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달링이라고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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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달링이라고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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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달링이라고 불러 주세요
2023.01.04.
블란디체 헤르티안.
내가 아는 그의 이력은 이러하다.
헤르티안은 황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하지만, 평민 출신인 비천한 외가를 등에 지고 황자라는 신분으로 황궁에서 살아남긴 어려웠다. 게다가 그가 무예에 뚜렷한 두각을 드러내니 더욱더.
날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세르디스의 모친인 황후는 헤르티안의 존재 자체도 거슬려 했다.
결국 독살 사건이 터진 이후로 헤르티안은 대공령에서 황제의 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 거대한 기사단을 이끄는 장군이기도 했던 대공은 특히 조카를 아꼈다.
그래서 몇 해 전, 그가 지병으로 사망할 때 대공 자리를 선뜻 내어주었다.
하지만 대공이라는 그늘이 사라진 헤르티안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도래했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그를 전쟁터로 보냈다. 첫 전쟁은 그가 작위를 얻은 후 불과 일주일도 안 된 시점이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여기까지가 나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는 대공에 대한 이야기.
사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다.
다만, 특이 사항이 한 가지 있다면.
그가…… 무성욕자라는 사실이다.
‘이건 확실하게 기억하지.’
황제가 죽은 뒤, 세르디스가 황제에 오르기 직전 헤르티안의 등장을.
헤르티안은 대공비를 들이지 않아 황좌를 넘보지도 못했다. 반면에 세르디스는 아네트와 헤어지고 여러 여자들을 만나 자신만의 세력과 권력을 만들어 놓는다.
대공가의 가신들은 대공비를 들여 세력이라도 넓히라고 하지만 그는 권력에도, 여자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가신들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 뿐.
그 뒤론 질질 짜는 남주가 지겨워 대충 넘겨보았기에, 훗날 대공이 어떤 완결을 맞게 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중요한 건 그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
꼭 그를 붙잡아야 했다.
“대공 전하. 다시 한번 확인해요. 저랑 결혼 무르기는 없어요.”
나는 저택 후원을 휙휙 둘러보다, 헤르티안에게 조용히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대공도 나와 마찬가지로 허울뿐인 짝이 필요하단 사실이다. 그래야 가신들이 대공비를 들이라고 재촉하지 않을 테고.
“깔끔해서 좋네요.”
결혼할 남자가 무성욕자라니.
예상치 못하게 굴러들어 온 복덩이에 튀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남자에 관심 없는 나와 여자에 관심 없는 대공.
완벽해.
정말 완벽한 파트너야.
그의 비밀은 철저하게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결혼 후엔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요. 물론이죠. 저는 절대 전하의 사생활을 터치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저와 전하는 그래! 전우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전우…… 그 호칭은 마음에 안 드는군요. 전하도 마찬가지고. 영애의 말대로 부부가 된 사이니 다르게 불러주십시오.”
그가 이성애가 없단 걸 알아서 그런지 대공인 걸 알았음에도 대화가 편하게 느껴졌다.
“원하시는 호칭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무조건 그리 불러드릴게요.”
그쯤이야 무조건 맞춰줘야지.
잘생긴 대공을 보면서 방긋방긋 웃었다. 함께 살면서 숨겨둔 애인이 누군지 찾는 것도 묘미겠다.
“영애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만 딱딱하게만 부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도 동감이에요. 그럼 이건 어때요. ‘달링’이라고 부르는 거.”
이왕 서로 연기를 해야 하는 거면 자극적이고 끈적한 게 좋겠지.
세르디스를 떨쳐내려면 그가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달링이 제일 좋겠다.
“달링?”
“네. 달링 아니면 허니.”
대공은 당황스럽겠지만.
“마음에 듭니다. 영애. 아니면 저도 달링이라고 부를까요?”
예상과 달리 그는 조금의 당황스러운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거워 보이기도.
“우리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는데요?”
“동감입니다.”
뻔뻔한 그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 몇 번 보지 않은 사이인데도 대화가 막힘이 없고 편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후원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나무 위로 하얀 꽃잎으로 가득 찬 가지가 보였다. 어릴 적, 아버지가 사절로 갔다가 가져온 조팝나무였다. 나는 가지로 손가락을 뻗었다.
“이 꽃 본 적 있어요?”
“전쟁터에서 본 적 있습니다.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헤르티안도 저랑 똑같네요.”
평상시엔 대공을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특별 애칭은 필요한 순간에만 쓰기로 하고 넣어두었다.
“저는 이 꽃이 그렇게 좋아요.”
“저도 좋아합니다. 봄에 맞는 눈 같아서.”
무성히 핀 하얀 꽃을 올려다보는 헤르티안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저도. 눈도 아닌 게 눈처럼 내리는데 사라지지 않아서 더 좋아요.”
조팝꽃을 좋아하는 나와 이유가 같아서.
추운 겨울이면 병세가 심각해져 가족들이 나를 저택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펑펑 흩날리는 눈을 매번 멀찍이서 바라만 봐야 했다.
‘내가 눈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기에 눈처럼 하얀 꽃잎은 나에겐 겨울에 밖에서 뛰어노는 듯한 기분을 대신 느끼게 해준 존재였다.
“신기하네요. 이 나무를 보면서 그런 얘기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리고 나 또한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었다.
딱 한 사람한테 빼고.
“혹시.”
나는 나보다 키가 훨씬 큰 헤르티안을 올려다보며 눈을 샐쭉하게 떴다.
“카시안?”
오랜 편지 친구인 카시안.
그에게는 봄만 되면 조팝나무 가지를 보내며 말해왔었다.
“헤르티안이 카시안이에요?”
카시안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동안의 봄이 떠올라, 아닌 걸 알면서도 물었다.
전쟁터를 누비던 대공이 알록달록한 종이에 편지를 보내던 카시안일 리가 없지.
하지만 헤르티안은 내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었다.
“장난이에요.”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팔을 꼬집었다. 살짝 잡았을 뿐인데. 몸이 움찔거리며 거부하듯 튕겨냈다.
‘내가 만져서 불쾌했나?’
그는 자리에 우뚝 선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헤르티안?”
이름을 부르자, 그의 잘 빠진 목울대가 아래로 꿀꺽 움직였다.
맹수 같은 목덜미를 보고 바로 사과했다.
“마음대로 만져서 미안해요.”
무성욕이랑 여자를 싫어하는 거랑은 별개라고 하던데, 아예 닿는 것도 싫어하나.
“앞으로는 닿지 않게 조심할게요.”
헤르티안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그랬습니다.”
그리 말하곤 제 팔을 내게 가져다 댔다. 더 꼬집어 달란 듯이. 그러나 이내 손을 다시 내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 만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왜요?”
“기분이 이상하거든요.”
닿는 걸 싫어하는 게 확실했다. 나는 되레 그의 솔직한 모습에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대공님은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남자에게서 이런 안온함을 느낀 건 처음이다.
나를 절대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런가.
저벅저벅 아무 대화 없이 마당을 걷는 이 순간도 평화로웠다.
“근데 카시안은 누굽니까?”
한참 걸어가고 나서 그가 물었다.
“얼굴 모르는 제 친구예요. 편지만 주고받는 사이거든요.”
나는 카시안을 그리 설명했다.
“친합니까?”
“네. 아주 친해요."
그는 나와 진짜 부부가 아니기에 솔직하게 얘기했다.
사생활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카시안과 편지를 주고받는 걸 뭐라 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는 카시안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영애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보니.
***
“갑자기 아네트를 시집보내게 생겼네요.”
헤르티안을 덜컥 사위로 맞이하게 된 백작 부부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유리정원으로 향했다.
아네트와 대공 두 사람이 할 이야기가 있어 보여, 자리를 비켜주었다.
백작 부부 또한 서로 헤르티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실내 정원에 들어서자 향긋한 꽃 내음이 풍겼다.
“오늘 대공을 처음 뵙는데, 사람이 나쁘지 않은 것 같소.”
“저도 그래요. 아네트 말대로 멋진 데다가 상냥하기까지 하잖아요. 우리 딸한테 잘해줄 것 같아요.”
백작 부인, 슈웰리의 말에 루카스 또한 걱정이 가신 표정으로 공감을 표했다.
아네트가 연회를 빠져나가 외박하고 난 이후 표정이 좋지 않아 걱정이었다. 갑자기 경비대에 가질 않나, 저택 입구에서 우체부를 기다리질 않나.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그게 모두 대공을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대공이 청혼서를 들고 오니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서 폴짝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아네트가 그렇게 적극적인 아이인 줄 몰랐소.”
“저도 그래요. 후후. 얼마나 귀엽던지. 아네트가 첫눈에 반했다고 할 때 대공님 얼굴 보셨어요?”
슈웰리는 아까 일을 떠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대공님 귀가 새빨개져선 아네트보다 대공님이 더 귀여우시더라니까요.”
제삼자의 눈으로 본 헤르티안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사내였다.
최근 아네트가 결혼에 집착증세를 보여서 이유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직접 두 사람을 만나보니 알 것 같았다.
“두 사람. 꼭 옛날에 저희 보는 것 같지 않아요?”
첫눈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사랑.
콩깍지가 씐 채로 주변도 안 보이는 그런 상태인 듯했다.
“우리가 언제 저랬소. 적어도 난 약속을 잡고 정중히 찾아뵈었소.”
루카스는 점잖은 척 턱을 쓸었다.
“어머. 저는 대공님처럼 화끈한 게 더 좋은데. 아마 당신이 날 바로 찾아왔다면 저도 튕기지 않았을걸요.”
그녀가 맞받아치며 총총 앞서 나갔다.
“부인 너무한 거 아니오!”
그 뒤를 루카스가 따라잡으며 오랜만에 두 사람은 옛 시절로 돌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대공께서 부인의 마음을 단단히 홀렸나 보오.”
“너무 들떴죠? 우리 예쁜 딸 드레스 입힐 걸 생각하니까 행복해서 그래요.”
활짝 웃은 슈웰리의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루카스도 울컥해 부인의 어깨를 감싸 안으니 유리문 밖에서 숨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