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넌 몰라, 짝사랑의 아픔을 (15/79)


15화 넌 몰라, 짝사랑의 아픔을
2023.01.21.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악몽을 꾸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다. 굳이 싫은 꿈을 기억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전하답지 않았습니다.”

“넌 몰라, 오센.”

익숙한 남자 목소리.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가 날 구해준 건가?

눈을 뜨려고 힘을 주었다. 눈꺼풀에 덕지덕지 붙은 눈물 자국 때문에 눈 주변이 따가웠다.

곧 밝아진 시야로 두 사람이 보였다.


“제가 뭘 모릅니까?”

“……아픔을.”

띵- 하고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꽤 사나웠다.


“아아…….”

다시 눈을 감은 채 귀를 틀어막았다.


“영애!”

남자의 손이 단단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와 닿자마자 이명은 씻은 듯이 나았다. 나는 손을 떼고 눈을 떴다.


“대공 전하?”

헤르티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전하가…… 여기 왜 있으시죠?”

천천히 기억이 돌아왔다.

헤르티안에게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며 부모님께서 편지를 보냈고, 나는 에드워드와 데이트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근데, 왜 여기 헤르티안이 있는 거지?


“헤르티안이 절 구해준 건가요?”

기억이 흐릿했다.

호수에서 에드워드를 기다렸고, 누군가 배에 올라탄 것까진 기억하는데.

그게 에드워드가 아니라 헤르티안이었나?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가 제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침대맡 의자에 앉아 나를 자세히 살폈다. 뜨거운 시선이었지만, 에드워드처럼 불편하진 않았다.


“아니에요. 조금 쉬면 나을 거예요.”

“제 눈앞에서 기절까지 했는데 어떻게 쉬면 낫는다는 말입니까.”

“원래 몸이 약해서 그래요. 피곤한 데다가 오랜만에 물가에 나와서 그랬나 봐요.”

나는 나보다 더 놀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차분히 설명했다. 그는 내 옆에 꿇어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게 읊조렸다.


“영애는 물을 싫어하셨었죠.”

해준 적 없는 이야기를.


“제가 그런 얘기를 한 적 있던가요?”

내 기억으론 없었다.

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건 가족을 제외하고 극소수였으니까.


“-라고 추측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피곤해도 기절하진 않으니 말입니다.”

헤르티안이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국어는 끝까지 들어보셔야 합니다.”

나는 어물쩍 넘기는 태도가 이상해 보였지만, 찝찝함을 뒤로하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헤르티안은 제가 보낸 편지를 보고 찾아오신 건가요?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줄 아셨죠?”

그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광장 앞 분수대였다. 아무리 마부가 빨리 전달했다 한들 찾아오기까지는 한 시간은 걸렸을 텐데.


“실은 결혼을 취소하겠단 편지를 받고 저택으로 찾아가려다, 여기 있단 걸 알게 되어 방향을 틀었습니다.”

“죄송해요. 먼저 결혼을 부탁해놓고 제대로 허락받지 못해서.”

그러면서도 헤르티안의 움직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나를 천천히 일으켜 병실 침대맡에 조심히 앉혔다.


“고마워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아 그를 불렀다.


“헤르티안.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어요.”

“무엇입니까.”

헤르티안도 내가 만나자고 한 이유가 궁금한지 나에게 집중했다.


“아버지가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저와 전하의 결혼을 반대하고 계세요.”

나는 그에게 숨김없이 말하고 싶었다. 한 편이 될 사이니까.


“그래서 갑자기 거절하셨던 거군요. 제 탓입니다. 제가 전쟁 귀라는 소문이 있으니 백작이 싫어할 만도 합니다.”

“아니요. 전하의 여자관계가 복잡하다고 거절하셨어요.”

헤르티안의 얼굴이 서서히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건 옆에 서 있는 그의 부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하지.

여자에겐 털끝만큼도 관심 없는 사람인데. 역시 원작의 내용에서 달라진 건 없는 거였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한 박자 늦게 부정했다. 착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전하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죠.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저는 상관없어요. 훗날 정부를 들인다고 하셔도 상관없고요.”

나는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기분이 상한 그가 계약을 무르지 않도록.


“정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누가 그런 소문을 냈는지 몰라도 저와는 전혀 사실과 무관합니다.”

“맞습니다! 지휘관님은 전쟁터에서 여자는커녕 사슴 암놈도 사냥하지 않으셨다고요!”

이번엔 옆에 있는 부하 기사가 거들었다.

암요. 알죠.


“저야 헤르티안을 믿죠. 하지만 저와는 별개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해하고 계세요. 워낙 제 걱정이 많은 분들이라 대공 전하와 결혼하면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계시구요. 증거도 있다고 하시니 설명해도 말뿐이라 생각하실 거예요.”

증거라는 말에 헤르티안이 미간을 구겼다.


“희한하군요. 영애와 제가 만난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은 데다가, 어제 청혼을 하러 갔는데 그사이에 누군가 가짜 소문을 흘렸다는 게.”

그의 말대로였다.

솔직히 난 세르디스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감시하듯 집착하는 세르디스 아니면 굳이 누가 나의 결혼을 막겠는가.


“제가 결혼하길 원치 않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해요.”

거의 반쯤 확신이었다. 그래서 더더욱이 원작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도 들었고. 이 결혼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의지도 불타올랐다.

반면에 헤르티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의 이런 사정을 깊게 알지 못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영애가 결혼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한 명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예상과는 달랐다.


“아. 한 명 더 있긴 하려나. 에드워드 영식.”

오늘 대화한 바로는 나를 좋아하고 있음이 확실하니 말이다.

하지만 헤르티안은 내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붉은 입술이 말려 올라가자 은근한 관능미가 느껴졌다.


“영애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군요.”

“딱히 그렇진 않은걸요.”

“고작 두 명이라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섭섭해합니다.”

그는 의미 모를 말을 남겼다.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헤르티안. 부모님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무사히 결혼을 진행해 주세요.”

깨지지 않을 계약.

오늘 그를 만나려던 건 이걸 약속받기 위함이었다.


“부모님은 제가 잘 설득할게요.”

“어떻게 설득하실 생각입니까?”

“이상한 소문을 듣고 마음을 돌리셨으니 똑같은 방법으로 아버지를 설득시킬 거예요.”

나는 다이닝룸에 두고 나왔던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 생각이 어느 방향으로라도 바뀌셨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저와의 결혼은 계약대로 진행한다고.”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를 일.

불안함 속에서 그가 선택을 바꿀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른 건 내가 모두 감당할 수 있는데, 헤르티안이 나를 등진다면 내겐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반드시 그의 마음을 붙잡아두어야 했다.


“불안하십니까?”

그는 대답 대신 질문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다는 듯.


“불안해요. 헤르티안과 결혼하지 못하게 될까 봐.”

원작대로 모두가 불행해질까 봐.

그러니 확답을 해주세요.

간절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귀찮은 거겠지. 원작에서도 끝까지 대공비를 구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혹여 그가 이대로 병실을 나가버릴까, 내가 그의 짝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덧붙이기로 했다.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해주세요.”

그제야 그가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쳤다.


“은혜라 하셨습니까?”

“네. 승전식에서 제게 빚진 은혜 말입니다.”

“그 계산은 황제 폐하와 끝이 난 걸로 압니다.”

그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그도 이미 승전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뻔했고, 어떻게 막았는지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역시 모두 알고 계셨군요. 그럼 이야기가 더 편해지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빳빳이 세워 그를 또렷이 마주 보았다.


“제 능력에 대해서도 황제 폐하께서 말씀해 주셨겠지요.”

종종 미래를 엿본다는 능력.

그도 의중을 알아챈 듯 눈썹 한쪽을 추켜올렸다.


“제가 전하의 짝이 된다면 황제 폐하처럼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도 제가 대공 전하를 알아서 도울 겁니다. 저희의 계약이 유효한 시간까지요.”

어때, 구미가 당기지?

황제도 공짜로 얻지 못하는 능력을 기간 한정 무료로 베풀어 준다는 건데, 이게 안 끌릴 리가. 고작 껍데기뿐인 대공비 이상으로 가치 있는 능력이었다.


“제가 전하에게 있어서 최고의 패가 되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헤르티안은 별다른 답이 없었다.


‘설마 부족한 거야?’

나는 하는 수 없이 억지로 기침을 토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저는 작은 피로에도 쓰러지는 몸. 오라버니처럼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훗날 계약 결혼으로 인한 뒤탈은 신경 쓰지 마세요.”

몸이 약해서 내쳤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그 병.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겁니까?”

이윽고 굳게 다물렸던 그의 입이 열렸다. 건초더미처럼 버쩍 마른 음성이었다.


“네. 애석하게도 말이죠.”

“치료 방법도 없습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이건 척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리안이 떠나고 몇 년간 아카데미 연구실에 틀어박혀 치료 방법을 연구했지만, 그 어떤 것도 발견해내지 못했으니까.


“몇 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치료법을 연구했어요. 하지만 밝혀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마 제 수명은 몇 년 안 남았을 거예요.”

원작 속 아네트도 변경백과 결혼하고 얼마 못 가 죽었으니까.

씁쓸한 내 대답에 병실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에요. 제 병은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요. 염려도, 관여도 사양하겠습니다. 당신과 저는 그저 이 결혼으로 서로 얻을 이익만 얻어가면 되는 거예요.”

나는 곧장 선을 그었다. 찝찝함을 남기기 싫어 그랬다만 헤르티안은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거칠게 쓸어 넘기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불거진 힘줄이 보였다.


“영애께선 늘 저를 시험하시는 기분입니다.”

“부디 좋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요.”

“손해라…….”

그는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러더니 이내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아,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의 오뚝한 코가 닿을 거리였다.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시선은 저절로 갈 곳을 잃고 떠돌다 가장 채도가 짙은 입술에 닿았다. 곧이어 입술이 열리는 바람에 다시금 시선을 파다닥 돌렸다.

그는 아까와 달리 차분히 가라앉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제게 다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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