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우리 아네트 보러 왔는데? (18/79)


18화 우리 아네트 보러 왔는데?
2023.02.01.


장난이라는 말로 넘어가려고 했다면 오산이었다.

결국 그가 말하는 장난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미안. 내가 미안해, 아네트.”

사과는 필요 없었다. 애초에 받으려고 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차갑게 등을 돌렸다.


“됐습니다. 애초에 저는 전하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네트! 너 지금 나 보란 듯이 결혼하는 거잖아.”

몸이 획 돌아갔다. 그가 나를 멋대로 잡아끈 것이다. 방금 미안하다고 한 사람이 나를 멋대로 갖고 놀려고 하고 있었다. 순간 이가 으득 갈렸다.


“놓으세요. 보는 눈이 많아요.”

“나랑 따로 얘기 좀 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전하께 할 말은 청첩장뿐이었어요. 더는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요.”

“나 때문에 강제로 결혼하려는 거 맞잖아, 그렇지?”

“아뇨?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만약 그렇다고 해도 세르디스랑 나는 서로의 결혼을 신경 쓸 만큼의 사이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

“목소리 안 낮춰요?”

이목이 집중된다. 세르디스와 나를 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해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얼마나 아둔하고 멍청하기에 남들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행동하는지 모르겠다.


“보는 눈이 많아요, 놔요.”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끝장을 보자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늘 그렇듯 적당히 말하면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였다. 이 남자와 내일 가십에 오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머리를 굴리려던 찰나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선을 넘네.”

의상실 한편에 자리한 소파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가 들고 있던 신문이 거칠게 치워졌다.


 


“블란디체 대공 전하……?”

긴 다리를 꼰 헤르티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헤르티안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기도 잠시, 어느새 흉흉해진 까만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나를 잡고 있던 못된 손으로 말이다.


“그 손 놓지?”

눈빛만으로 손을 잘라내 버릴 것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그를 발견한 세르디스의 얼굴도 처참하리만치 일그러졌다. 이복형제인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걸 반증하듯 서로를 향한 날 선 시선이 팽팽했다.


“전쟁터에서나 굴러야 할 놈이 고상하게 여기는 무슨 일이야?”

“우리 아네트 보러 왔는데?”

와.

순간 감동받을 뻔했다. 딱 좋은 타이밍에 나타나서 이런 멘트라니.

여자에 관심 없다는 게 나라 손실이라고 느껴질 만큼 능숙한 말투였다.


“뭐? 우리 뭐?”

“내가 우리 아네트가 보고 싶어 온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드려야 합니까? 황자 전하.”

어느새 다가온 그가 억지로 손을 떼고 정중하게 존댓말로 바꿨다. 하지만 그게 더 비꼬듯 들렸다.


“볼일 보세요. 자, 가요. 아네트.”

“이 새끼…… 어떻게 아네트를 구워삶은 거야.”

“구워삶은 적 없다. 첫눈에 반해서 결혼해달라고 빌었지.”

듣고 있던 나까지 민망해지는 말이었다. 그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그럴듯한 용기도 내지 못하신 것 같은데.”

그의 붉은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갔다.


“너…….”

모두 맞는 말이라 세르디스는 변변한 변명도 하지 못했다. 완벽한 헤르티안의 승리였다.


“이제 우리 아네트가 드레스를 입을 차례라서. 선물을 많이 산 것 같은데. 국고를 엄한 데 탕진한다는 소리 듣기 싫으면 어디 기부라도 하시죠.”

“사생아 새끼가 뭘 안다고…….”

기어코 그의 추악한 면을 드러내려던 찰나였다. 나는 헤르티안 앞을 막았다.


“그만하고 들어가요. 달링.”

비장의 무기에 거칠게 나불거리던 그의 입이 닫혔다.

헤르티안이 이런 얘기를 들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달, 달링?”

“네, 우리 달링.”

나는 꺄르륵 웃으며 헤르티안의 굵은 팔뚝을 콩콩 때렸다. 눈치 빠른 헤르티안은 곧 다정한 얼굴로 변해서 내 장단에 맞춰주었다.


“우리 허니가 청첩장도 돌린 마당에 이제 거리낄 게 뭐 있겠습니까.”

“뭐? 허니?”

그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놀랄 틈도 없이 헤르티안이 말했다. 모두가 벙찐 얼굴로 한 편의 로맨스를 보고 있었다. 민망함은 그들 몫이었다.


“이왕이면 다른 귀족들한테도 널리 퍼트려 주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찐하고 깊은 사이인지.”

포부와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나를 안고 의상실 안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치자마자 그가 나를 내려주었다.


“저 잘했습니까?”

그는 완벽한 연기를 해놓고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잘생긴 그가 오늘따라 유독 멋있어 보였다.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이 된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 표정도 봤어요? 세르디스 전하는 안 믿어도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진짜 연인인 줄 알았을 걸요?”

나는 엄지를 척 올려 주었다. 그제야 그가 표정을 풀고 미소를 머금곤 질문했다.


“그런데, 영애는 황자가 싫습니까?”

“이걸 싫다고 해야 하나……. 사정이 있어서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저절로 거부반응이 나오나 봐요. 사람 싫어하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전 싫습니다. 그러니 영애도 싫어해 주십시오.”

그의 솔직함에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펴졌다.

어디서 이런 완벽한 남자가 내 앞에 툭 떨어진 거야.

잘생긴 데다가 연기까지 완벽하다니.


“헤르티안. 우리 절대 적이 되진 말아요.”

정말 아군으로만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당연한 말씀을.”

 

***

황제 앞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거울을 보듯 자신과 똑 닮은 첫째 아들, 세르디스였다. 몇 달 차이 나지 않는 둘째 아들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였다. 황궁에서 곱게 자라 몸에 흉터 하나 없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아이.


“아버지. 부탁입니다.”

철부지인 아들이 웬일로 찾아왔나 싶었더니, 역시나 부탁을 할 게 있어서였다.


“안 된다고 했다.”

“아네트는 대공비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동생인 헤르티안의 결혼을 막는 건으로.

형제간의 골이 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헤르티안을 방해하는 요구를 해온 건 처음이었다.

황제는 제 동생 혼사 길을 막는 아들 놈을 보고 버럭 역정을 내었다. 여태 귀한 적자라고 다 받아줬더니 끝이 없었다.


“작작하거라! 대공 비로 적합하고 말고는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 정하는 거다.”

“아버지, 부탁이에요.”

이미 헤르티안이 먼저 부탁한 사안이기도 했다. 정착해서 결혼하겠다고. 둘째 아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저버릴 순 없었다. 평생 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 했는데, 부탁마저 들어주지 못한다면 더는 헤르티안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도 늙기 전에 황자 비나 알아보거라. 아니면 황후한테 알아보라고 할 것이다.”

“그건 싫어요. 저도 정해둔 짝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황제는 꿋꿋이 말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같은 영애더냐?”

아네트 르앙베리아.

헤르티안이 데려온 그 영애를 세르디스까지?

세르디스의 침묵은 황제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황제는 혀를 차며 한심한 눈빛으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여자 문제로 권력을 빌리려는 마음이 괘씸했다.


“쯧쯧. 네가 그 녀석한테 진 거다.”

“아버지가 힘써주지 않으시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말리지 마세요.”

그는 아예 막무가내로 나갈 작정이었다. 자신은 황자고 헤르티안은 대공이니까. 승계 서열로 보나, 뭐로 보나 자신이 못 할 것도 없었다.


“한 번은 양보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더냐?”

세르디스가 나가려고 하기 직전. 황제는 낮게 깔린 진중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 또 다른 아들이 가여웠기 때문이었다.


“아네트만큼은 양보가 안 됩니다.”

세르디스는 아네트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헤르티안에게 내어주지 않으려 했다.


“네 어머니를 피해 전쟁터를 떠돌던 아이다. 이 황궁도, 가족도, 황자 자리도 한 번도 욕심내지 않는 네 동생한테 여인 하나쯤은 양보할 수 없는 거냐?”

“그게 사생아의 운명이잖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헤르티안이 갖고 놀던 장난감은 빼앗거나 부숴야 직성이 풀렸고, 헤르티안과 친하게 지내는 하인은 궁에서 내쫓아야 속이 시원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가 정부에게 한 짓과 똑같았다.


“사생아도…… 내 아들이다.”

그걸 잘 알기에 황제는 선뜻 헤르티안 편을 든 적이 없었다. 자신이 헤르티안에게 애정을 쏟을수록 세르디스와 황후의 질투가 심해졌으니까. 그래서 더욱 전쟁으로 내몬 척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못 들은 척 넘기기 어려웠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라던 낯선 모습이 선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속 시끄럽게 굴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황자궁은 최근 들어 조용한 날이 없었다.


“아버지까지 그 새끼 편을 들어 줄 줄이야.”

세르디스의 심기가 내내 좋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화살은 고스란히 황자궁의 시종에게로 향했다.


“거짓 정보를 줘서 일이 어그러졌으니, 벌 받을 준비는 되었겠지?”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황자궁 바닥에는 아네트가 읽었다고 했던 로맨스 책들이 여기저기 뒹굴었다. 알고 보니 아네트가 즐겨 읽는 게 아니라 하녀가 즐겨 읽었던 책인 걸 알게 되었다.


“내 돈 받아먹고 네가 하는 일이 뭐냐? 그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 알아 와? 황궁에서 일한다는 놈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시종은 바닥에 납죽 엎드린 채로 코를 박았다.


“그래? 그럼 죽어.”

바들바들 떠는 그의 목 옆으로 서슬 퍼런 검 날이 붙었다. 곧 목을 사납게 파고드는 통증이 죽음이 목전임을 알렸다. 시종은 살고자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에 급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말할 기회는 줄게.”

“화, 황자 전하께서는 제국에서 제일 멋지고 무술도 출중하시지만, 대공 전하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으십니까!”

세르디스의 마비 능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래 전, 비올렛과 함께 사냥제에 나갔다가 마수를 잡고 얻은 능력이었다.


“이걸로 아네트의 병을 낫게 해주겠다고 입을 털라는 건 아니겠지?”

이미 그 방법을 썼었다. 아네트 곁에 서면 최대한 마비력을 끌어올렸지만, 아네트는 한결같이 자신을 거부했다.


“제대로 보여주시지 못하셨잖습니까!”

“제대로?”

“영애께서는 늘 아픈 걸 달고 사셨으니까 웬만한 아픔은 익숙해지셨을 겁니다. 그러니 황자 전하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신 거겠죠.”

세르디스가 작게 호응했다. 그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다는 증거였다.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구해준 이를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시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쉴 틈 없이 떠들었다.


“아네트를 아프게 해라?”

한 번도 아네트를 아프게 하겠다는 생각은 품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네트가 아프지 않으면 자신이 더 많이 아플 걸 잘 알고 있기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만이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곧이어 세르디스의 눈이 번뜩거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