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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계획 성공 (16/79)


16화 계획 성공
2023.01.25.


나는 헤르티안의 물음이 남은 인생을 전부 걸 수 있을 만큼 치열한 문제인 거냐고 이해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답은 이것뿐.


“당연하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가족들도 걸린 문제였으니까.


“진심이십니까?”

그는 놀라우면서도 조금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진심이에요.”

하지만 만에 하나 살 방법을 찾는다면? 평생 헤르티안 곁에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안 그러실 거죠?”

나는 표정을 풀고 싱긋 웃었다.


“저도 진심인데요?”

그의 눈이 위험스레 휘어졌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남은 인생을 다 달라는 건 너무하네요. 물론 제 능력이 평생 소장하고 싶을 만큼이긴 해도 그건 너무했죠.”

“제가 평생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마카롱 하나 먹어도 행복한 사람이에요. 큰 행복은 바라지 않아요.”

“마카롱과 타르트, 휘낭시에와 마들렌을 매일 준비하겠습니다.”

이번엔 그가 스스로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내 능력이 그렇게 탐이 났구나?

사기적인 능력이긴 했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구하지 못할 예지 능력. 더군다나 그는 한 번 맛본 적이 있으니 탐이 날 만했다. 물론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대신 계약이 끝나도 제가 종종 당신을 도울게요. 됐죠?”

그는 만족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성욕만 없을 뿐 다른 데는 욕심이 많은 남자인가 보다.

나는 고민하다가 한 가지를 덧붙였다.


“결혼은 제멋대로 했으니까 이혼할 시기는 당신이 정해요, 그럼 됐죠?”

이 정도면 많이 내어줬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내가 그를 더 많이 원하니까.


“……할 수 없군요.”

그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리고 잔소리하듯 덧붙였다.


“영애. 건강하셔야 합니다. 저도 옆에서 도울 테니까 본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게 꼭 엄마 같아서 픽 웃음이 나왔다.


“걱정 마세요.”

“내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나직이 반박했다.

아마 계약자가 일찍 죽으면 곤란하니까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요.”

 

***

아네트를 저택으로 데려다준 헤르티안은 쉴 틈 없이 달리던 말을 멈춰 세웠다.

그가 찾은 곳은 황궁의 깊은 곳에 자리한 궁정 의원.


“대공 전하. 오랜만이십니다.”

약재를 정리하고 있던 의원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헤르티안은 연구실에 그 혼자인 걸 확인하고 경계를 풀었다.


“새삼스럽게 안부는 무슨.”

그는 몇 년 만에 보는 헤르티안을 보고 약초를 우려낸 차를 건넸다.


“일부러 안부를 묻는 겁니다. 대공 전하께서 저를 가장 먼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는데, 승전식이 끝났는데도 깜깜 무소식이니 말입니다.”

“일이 많이 있었거든.”

헤르티안은 찻잔을 보다가 방금 전 일을 떠올리며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아네트가 제 입으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자신을 이용하라는 말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래서 급하게 결혼까지 하려는 건가? 그녀는 모든 걸 다 해탈한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아네트가 떠나고 난 이후의 자신이었다. 아네트가 죽으면 헤르티안 또한 살 이유가 사라지니까.

그는 상념을 털어내고 이마를 짚었다.


“에반, 내가 부탁한 일은?”

그나마 믿을 구석이라고는 새로운 치료법. 그는 전쟁터에 있으며 아네트를 위해 새로운 치료법 발견에 힘썼다. 그리고 그를 도운 게 에반이었다. 어린 시절, 황궁에 있을 때 헤르티안을 도와준 몇 안 되는 사람.


“일전에 보내 주신 물약은 르앙베리아 백작을 통해 영애께 드렸지만, 큰 차도는 없으셨습니다.”

결과는 늘 그렇듯 실패였다. 헤르티안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엔 서탑 주인을 만나 멱살이라도 잡아서 약을 만들라고 시켜야겠군.”

언제나처럼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볼 뿐이었다.


“마법으로도 해결 되지 않아서 문제지요. 르앙베리아 백작님께서 그간 써보지 않은 방법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을 겁니다.”

늘 전해 듣던 절망스러운 말이 오늘따라 그에게 아프게 들렸다. 직접 아네트가 쓰러지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헤르티안이 주먹을 꽉 쥐자 가죽이 뿌드득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반은 그간 받아놓은 물약 리스트를 보며 말했다. 의학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약재는 거기 다 적혀 있었다. 그 위로 전부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더는 약이나 마법이 의미가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순한 건강 문제가 아닐 수 있으니까요.”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보자는 얘기였다.


‘약도, 마법도 아니라면 달리 어떤 게 있지?’

헤르티안은 아네트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겼다.

그녀는 치료에 실패했을 때 슬픔에 잠겨 저주라는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푸념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만약 그게 진짜라면?


“황제의 비밀 서고라도 털어 봐야겠군.”

 

 

***

평화롭던 저택은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어수선함이 물씬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서자마자 베티가 나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네트 아가씨, 큰일이에요. 저택이 아주 난리가 났어요.”

“왜?”

“주인님과 마님께서 오늘 일을 듣고 나서 멜슨 남작님을 죽이겠다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 말꼬리를 흐렸다.

아버지가 아침에 낸 기사를 어머니께 착실히 말해 주었나 보다.


“아무래도 아가씨가 아침에 말하신 게 효과가 있었나 봐요.”

나는 아네트를 비롯한 주요 인물에 대한 기억만 돌아온 게 아니다.

원작 전체의 내용. 즉 비올렛과 세르디스를 포함해서 모든 원작 인물에 대한 기억이 있다.

멜슨 선생님.

어제 방명록을 보고 나서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왜 멜슨 자작이 의사가 되었지?’

원작과 다른 그의 정보.

원작 속에서 그는 사기꾼이었다. 마음 여린 비올렛에게 들러붙어 등골을 빼먹다가 훗날 나만큼 처참하게 죽는 엑스트라.

그가 원작과 달리 주치의가 된 것부터, 비올렛이 아닌 우리 가문에 붙어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빙의해서 무언가가 틀어진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 때문에 생긴 거머리는 내가 처리해야 했다.

멜슨은 악질이었다. 심심치 않게 공작가의 하녀들에게도 손을 댈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헤르티안과 관련된 기사를 찾던 중. 심심치 않게 멜슨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가 우리 가문을 등쳐먹은 돈으로 노예를 사들이고, 술에 취해 폭행을 저지르는 등의 기사. 귀족들 사이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크게 이슈화되지 않고, 옛날 신문의 귀퉁이에나 적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보셨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을 것이다.

보통 남의 일이라면 그렇다.

이른 새벽.

하녀들이 막 모여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너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나는 부은 눈을 비비고 있는 그녀들을 한데 모아 말했다.


“어제 멜슨 선생님께서 다녀가셨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어.”

멜슨이 했던 짓과 같은 거짓 소문으로.


“선생님, 아니 멜슨 남작이 함부로 우리 가문 하녀를 겁탈하려다 들키셨다.”

나의 가짜 소문을 듣고 하녀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몇몇은 안색이 파리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놀랐다는 눈치는 아니었다.


“……언젠가 사달이 날 줄 알았지.”

“그러게 말이야.”

되레 이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중 맨 앞에 있던 하녀 하나가 물었다.


“아가씨. 누가 그런 일을 당했는지요?”

“그건 그 아이를 위해 말하지 않을 생각이야. 대신.”

나는 먹먹한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처럼 멜슨 남작님께 일을 당한 이가 있다면 오늘 어머니께 들러 꼭 이야기를 전해주렴. 멜슨 남작은 주치의지만 너네는 우리 가족이니까. 더는 가족들 중에서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협조 부탁해.”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을 뿐이다.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굳게 다져진 그 신뢰에 금이 가게끔 기사 몇 개를 흘렸을 뿐이다. 신문을 챙겨 읽으시니 기사는 보셨을 것이다. 다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겠지. 하지만 다시 본 기사와 집안 하녀들의 말이 더해진다면?


“멜슨 그놈! 대체 어디로 잠적한 게야? 어제까지만 해도 부르면 나타나던 놈이 어디로 사라졌냐고.”

효과 만점.

어제까지만 해도 은인이라고 불렀을 멜슨이 오늘은 놈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집사를 채근하셨고, 어머니는 눈물을 찍어 내셨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저희 애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말도 못 하고 고통받았을 걸 생각하면 당장 찾아내서 갚아줘도 모자라요.”

꽤 많은 하녀들이 어머니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불같이 성을 내셨다.


“하나도 아니고 몇이나, 그 아이들 눈물에 제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다고요.”

다른 귀족들은 몰라도 가난한 평민 예술가를 후원하는 어머니라면 진노하실 줄 알았다.


“이건 가문에 대한 능멸이요. 본때를 보여주어야겠소.”

가문의 일이 된 이상 아버지에게 이 사건이 마냥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집안 꼴 참…….’

잘 돌아간다.

내가 원했던 대로 알아서 집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멜슨은 먼저 눈치채고 튄 모양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멜슨이 아니었다.

나는 시장판이 된 저택을 여유롭게 누비며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네트. 그래 잘 다녀온 게냐?”

아버지는 내가 집무실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화들짝 놀랐다. 나는 주변을 훑어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것보다 무슨 일 있나요? 어머니는 왜 울고 계시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아버지가 알아서 해결할 거야.”

아버지가 내 어깨를 도닥거리며 눈을 피했다. 이번 일도 자세히 말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 상관은 없었다. 대신 나가기 전, 아버지에게 에드워드의 서신을 전했다. 헤르티안이 대신 전해 준 서신이었다.


“잠깐 사고가 있었는데. 에드워드 영식께서 편지를 남기고 가셨어요.”

“사고? 편지?”

아버지의 눈이 희번뜩거렸다.


“일단 열어보세요.”

이윽고 내용을 읽은 아버지는 편지를 구겨 바닥으로 내던졌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멀쩡한 놈이 없어!”

에드워드가 나와 만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세르디스의 협박을 받고 사라진 모양이다.

나야 고마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어리숙해서 받아 줄 사람이 없나 봐요. 연애도 모르고 사람 상대할 줄도 모르고…….”

코를 훌쩍거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조금은 나를 돌아보았다. 분홍빛 드레스 자국에 묻은 코피 자국도 발견한 모양이다. 이번엔 목멘 소리를 내었다.


“네가 뭐가 모자라서. 네 엄마랑 내가 널 얼마나 소중하게 키웠는데. 아픈 게 흠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냐? 멀쩡하던 사람도 내일 아침에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데 아픈 게 뭐 어떻다고.”

“하지만…….”

나는 울음기 가득한 소리를 내며 없는 눈물을 닦는 척했다.


“아버지 말이 다 맞아요. 그런 생각하지 않을게요.”

“그래야 내 딸이지. 아이고.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은 줄 알았다면 너를 강제로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 아비가 못나서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내 옷을 살짝 여며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코피 자국이 아직 남아 있던 건지 코 주변을 살짝 쓸어주었다.


“아버지. 그런데 오늘 대공께 신세를 졌어요.”

“대공?”

헤르티안의 이름이 나오자 곧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멜슨 남작과 별개로 헤르티안에 대한 나쁜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아오르 호수에 갔는데 제가 배에서 기절했더라구요.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는데 에드워드 영식은 편지를 두고 떠났다고 하고, 곁엔 대공께서 남아 계셨어요.”

“대공이 널 구해줬다는 게냐?”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꼴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여기까지 데려다주셨죠.”

너무 과하지 않게 할 말을 마쳤다.

깊은 수심이 깔린 아버지를 보며 그만 뒤를 돌았다.


“저는 이만 씻으러 갈게요. 아버지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나머지는 아버지의 판단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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