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나의 그녀 (112/123)


#112. 나의 그녀
2023.07.25.


<……특히, ‘재벌’이라고 불리는 한국 최상위 부자들 사이에서 부의 세습은 일반적이다. 하지만 여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강선’을 이끄는 강신재 회장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유소년기를 지낸 후 미국에서 유학 생활하던 그는 10년 전, 친구 Amber와 함께 미국 내 중소기업을 상대로 금융과 인수합병 등에 관한 컨설팅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사업은 두 사람의 추진력과 시의적절한 판단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고, 기업의 전략, 인수합병, 금융, 운영 등의 의사결정에 관한 컨설팅 분야에서 독특한 전략을 내세우며 미국 동부와 남부를 대표하는 몇몇 기업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오늘, 디에이지에서 만난 사람은 앞으로의 10년이 기대되는 글로벌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공동 대표 Amber Young과 함께 E&K 컨설팅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강태서이다.

……E&K 컨설팅은 현재 미국 내에 일곱 개의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총 오백여 명의 컨설턴트가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

아직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매년 눈부신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가장 일하기 좋은 미국 기업 TOP 50’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기도 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새롭게 알게 된 강태서에 관해 읽어 내려가던 유리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진 것은 강태서의 성공적인 독립 행보를 찬양하는 기사 마지막에 다다라서였다.

<……인터뷰를 마무리하기 전, 디에이지가 그에게 올해의 소원을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며 뜻밖의 소원을 밝혔다. “좋은 사람을 만난 뒤로는 계속 그녀와 함께하는 삶에 대해 꿈꾸곤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존재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멋진 일이더군요. 그녀에게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연애에 푹 빠진 사람임을 숨기지 않았다.

정략결혼이 흔한 한국 재벌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연애 중임을 밝히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디에이지가 그의 연인에 대해 조금 더 파고들었다.

불편할 수 있는 질문임에도 그는 “제 요가 선생님입니다. 재벌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제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죠.”라고 대답해 다시 한번 디에이지를 놀라게 했다.

연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 행운이었다.

직접 만난 강태서는 무척이나 멋진 사람이었고, 디에이지는 그의 팬이 되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하겠다는 말에 그는 “그동안 저는 제가 원하는 일을 해 왔고, 제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 왔습니다.

능동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소극적이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을 피해 오기만 한 것이죠.”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야 때로는 원치 않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할 용기도 갖게 되었고요. 그 모든 게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도록 저를 지지해 준 한 사람, 나의 그녀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연인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인터뷰 내내 그의 주변을 감돌던 핑크빛 무드에 어쩔 수 없이 물들어 버린 디에이지는 조심스럽게 그려 본다.

미국이 주목하고 있는 컨설팅 기업 E&K의 공동 대표 강태서가 소원하는 미래를.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전해 올 그를 기대한다.>

나의 그녀. 재벌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

주간지 <디에이지>의 강태서 인터뷰 기사를 곱씹는 유리의 눈에 불이 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곱게 관리받은 손톱에 힘이 들어간다. 뭐든 움켜쥐고 죄다 찢어 놓고만 싶다. 분하고 샘나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강태서, 이…….”

윤재인을 떠올리며 웃었을 게 분명한 강태서의 사진이 그녀의 손에서 막 구겨지려는 찰나,


“……뭐야?”

휙, 빠르게 다가온 손이 유리에게서 주간지를 낚아채 갔다.


“그, 그러니까……. 이거, 내 거잖아……. 이건 내가 우리 배우님 때문에 특별히 부탁해서 구한 초판본이라…….”

“…….”

“야, 쫄지 마. 이제 조유리 나가리 됐어.”

소중한 주간지가 엉망으로 망가지기 전에 구해 낸 친구가 유리의 시선을 피하자 곁의 다른 친구가 조유리를 비웃으며 친구를 격려했다.


“그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솔직히 강선 그룹에서 강태서가 조유리랑 결혼한다고 발표한 게 이상하지. 강선 그룹 회장님이 쟤를 예뻐할 이유가 있어?”

“내 말이. 집도 망했지, 본인 능력도 쥐뿔 없지. 저런 애를 강선에서 왜? 성격이라도 좋든가. 나는 쟤가 뭘 믿고 잘난 척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거기다 당사자인 강태서가 쟤랑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뭘 어쩌겠어?”

유리가 분노 가득한 눈을 들어 세 명의 친구들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들은 유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야, 전 세계 구독 수 1위의 경제지야. 이제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도 강태서가 연애 중이라는 거 알게 됐는데 강태서가 잘도 조유리 쟤랑 결혼하겠다.”

“너네도 봤지? 미친, 나의 그녀래. 느끼한 말도 강태서가 하니까 로맨틱 그 자체더라. 아, 그렇게 웃는 건 보는 사람 설레 죽으라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그거, 걔 얘기 맞겠지? 그 왜, 예전에 교통사고 나고 재활한다고 미국 갔던 애 있잖아. 조유리네 집에서 살던. 강태서가 걔 데리고 작년 연말에 강선 아트 센터 자선 바자회에 나타났다던 소문이 진짠가 보네.”

“윤재인 말하는 거야?”

“헐, 한국 무용하던 그 윤재인? 그러면 SNS에 돌아다니는 그 사진들, 강태서랑 데이트하는 여자도 윤재인이야?”

“응. 맞아. 나도 사진 봤는데 윤재인 보는 강태서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라. 걔는 예전에도 예뻤는데 더 예뻐졌어. 사진이 흐린데도 빛이 나더라니까?”

주간지를 소중히 들어 안은 친구를 에워싼 무리가 유리로부터 등 돌려 멀어졌다.


“조유리 나가리.”


“조유리 나가리.”


“조유리 나가리.”

 
귓가에 남아 맴도는 말이 주는 치욕감에 입술을 꽉 깨무는 유리의 눈에 알록달록 색 고운 디저트가 가득 차려진 테이블이 보였다.

차게 식어 버린 차, 얘기 나누는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아 겉이 말라 버린 음식들. 보기엔 예쁘지만 그게 다였다. 쓸모라고는 없어서 이제 곧 버려질 그것들이 꼭 제 모습 같았다.

화려한 호텔의 라운지,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은 그녀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는 제가 투명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강태서의 본가에서 쫓겨날 때 느꼈던 서러움이 그녀를 덮쳤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투둑, 떨어져 유리의 손등을 적셨다. 춥지도 않은데 조금씩 떨기 시작한 유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것은,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초라함이었다.


 

* * *

얼마 전, 태서는 앰버를 통해 문의가 들어온 미국 주간지 <디에이지>의 인터뷰에 응했다.

친부나 조모를 비롯한 집안사람들 그 누구도 모르게 오랫동안 꾸려 온 사업체를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것은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였다.


“독립이라…….”

피식 웃은 태서가 제가 뱉은 단어의 적절성을 생각하며 커프스 버튼을 매만졌다.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단 한 번도 친부에게 속한 적이 없었는데 독립이라니, 우스웠다.

인터뷰를 통해 그가 전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제가 일궈 낸 왕국을 태서가 탐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친부에게 나는 당신의 그늘에서 살며 말라 죽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 한 것이다.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주간지에서 재인과의 관계를 밝혀 그녀가 제 사람임을, 제가 그녀의 사람임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전혀 가볍지 않은 제 마음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저를 진창에 빠뜨리려 국내 언론을 이용할 게 분명한 친부의 수를 읽은 태서의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를 읽었다고 해서 태서가 강선 그룹 홍보팀에서 결혼을 발표하고 공식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것을, 혹은 언론이 기사를 퍼 나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보다 훨씬 월등한 힘과 경제력을 가진 친부에게 대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태서는 잘 알고 있었다.

강신재는 대한민국 시가 총액 1위 규모의 대기업 총수였고, 태서는 그저 계열사 중 하나인 강선 건설의 본부장일 뿐이다.

더군다나 태서가 한국에 들어와 생활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그는 홀로 강신재의 공격에 맞서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태서가 생각한 것은 외국 언론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인터뷰에 응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 인터뷰가 실린 주간지가 친부의 공격을 방어하는 용도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 발표보다 몇 시간 늦은 덕이기는 했지만, 주간지 발행일이 강선 그룹의 결혼 발표 날짜와 겹친 것은 우연이었다.


“벌써 준비 끝났어요?”

“응, 재인 씨는 천천히…….”

시계를 차고 뒤돌아본 태서가 그대로 멈췄다.

감싼 수건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막 씻고 나와 뽀얗고 말간 얼굴, 샤워 가운을 여며 쥔 손가락, 샤워 가운 아래 드러난 두 다리와 작은 발, 말랑해 보이는 발가락까지 진득하게 훑은 그의 시선이 다시금 위로 향했다.


 
가운 사이로 슬쩍 보이는 윗가슴 언저리의 붉은 흔적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도 그녀를 안고 뒹굴면서 남겨 놓은 것이었다.


“안 돼.”

재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안고 입 맞추려던 그는 당황했다. 재인이 한발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그를 향해 단호히 손을 내저은 탓이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야 하는지, 알죠? 절대 안 돼.”

“…….”

“안 돼. 꿈도 꾸지 마. 그 눈빛, 풀어요.”

스리피스 수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자마자 벗어 던질 생각이나 하는 음흉함을 들켜 버렸다.

태서가 알겠다는 듯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봐도 봐도 아름답다는 생각, 안고 싶다는 생각뿐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상태가 심각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라는 것을 태서 역시 알고 있었다. 연류동 본가에서 강신재 회장이 저와 재인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일찌감치 저를 버린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놓지 못했다. 늘 애정을 갈구하고 부친의 눈에 들기를 바랐던 그였다.

하지만 태서는 지난번 강신재와의 만남 이후로 저 혼자 미련스레 붙들고 있던 끈을 놓아 버렸다.

아버지에게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그 끈이 사실은 제 심장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끈을 잡아당기면 잡아당길수록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래서였다. 스스로 심장을 죈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만남은 특별할 것이다.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라고나 할까. 서로를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의 첫 만남이 될 테니.

쓰게 웃은 태서가 손을 내밀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든든한 제 아군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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