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언제 적 수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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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언제 적 수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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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언제 적 수법이야?
2022.12.10.
당황으로 물든 세르디스의 모습도 볼 만했다. 남주라 그런지 뭘 해도 극적으로 잘 보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네트. 결혼이라니?”
“어제 전하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미처 말씀 못 드렸어요.”
내가 쥐어 짜낸 방법은 결혼이었다.
결혼이야말로 유일한 도피처란 말을 누가 했더라.
그 말이야말로 명언이다.
결혼만이 남주를 끊어낼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아네트를 사랑하는 세르디스라도 결혼한다는 여자를 꼬실 만큼 쓰레기는 아닐 테니까.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받은 세르디스는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 한쪽을 애써 들어 올렸다.
“농담이지? 아네트……?”
“제가 왜 황자 전하께 농담을 하겠어요. 저희가 얼마나 깊은 사이라고…….”
“…….”
대답 없는 세르디스를 보며 나는 멋쩍게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베티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그녀를 향해 눈웃음쳤다.
또르르 눈알을 굴리던 베티가 울며 겨자 먹기로 "맞아요. 맞아."를 외치자 세르디스가 착잡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작에게 그런 말은 못 들었어.”
“급하게 정해진 결혼이거든요. 나이도 찼으니 더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요?”
“상대는……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겠죠?”
세르디스의 눈썹이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성인식을 치른 지 이제 막 한 해가 지났는데 성급한 거 아니야?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아뇨.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됐어요.”
“당황스럽네. 넌 원래 남자에 관심도 없었잖아.”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요.”
나는 서랍을 열어 한가득 쌓인 편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인 척하니,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반면에 난 오랜 편지 친구가 떠올라 되레 마음이 차분해졌다.
“전하께서도 좋은 분 만나시길 바랄게요.”
처량한 얼굴에 조금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서로 좋은 일이니까. 나는 안전해지고, 세르디스는 실컷 구를 구실 중 하나를 덜어내는 셈이다.
“믿을 수 없어…….”
작게 중얼거리는 말 정도는 가뿐히 무시했다.
나는 싱글벙글거리며 마카롱을 들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세르디스가 다급히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
아니나 다를까. 으득, 뭔가가 씹혔다. 동그랗고 딱딱한 걸 보니 반지였다. 고작 몇 번 만나 놓고 고백이라도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언제 적 수법이야.’
나는 입에서 반지를 꺼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마카롱 만들다가 파티시에가 결혼반지를 떨어트린 모양이에요.”
***
세르디스는 한참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다 황궁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가자마자 잠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향했다.
“아버지! 어머니!”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평화로운 르앙베리아 백작가에 쩌렁한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접실 안에 계신 어머니는 후원하는 어린 화가가 그림 그리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사랑꾼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책 너머로 보고 계셨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눠요.”
다급한 내 말에 화가를 포함해 세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어머니였다.
“아네트. 몸은 어떻니?”
“몸 완전히 멀쩡하구요. 약도 먹었구요. 아침 식사는 아직인데 일단 할 말이 급해서 왔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 요새 잠잠한가 싶었는데 밖에서 쓰러지다니. 큰일 날 뻔했잖니."
“앞으론 따뜻하게 입고 다닐게요. 신전에도 갈 거예요. 근데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우다다 쏟아지는 내 말에 아버지도 이상함을 느끼시곤 다가왔다.
“혹 황자 전하와 무슨 일 있었던 게야?”
“아주 관련 없진 않아요.”
“근데, 아네트. 오늘도 화장이 너무 짙구나.”
아파 보이는 인상을 가려보려 빨갛게 바른 입술을 보며 아버지가 핀잔을 주었다.
“아빠. 아니 아버지. 화장이 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 하나뿐인 딸 건강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뭘까?”
나는 완벽히 내 편인 아버지 팔짱을 꼬옥 꼈다.
이렇게 된 거 진짜 결혼해야겠다. 들통나는 것도 시간 문제니까. 확실하게 떼어 내려면 결혼 말고는 확실한 방법이 없었다.
결의를 다진 나는 두 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사람 한 명만 찾아주세요.”
진짜 결혼을 하려면 미끼가 필요했다. 부모님의 눈을 돌릴 미끼가.
하나 남은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에게 갑작스러운 결혼을 납득 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네트. 자세하게 말해 봐. 갑자기 누굴 찾아달라는 얘기냐.”
나는 방에서 가져온 편지 봉투를 꺼내 보여드렸다. 그곳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카시안?”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름 세 글자를 곱씹었다. 어머니는 이름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보셨다.
“이건 아네트 너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잖아.”
“네. 카시안을 찾아주세요.”
카시안.
이성 친구가 없는 걸 아시는 부모님을 설득 시킬 상대를 떠올리다, 나에게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인 그를 떠올렸다.
그는 오랜 시간 나와 편지를 주고받는 펜팔 친구였다. 단연코 이 세계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또래 남자. 물론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네트. 그쪽 가문에 연락을 넣어보면 되잖니.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며.”
“가문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카시안은 오라버니인 리안이 죽기 전, 제일 힘들었던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나를 위로해 준 사람이었다. 아카데미 신발장 안에 둔 정체 모를 편지. 몇 번은 무시했는데, 하루는 편지를 찢어 버리려다 우연히 내용을 보고 눈물이 흘렀다.
상투적인 위로가 아닌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은 편지였다. 그 뒤론 나도 모르게 그 편지를 기다렸다. 리안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그는 내게 좋은 친구로 남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얼굴도 가문도 모른 채 편지만 이어 나갔고. 어느새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문 이야기를 꺼리는 그에게 따로 정체를 묻지 않았기에 여태 정체도 모르고 살았다.
“안 찾겠다며. 이제 와 궁금해졌니?”
“이젠 만나야 할 것 같아서요.”
“흠.”
어머니가 팔짱을 끼고 눈을 도르르 굴렸다.
“카시안이라. 이름은 익숙하네.”
“세렌티나 가문의 둘째 이름이 카시안이었지. 아마.”
“맞아요. 세렌티나 가문. 근데 몇 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어요. 근데 이번에 빌버트 자작을 물려받은 사람도 카시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소.”
카시안은 그만큼 흔한 이름이었다.
부모님은 서로 머리를 싸매며 카시안이라는 이름을 떠올려보셨다. 나는 끙끙거리는 두 분에게 알고 있는 정보를 꺼냈다.
“저보다 2살 많아요. 문제는 마르카바 아카데미에 당시 그 학년에 카시안이 4명이나 있다는 거예요.”
편지로 묻진 않았지만, 3년이란 세월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에 대한 궁금증이 없을 리 없었다. 가문이라도 알고 싶어 아카데미에 문의를 넣었지만, 동명이인이 넷이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어머니 말대로 세렌티나를 빼면 셋.
“빌버트 자작가. 멜리센 남작가. 고호트 자작가라더라구요.”
“세 가문에 일일이 연락을 넣는 건 실례가 되는 일이고. 카시안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머니의 말에 나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마지막 편지가 도착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영지에 일이 생겨 당분간 바쁠 거란 말을 남겼지만 이렇게 오래 편지가 끊긴 건 처음이었다.
“연락이 닿질 않아요.”
초조하니 저절로 손가락이 입으로 올라갔다. 불안하면 손을 물어뜯는 버릇에 어머니가 따스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직 어리다니까. 친구랑 연락이 안 돼서 불안했구나.”
순수한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아버지도 곁에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번 알아보라고 할 테니 너무 걱정 마라. 아네트.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꾸나.”
“안 돼요. 느긋이 기다릴 수는 없어요.”
“다른 이유가 있는 게야?”
인자한 어머니의 미소에 나도 웃으며 해맑게 말했다.
“카시안이랑 결혼할 거거든요.”
그리고 막내딸의 이야기를 귀엽게 듣던 두 쌍의 시선이 그 한마디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다짜고짜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버지, 어머니도 제가 결혼하길 바라셨잖아요. 더 늦기 전에 시집가서 가정을 꾸려야죠.”
아버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곧장 깨닫고 당혹스러운 어투로 반문했다.
“상대가 어느 가문인지도 모르는 놈이랑 하겠다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준비한 말을 뱉었다.
“네. 얼굴 모르는 건 상관없어요. 정략결혼은 얼굴 모르는 상대랑 하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카시안은 저와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은 친구예요.”
“황자 전하는?”
황자라는 말에 세르디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젠 거부반응을 일으킬 것만 같은 그의 완벽한 외모가 떠오르자 입매가 빳빳이 굳었다.
“황자 전하는 제 짝이 아니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황자 전하와 데이트한다고 신나 했잖느냐. 새로 산 얇은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가 그 탈이 났고.”
그랬다. 어제까지만 해도 난 잘생긴 세르디스와 잘 될 생각에 가슴 두근거려 하던 소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미래를 몰랐으니까. 고작 잘못 만난 남자 하나로 가문이 망가질 예정이라는 걸 몰랐었으니까.
변경백과의 결혼.
그래. 나도 남자에 관심 없으니 상대가 누가 되었든 상관없다.
근데, 변경백과 결혼한 뒤 아네트는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가문은 모종의 이유로 몰락한다.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의 시체를 수도 광장에 떡 하니 걸어둔다.
따지고 보면 아네트는 악역도 아니고, 잘못은 본인이 해놓고서.
이제 내 몸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가족들이 다치는 건 보기 싫다. 빙의 전 오랜 시간을 외톨이로 지냈던 내게 따스한 품을 알게 해준 사람들이니까. 아들을 잃고 하나 남은 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기필코 남주를 떼어 놓아야 했다.
“오랜만에 외출해서 신난 거였어요. 황자님이 아니라.”
나는 곧바로 아버지의 말을 부정했다. 아버지는 웬만하면 대드는 일 없던 딸의 낯선 모습에 먹먹한 눈길을 보냈다.
“아네트. 어제 보니 황자 전하께서 널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더구나.”
역시나 세르디스와 나를 엮어주시려는 아버지의 말에 입 안이 텁텁해졌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시치미뗐다.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어요. 관심도 없구요.”
“자주 만나면 생각이 달라질 게야.”
“그럴 일을 없을 거예요.”
아버지는 초조한 표정으로 마른 입을 축였다.
당연히 그러실 테지.
결혼하겠다고 가져온 상대가,
빌버트 자작가.
고호트 자작가
멜리센 남작가.
이 중에 실속 있는 집안은 없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황자다. 즉위 서열 1위 황자.
딸이 황후가 될 수 있는데 어느 가문에서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도 세르디스 전하라면 안심이다. 우선 널 아끼고 사랑해줄 분인 건 틀림없어. 인품도 훌륭하시고.”
어머니도 달래듯 차분한 어조로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 전하가 싫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전하가 저를 배필로 삼는다고 하셔도 황궁에 갇혀 사는 건 끔찍할 거예요.”
“아네트. 혹시 황자님이랑 무슨 일 있었니?”
“아무 일 없었어요. 그냥 만나보니까 제 짝은 아니다 싶었을 뿐이에요.”
진저리가 쳐진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세르디스가 싫어 죽겠다는 듯이. 하지만 아버지는 딸 마음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렴. 가볍게 만나보기라도 해 봐. 만나다 보면 상대가 좋아지기 마련이야. 나랑 백작님도 그랬는걸.”
“황궁에는 수준 높은 황실 의원들이 상주해 있어서 안심이기도 하고. 황족이 되면 지금처럼 힘들게 신전에 가지 않아도 치료받을 수 있단다. 아네트.”
또, 치료 얘기.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라고 아비가 누누이 말했지? 결혼하고 나서도 너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늘 푸근한 낯으로 말을 걸던 아버지가 목소리를 나직이 깔았다. 흘려듣지 말라는 뜻이었다.
‘언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해지라더니.’
딸자식 생각하는 부모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세르디스와의 결혼이 뭘 뜻하는지도 모르시면서.
“싫어요. 저는 곧 죽어도 카시안이랑 결혼할 거예요.”
나는 그대로 양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아네트.”
“여보. 나중에 진정되면 다시 얘기해요.”
하지만.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누가 있다던가?
손으로 가린 눈엔 눈물 대신 강렬한 열의가 타올랐다.
엄마. 아빠. 죄송해요.
세르디스는 절대 안 만날 거지만,
‘카시안이랑 결혼도 안 할게요.’
카시안은 그저 앞으로 저지를 일에 대한 밑밥이었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