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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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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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당신의 아내가 될게요
2022.12.21.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귀를 의심했다.
“결혼 상대를 구하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멍했던 머리가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혼을 하긴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필요에 의한 결혼이라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상대를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 남자. 나랑 똑같은 상황이잖아?
“영애께서 같이 심각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곧 괜찮은 상대가 나타나겠죠.”
그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곧 안개가 개인 듯 머릿속이 맑아졌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이거야말로 신이 마지막으로 내게 준 기회가 아닐까?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지금 이 남자를 놓치지 말라고.
나는 입술을 한 번 축이고 질문했다.
“당신 귀족이죠?”
경비대는 기사가 되기엔 실력이 부족한 귀족가 영식들이 종종 지원하곤 한다. 귀족은 주로 관리자 이상급이었다. 그를 보아하니 말단 경비병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준 남작 이상.
“맞습니다.”
역시 맞았어.
평민이 아니라면 거리낄 게 없었다.
“그 상대 제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네?”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당신 아내가 되어드리겠다고요. 만약 필요한 조건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뭐든 자신 있으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줄 아십니까?”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알다 마다요. 당신이 필요할 때까지 당신 아내가 될게요.”
***
아네트의 시선 끝에 머무른 남자, 헤르티안은 또랑또랑하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 터져나오려던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내가 되어주겠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그녀에게서 들은 말이다. 사실은 얻어낸 말이기도 했다. 아네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서 한 말이니까.
헤르티안은 아네트가 의심하지 않도록 연기했다.
“갑자기 아내가 되어주신다니…… 당황스럽습니다.”
“당황하실 것 없어요. 저도 실은 남편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제게 청혼하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묻은 향기를 실컷 들이켜고 싶었지만, 그는 참아냈다.
아네트가 쳐놓은 선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 매섭게 내치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신 다른 방식으로 욕구를 채우기로 했다.
“아닙니다. 영애께 부담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는 곤란한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아네트가 단순히 결혼이 아니라, 자신과의 결혼을 진짜 원하도록.
“아니…… 뭐 하러 굳이 멀리 찾아요. 제가 해준다니까.”
“오늘 처음 본 분께 짐을 지울 순 없습니다.”
“저도 괜찮다니까요.”
“괜찮대도 억지로 하는 결혼이잖습니까. 제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헤르티안은 한사코 그녀를 거부했다.
결국 참다못한 아네트가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빚 아니라고요! 저도 아주 간절히 남편감을 찾고 있었다고요. 오늘도 얼마나 허탕을 치고…… 아니, 아무튼 제게도 당신이 필요하다고요.”
그녀의 솔직함과 당돌함은 편지 속에서도 충분히 느꼈지만, 직접 마주하니 느낌이 달랐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줘요. 당신.”
결국 원하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헤르티안은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세운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이번 전쟁을 마치면 그녀에게 청혼하겠다고 다짐한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다. 정확히는 어이없게 성공한 셈이다.
“잠시만요.”
게다가 아네트는 행여나 거절당할까, 급하게 딜러 칸에 있는 빨간 칩을 하나 잡아다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뭡니까?”
“당신한테 정식으로 청혼할게요. 당장은 결혼반지가 없으니까 그게 우리 결혼의 증표예요.”
헤르티안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칩 하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실웃음이 번졌다. 아네트는 그게 장난인 줄 알고 다급하게 덧붙였다.
“장난 아닌데요? 누구보다 진심으로 청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빼도 박도…… 못 하는 거예요.”
칩으로 청혼하는 주제에 당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달리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오랜 시간 찬 공기를 마신 탓이다. 낌새를 눈치챈 헤르티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괜찮으십니까?”
“……대답부터 해주세요. 저랑 결혼할 건지.”
아네트는 곧 끊어질 정신 줄을 간신히 붙잡고 집요하게 물었다.
“얼른이요. 저 지금 꼴은 이래 보여도 집에 돈도 많고…… 막장 집안도 아니고…… 원하면 투명 인간 취급해도 좋아요.”
그녀의 눈이 반쯤 감겼다.
“영애…….”
“대답.”
헤르티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약속 꼭 지켜요.”
“영애께서도 무르기 없습니다.”
“……물론이죠.”
그 대답을 끝으로 아네트의 가녀린 몸이 무너져 내렸다.
“영애!”
헤르티안이 급히 아네트의 허리를 잡았지만, 이미 그녀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결혼 상대를 찾아서일까. 눈꺼풀을 감은 모습은 여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상대가 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던 카시안이라는 것도 모르고.
***
아네트가 피곤에 쓰러져 잠이 든 방.
바로 위에 위치한 카지노 꼭대기 층.
오랜 시간 비어 있던 카지노 주인의 방엔 기꺼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블란디체 헤르티안.
2년간의 긴 전쟁을 끝마치고 그가 드디어 완벽히 돌아왔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손에 들러붙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 검을 드디어 놓았건만, 헤르티안에겐 잠시의 휴식도 사치였다.
헤르티안은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수히 쌓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뒤늦게 도착한 헤르티안의 수하인 오센은 보고하려다 말고, 피부에 느껴지는 후끈한 열감에 미간을 찡그렸다.
“지휘관님.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헤르티안이 대공 작위를 물려받자마자 전쟁터로 나가는 바람에 그를 지휘관이라고 부르는 게 입에 붙은 오센이었다.
“오센. 826년도 편지 좀 가져와.”
주인이 편지를 붙들고 있는 모습은 그에게 있어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센은 전쟁터에서도 헤르티안이 제 목숨보다 중요히 여긴 편지 상자를 가져왔다.
“몇 월달 걸로 드리면 됩니까?”
“연두색으로 전부.”
오센은 열기 때문에 뿌예진 안경을 닦곤, 상자를 열어 연두색 편지 봉투를 모두 끄집어냈다.
아네트는 항상 계절이 바뀔 때면 편지 봉투를 다르게 보냈다.
싱그러운 봄엔 연두색.
여름엔 파란색.
가을엔 주황색.
겨울엔 흰색을.
이 사실을 헤르티안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몇 년을 전쟁터에서 편지만 기다리는 주인을 보고 저절로 알아차렸다.
“여기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시 정리해두고. 보고해.”
헤르티안은 새로이 편지 봉투를 열며, 오센에게 손짓했다. 오센은 뿌옇게 김이 오른 안경을 고치며 자세 또한 바로 잡았다.
“르앙베리아 영애께서 만나기로 한 에블린과 킨타는 그 전에 모두 처리했습니다.”
“수고했어.”
오센은 그런 주인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전쟁터에서 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세워둔 계획이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지휘관님. 편지 읽으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하다만 수도에 도착하고 나면 새로운 계획대로 움직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계획이 필요 없어졌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르앙베리아 영애를 포기?
오랜만에 만난 영애가 달라 보였다거나 그런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외모야 사교계에서 내로라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기는 하나, 편지만 주고받은 세월이 길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오랜 계획이 흐려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센.”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주인이 이런 음성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 전쟁에서 사람을 죽였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꿀꺽.
오센은 확신했다.
정말 이대로 포기한 거라고.
“저는 지휘관님 의견을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평생 홀로 블란디체를 이끄신다 해도…….”
“당장 결혼식 준비해.”
“예?”
오센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네트가 내게 청혼했어.”
“예에-?”
필히 전쟁터에서 쌓인 귀지가 딱딱해져 귀를 틀어막고 있는 걸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적 같은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네가 알려준 방법이 먹힌 모양이야.”
헤르티안이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주인의 손가락 끝엔 희미한 주홍빛 물이 들어 있었다.
동시에 오센의 얼굴도 충격으로 물들었다.
‘설마 봉숭아 꽃잎을 빻아서 손톱을 물들이셨던 거야?’
전쟁통에 본 봉숭아꽃을 보고 주인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 꽃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첫눈이 올 때까지 색이 빠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
근데 그걸 전쟁귀를 넘어 전쟁광이라 불리는 주인이 하고 있을 줄이야.
수천의 피가 묻은 손에 꽃물이 들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기나 할까.
“멍때리지 말고. 시간 없으니 황제부터 만나겠다.”
“황제 폐하요?”
오센은 여러모로 놀라는 중이었다.
결혼에 이어 꺼리던 황제를 직접 만나겠다니.
“정말 폐하를 만나실 겁니까?”
“그래. 이제 도망자 노릇은 그만해야지.”
***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집이었다. 그것도 해가 중천에 뜬 시간.
“아네트!”
엄마의 날 선 목소리가 몽롱하던 정신을 깨웠다.
“연회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엄마 목소리가 귀에 웅웅 울렸다.
‘나 어떻게 집에 온 거지?’
세르디스에게서 도망쳐 나와 거리를 떠돌다가 잘생긴 경비대를 만났고,
카지노에서 쉬다가 결혼을…….
“엄마! 저 어떻게 집에 돌아온 거예요?”
미쳤다.
나 남편 생겼지?
“경비대가 데려다줬어. 드레스엔 흙이 잔뜩 묻어선……. 그러고 보니까 어제 입고 온 드레스는 누구 거였니?”
“경비대. 그 경비대 지금 어디 있어요?”
나는 번쩍 일어나 다짜고짜 캐물었다.
내 마지막 희망.
그 남자가 있어야 위험 부담 없이 원작을 피한다.
“아네트. 너 엄마 말 무시하고 자꾸 엉뚱한 소리 할래? 경비대니까 경비대로 돌아갔겠지.”
“나중에 다 설명해 드릴게요!”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네트!”
쾅!
문이 세게 닫혔다.
급히 덧붙였다.
“일부러 문 세게 닫은 거 아니에요. 실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