장 설명하기 어려운지 미간을 좁히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귀여워.’

남색 눈동자는 몹시 진지했지만, 얼굴 전체에서 묻어나는 풋풋한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요한도 더 어릴 땐 이랬으려나?’

생각해 보면 내가 요정의 능력으로 본 건 한참 어린 소년 시절이었다.


‘그때는 지금이랑 더 닮았던 거 같기도 하고.’

배 속에 있는 이 아기가 남자앤지 여자앤지 몰라도 이렇게 나와 요한을 닮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새삼 서로의 핏줄이 이어진 아기가 얼마나 애틋한 존재인지 실감 났다.

두근, 두근-

그런 내 생각에 맞춰 배 속의 아기가 발을 구르며 신호를 보냈다.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나는 배에 손을 대며 속으로 말했다.


‘아가, 엄마가 꼭 지켜줄게.’

블란쳇 공작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도 너를 무척 기다리고 있어.


‘네 이름 지어달라고 하니 아빠가 엄청 바보 같은 표정을 짓더라. 엄마도 네 아빠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불안해서 나도 모르게 떨리던 손발이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지금 나는 아기와 함께하고 있다.


‘예스텔라도 무찔렀고.’

한참 고뇌하던 룬이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제 능력으로는 아직 ‘그놈’이 있는 위치를 파악할 수 없네요.”

“‘그놈’?”

“에스텔을 마지막으로 흡수해서 신이 되려는 존재요. 이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한데.”

“마물이 아니었어?”

룬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물이라뇨?”

“아, 정확한 이름은 마물이 아니려나. 성황과 계약해서 나를 공격하고, 이따끔 나를 공격하던 존재야. 보기만 해도 딱 ‘마물’처럼 생겼어. 요한도 ‘마물’이 맞다고 했고.”

“흐으음.”

룬은 한쪽 입술을 삐죽 올리며 팔짱을 꼈다.


“어쩐지 그 존재가 단순히 ‘마물’인 것 같지 않아서요.”

“새로운 존재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흠. 전부터 제가 느꼈던 ‘그놈’은 뭐랄까, 어쩐지 에스텔과 비슷하다 싶을 정도로 신성한? 이렇게 말하니 진짜 이상하네요.”

듣는 나도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랑 비슷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요한이 마물은 악마처럼 혼돈에서 태어난 존재랬는데. 요한이 잘못 알았던 건가?”

“일단 악마나 마물이나 출신이 명확한 존재는 아니에요. 워낙 오래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들이라서요.”

더 의문스러운 대답을 남긴 룬은 내 고뇌에 빠진 눈을 알아서 오해한 모양이다.


“……제가 아직 어린 정령이라 그래요. 나이가 좀 더 들면 더 잘 알 수 있어요.”

“지금도 많이 아는데? 우리 룬 덕분에 혼란스러웠던 게 얼마나 많이 풀렸는데.”

“그니까 그 정도가 아니에요!”

룬이 불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저한테 시간만 더 있었으면 ‘그놈’을 이길 수 있었을 거라고요.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어야 했는데.”

“아이구, 알았어. 아무튼 지금 근처에 있는 ‘그놈’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이거지? 그러면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최대한 이 숲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고 있어요.”

“그래?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라면, 요한을 찾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은데. 지금 요한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감았다.


“잠시만요.”

요한을 닮은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희고 푸른빛이 신비롭게 룬의 주위를 맴돌았다.

룬이 눈을 뜨자, 남색 눈동자에 예쁜 흰 빛이 돌고 있었다.


“지금 요한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 있어요. 무덤, 무덤 근처예요……. 지금 이쪽으로 오는 있어요!”

“잘 됐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지?”

“네.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다행히 요한은 무사히 마수 무리를 무찔렀나 보다.


“다행이다. 그러면 지금 요한이 있는 곳으로 가자.”

바위에서 일어나자마자 다시 현기증이 찾아왔다.


‘에스텔. 안정기기는 하지만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 된다. 특히 너는 원래도 몸이 약한 편이라 더 위험할 수 있어.’

 
에나 아버지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아기가 잘못되면 안 돼.’

내가 아픈 건 상관없지만, 무리하게 움직여서 아기에게 이상이 생기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요한이 보고 싶다.’

요한의 얼굴을 생각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울컥할 것 같았다.


‘요한도 룬을 만나면 무척 기뻐하겠지?’

어떤 의미에서 요한은 나보다 더 정성 들여 룬과 놀아주고는 했으니까. 나 때문에 슬픈 티를 내지는 못했어도 말이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산비탈에서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알아챈 룬은 나를 들어서 움직여주기로 했다.


‘역시 불안한데.’

아직 룬이 어린 아기처럼 느껴진 나는 계속 거절했지만 룬도 만만치 않았다.


“저 튼튼해요! 제가 어린 정령이라고 무시하는 거 아니죠?”

“그건 아닌데…….”

“이래 보여도 성인 남자보다 더 강하거든요. 팔씨름으로 요한도 이길 수 있어요.”

“진짜?”

“그럼요. 옛날에도 요한의 두 손가락을 이기기도 했다고요!”

‘그거 분명 요한이 봐준 걸 텐데.’

“그래, 다시 만나서 팔씨름하면 되겠네.”

“제 말 못 믿는 거죠?”

“아니야, 믿어.”

“표정부터 아니거든요! 진짜 요한과 팔씨름해서 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쿠르릉- 콰앙!

맑았던 하늘에 심상치 않은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룬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벌써 준비를 다 마쳤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검은 장막이 숲을 뒤덮었다.

***

요한은 빠르게 인원을 꾸려 ‘무덤’으로 향했다. 에스텔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이상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무덤이 생각보다 범위가 넓어.’

장소가 특정된 것은 좋지만, 무덤 전체를 찾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이럴 때 에스텔이 나무로 연락이라도 해줄 수 있다면, 하다못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하지만 납치된 에스텔은 아직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위치를 알려주는 마도구는 블란쳇 공작저에서 에스텔이 요한에게 주었고.


“공작님, 아마 저쪽이 공작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무덤이라는 곳일 겁니다. 워낙 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 저희도 잘 모르는 곳이지만…….”

“알았다.”

‘무덤’은 빽빽한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군, 다 같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 보이는군.”

심지어 흑마법사인 요한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나무들 사이로 느껴지는 저 이상한 기운은 뭐지?’

흑마력과는 정반대되는 기운이 숲 가득 퍼져 있었다.


‘신이 죽은 장소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요한도 쉽게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모두 공작 부인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들어간다. 숲이 넓으니 낙오되지 않도록 긴장하고.”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숲에 발을 디뎠다.

파직! 무덤에서 스파크가 튀며 기사들의 발을 튕겨냈다. 가장 먼저 발을 들였던 기사가 발을 감싸며 바닥에 굴렀다.


“크윽, 주군. 저기에 뭔가가…….”

요한이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인간의 침입을 막는 결계 같은 건 없었다.


‘들어가는 데 자격이 필요한 건가?’

그 순간 스파크가 무덤 곳곳에 빠르게 일어나며 점점 커졌다.

쿠르릉! 콰앙!

이윽고 번개가 치더니, 돌연 나타난 검은 장막이 숲 전체를 빠르게 뒤덮었다.


‘저 장막은 뭐지?’

요한은 서둘러 검은 장막에 닿지 않게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다행히 검은 장막에 닿은 기사는 없었다.

치이익- 검은 장막에 닿은 풀과 나무들이 검게 물들어 녹아내렸다. 레이몬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군. 저 장막이 무엇인지 압니까?”

“저건…….”

그때 명쾌한 목소리가 요한 대신 대답했다.


“내 영역 결계야.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하는 마법이지. 참고로 나보다 더 마력이 강하면 들어갈 수도 있어. 도전해 볼래?”

레이몬드가 눈을 부릅뜨고 급히 제 허리춤의 장검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 검이 부식되었다.


“아직 대화하기도 전인데 공격하면 서운하잖아. 우리끼리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갑자기 나타난 존재.

허리까지 오는 백발에 보라색 눈동자. 비인간적일 정도로 딱딱한 미형의 이목구비.

성황이었다.


“요한이 생각하기에도-”

“통하지도 않는 연극은 그만두지?”

요한은 상대의 장난스러운 말을 끊었다.


“네가 성황 그놈이 아닌 건 알고 있다.”

“쳇, 요한은 농담이 잘 안 통한다니까.”

손을 휘젓자, 성황의 얼굴이 온통 검은색의 불길한 남자의 모습이 되었다.

악마였다.

악마가 요한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봤는데 반갑지 않아? 일부러 깜짝 선물도 준비했는데.”

“닥쳐라, 악마.”

“재미없긴. 그러면 이건 어때?”

검은 장막 앞으로 우아하게 걸어간 악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악마는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요한이 표정을 굳혔다.


“……마물.”

“이건 좀 놀랍지?”

악마가 요한을 보며 킬킬 웃었다.


“이제 좀 알려나, 네놈이 얼마나 우스운 꼴로 내 손에서 놀아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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