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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남주가 미쳤어요! (5/79)


5화 남주가 미쳤어요!
2022.12.17.


비올렛을 연회에 보낸 나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올렛의 긴 드레스를 입고 겨우 도착한 곳은 연회장 내 구석진 테라스.

정보 길드에 미리 언질을 해두었다.

남편감이 될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허구한 날 세르디스가 찾아오는 바람에 약속은커녕 외출조차 쉽지 않았다. 영식들을 은밀히 만날 장소는 연회뿐이었다. 가문에서도 주요 보호 대상이기 때문에 의뢰도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연회는 내게 절호의 기회였다.

빠른 시일 내에 결혼을 치를 수 있길 바라며 테라스 문을 열었다. 고요한 가운데 울리는 문소리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어떤 사람일까?’

계약이긴 하지만, 남편이 될 사람이니 마음이 잘 맞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테라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나는 연회장으로 돌아가 재차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가 맞는데?”

정보 길드에서 전달해 준 쪽지를 봐도 이 장소가 맞다.


“누구 계세요?”

하지만 테라스 안엔, 내 구두굽 소리와 가을 벌레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뭐지? 제대로 전달이 안 됐나.

분명 그쪽에서 수락했다고 했는데.


“우욱! 우우욱……!”

테라스를 둘러보고 있던 그때, 난간 너머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잠깐 고민하다 곧이어 난간으로 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깥은 우거진 수풀뿐이었다.

하지만 재차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풀이 스치는 바스락 소리가 들리자 의심이 조금 들었다.


“혹시 영식?”

발이 미끄러져 빠진 건 아닐까 하는.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두 눈을 끔뻑거려 보았지만, 수풀에 사람 흔적은 없었다.

그래. 저기 왜 영식이 있겠어.

나는 그만 시선을 거두고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십 분이 넘게 흐르자 불안함이 인내심을 바닥냈다.


“안 되겠다. 우선 딴 사람을 찾아가야지.”

마냥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땐, 마지막 곡이 시작하고 파트너가 있는 영애와 영식이 모두 나와 신나는 곡에 맞춰 춤을 추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을 비집고 나와 두 번째 장소인 황실 정원으로 향했다.


“뭐야. 이번에도 없어?”

인영은 보이지 않고, 붉은 장미만이 아름답게 만개한 황실 정원을 바라보았다.

허탈감이 밀려왔다.

기껏 부모님까지 속여가면서 마련한 자리였다. 매일 들이닥치는 세르디스의 눈을 피해 어렵게 만들어낸 약속이기도 했다.


“기다리면 올 거야.”

만약 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가 길드 본부로 직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인기척이 들렸다.


“찾았다.”

여기서 보기로 한 영식은 어디 가고 가장 여기 있어선 안 될 사람이 나타났다.

세르디스. 이 껌딱지 같은 놈이,


“여기 왜…….”

나타나서 내 앞길을 막을까.


“아네트. 널 따라왔지.”

그가 숨을 거칠게 터트렸다.

나오기 전에 비올렛과 춤을 추고 있는 걸 확인했건만, 거기에 안심했던 내 탓이었다.


“혼자 여기서 뭐 하려고.”

너 때문에 남편 구하러 왔다. 라고 빼액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건데 추워서 다시 들어가려구요.”

밤의 찬 공기만큼이나 서늘하게 대꾸했다. 싫은 티를 냈음에도 세르디스는 달리 해석했다.


“역시 말로는 거부했지만, 나 기다린 거 맞지? 여긴 그때 우리 둘이 얘기했던 정원이잖아.”

세르디스의 두 볼이 복숭아처럼 물들었다.


“그때처럼 밤새 이야기하자.”

세르디스가 숨을 고르며 하얀 장갑을 거칠게 벗고는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의 손이 거침없이 나에게로 뻗어왔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멋대로 해석하고 오해 말아 주세요.”

그의 부름을 거부하듯 잘랐다. 정원을 한번 살펴보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그가 품 안으로 나를 잡아끈 것은.


“아악!”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이 닿기 직전, 나는 위험을 감지한 내가 있는 힘껏 발버둥쳤다.


“아네트. 많이 놀랐어?”

악을 지르니 세르디스는 쉽게 나를 풀어주었다. 가뜩이나 계속 집착해서 미치겠는데, 다짜고짜 들어오는 손길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전하. 저한테 도대체 왜 이러세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난 심각한데 세르디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환히 웃었다.


“네가 계속 도망가니까 그렇잖아.”

“저희는 그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일 뿐이에요. 더도 덜도 말구요. 그 이상의 관계를 전 바라지도 않아요. 다 싫어요.”

단호하게 밀어내고 도망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원작에서 나온 남주, 내가 아카데미에서 봐왔던 세르디스랑은 다른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네트. 네가 자꾸 튕기기만 하니까 안달 나는 걸 어떡해."

"……."

"이제 너 없으면, 나 죽을지도 몰라.”

그렇다.

아무래도 원작에서 하차하려는 게 큰 잘못이었나 보다.

남주가 미친 걸 보면.

세르디스의 반쯤 뒤집힌 눈알을 보고 뒤죽박죽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남주가 아니다. 남주가 아니라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 미쳐 안달 난 사람이었다. 손발이 달달 떨렸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리 가…….”

“그만 튕기고 나한테 와. 네가 나 몰래 정보 길드에서 남편감을 구하는 거 다 아니까 괜히 고생하지 말고.”

순간 숨이 콱 막혔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지?


“백작과 네 말이 다를 때부터 이상해서 알아봤더니 금방 나오더라고.”

“제 뒷조사를 하다니…….”

“다 너를 원하는 마음에서였어. 내 마음은 순수해.”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불안함을 가득 담은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가 이제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네트.”

가라앉은 음성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소름이 쭉 끼쳤다. 기어코 코앞까지 다가온 세르디스가 대뜸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훑었다.


“뭐 하시는……!”

“네가 수녀원에 가지 못하도록, 아니 평생 내 옆에서 숨 쉴 수 있도록 여기서 너를 가지면 되지 않을까?”

세르디스 곁에서 편안해졌던 몸은 더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이해해줄 거지? 내가 그래도?”

그는 진심이었다.

나는 점점 다가오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평범 축에도 속하지 못하는 내 몸으로 거대한 성인 남자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세르디스의 매끈한 턱이 살짝 기울어지고 손이 단단하게 나를 감쌌다. 밀착된 몸에서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빠르고 반복적으로 울렸다.


“제발…… 이러지 말라구요!”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이제 그만 튕겨.”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한다고요…….”

기어코 터져 나온 눈물이 주체 없이 흘렀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때.

깡!

거대한 벽이었던 세르디스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달빛에 등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내뱉었다.


 


"당장 도망치십시오."

벼랑 끝에 선 내게 다가온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이 멈춘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남자가 큰 소리를 내었다.


"얼른!"

그 목소리에 얼어붙은 몸이 겨우 움직였다. 혼비백산이 되어 뛰느라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겨를은 없었다. 그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눈앞에 황실의 높다란 입구가 보였다. 주변엔 가문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눈을 쓱쓱 비벼보아도 백작가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을 여유는 없었다. 세르디스가 언제 어디서 쫓아올지 모르니까. 결국 나는 맨몸으로 황궁을 나섰다.

***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

뚝, 구두 굽이 부러지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까만 어둠이 내린 거리. 고요함 속에 거친 내 숨소리만 퍼졌다.

조금만 더 가면 마차 대여소가 있었다. 그렇지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갔다가 세르디스가 있으면?’

짧은 고민 끝에 저택으로도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저 끝. 사람 소리가 들리는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술집 거리였다. 유쾌한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더는 못 걷겠어.’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묻었다. 까만 시야로 보기 싫은 얼굴이 떠오르려 했다. 나는 벅벅 드레스에 얼굴을 비비며 도리질 쳤다.

그때.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퍽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합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내는 방금 전, 날 구해준 사람과 비슷해 보였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투박한 망토 안에 갑주가 보였다.

용병인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아, 경비대구나.

이 새벽에 귀족 영애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걸 보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나는 부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어딜 데려다준다는 거예요?”

“여기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 가야 합니다.”

그의 시선 끝에 마차가 한 대 보였다. 나는 잡힌 손을 뿌리쳤다. 살짝 그러쥔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집은 싫어요. 오늘은 밖에 있다가 들어갈 거예요.”

“그럼 영애께서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

말할 힘도 없어진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늦은 밤인데도 마법 덕에 간판이 환하게 비친 낯선 공간이었다. 잠시 번쩍거리는 간판 불빛에 빼앗긴 시선을 돌렸다.


“안전한 곳이 카지노예요?”

“그렇습니다.”

남자는 담백하게 말하고 앞장서 들어갔다.


‘진짜 경비대 맞아?’

카지노에 데리고 오다니. 하지만 의문은 길게 가지 않았다. 내겐 사소한 문제로 고민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카지노는 영애들도 심심치 않게 이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도박이라는 특성상 꺼림직한 느낌은 완전히 지우기 어려워 와본 적은 없었다.

붉은 천막을 걷고 카지노 안으로 들어서자,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한 공간으로 넓게 트여 있는 카지노 내부는 전체가 금칠이 되어 있었다.

바닥은 도박에 방해되지 않게 만든 벨벳 시트라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시선을 빼앗는 건 갖가지 섹션에 위치한 게임들.


“다 연회 갔지. 참.”

다만, 붐벼야 할 카지노엔 아무도 없었다.

각 게임기 앞에 로봇처럼 서 있는 딜러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난 뛰느라 퉁퉁 부은 다리에 불편한 드레스를 끌고 근처 게임 앞에 섰다. 나를 여기로 데려온 남자는 친히 의자를 빼주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남자는 나를 앉혀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앞에 있는 룰렛 게임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돌아온 그가 담요를 크게 펼쳤다.


“덮어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키가 훤칠했다. 그리고 어두운 밖에서 보지 못했던 외모는 저절로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망토로 숨겨지지 않는 탄탄한 잔근육.

햇볕 아래 하나도 타지 않은 뽀얀 얼굴.

그와 대비되는 까만 머리카락은 이질감 하나 없이 완벽히 잘 어울렸다.


‘잘생긴 경비대네.’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잘생긴 남자에게 치이고 온 나에게 남자는 이제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따뜻하고 안온한 감각이 금세 몸을 데웠다.


“따뜻하다.”

“마법이 걸린 담요입니다. 차도 드십시오.”

큰돈이 오가는 곳이라 그런가. 비싼 마법이 널린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몽환적인 분위기도 들고.


“이것도 마법인가요?”

“그렇습니다.”

언제 끓였는지 모를 차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향긋한 캐모마일 향.

안정된다. 나는 눈을 감고 차향을 맡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좋아하는 차예요.”

“다행입니다.”

그는 생긴 것과 다르게 다정했다.

나긋나긋한 그의 말투는 어딘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방금까지 내게 벌어진 일이 조금 옅어질 만큼.

나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빨간색과 하얀색이 번갈아 그려진 룰렛 게임판 속 쇠구슬이 반짝거렸다.


“인생도 게임이어서 다시 리셋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랬다면 조금도 엮이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말하긴 민망한 일이에요.”

나는 따뜻한 찻잔을 매만지며 어물거렸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털어놓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몇 분간 정적이 흘렀다. 차를 한잔 다 비우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저도 요새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저 위로로 건네는 말 같았다.


“……그렇군요.”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뒤이어 말했다.


“영애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사정이 생겨 결혼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내게 딱 필요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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