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먹어도 안 죽어 (21/79)


21화 먹어도 안 죽어
2023.02.11.


비올렛의 순수함에 그만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모두 그칠 때까지 옆에 앉아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만 웃으세요, 저 부끄러워요.”

“공녀님을 뭘 드시고 이렇게 귀여우세요?”

“귀엽, 귀엽다니요.”

진분홍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말렸다.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아니! 아니에요.”

비올렛은 자신에게서 거둬지는 시선을 다급히 잡아챘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거든요……. 귀엽……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부끄러워서.”

그녀는 자신의 뽀얀 볼을 만지며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저 말랑한 볼을 꼬집고 장난치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비올렛이 가스라이팅을 당해가며 세르디스를 따라다니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공녀님은 황자 전하를 많이 사랑하시죠?”

순간 그녀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성급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태 세르디스의 만행을 지켜본 나는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언니, 그 새끼 만나지 마요!’라고 말이다.


“저는 공녀님이 지금처럼 기쁘게 웃으면서 좋은 것만 보고 들으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남자가 구르는 모습을 아프게 지켜볼 필요가 있나.

서로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그만두면 되는 건데.

비올렛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영애도 아시잖아요. 사람 마음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는 거.”

그녀가 씁쓸하게 읊조렸다.


“그건 세르디스 전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영애가 결혼한다고 해도 그 마음을 쉽게 접지 못하시겠죠. 오래 짝사랑하고 계셨으니까요.”

나는 눈을 크게 키웠다.


“알고 계셨어요……?”

나와 세르디스가 만난 건 비교적 최근이라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야 안 사실이니까. 그런데 비올렛이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때, 황자 전하가 아무 이유 없이 연구실에 자주 가셨었으니까요. 어느 날 전하가 창문 너머로 영애를 보고 계시는 걸 몇 번 보게 되었습니다.”

전혀 몰랐다.

리안이 죽고 나서는 나도 살기 위해 연구만 했으니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아카데미 때는 그저 카시안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랬었군요.”

“영애께서 힘들어하고 계셨으니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하셨어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상대에게 섬세한 분인 걸 알기에 전하께서 제게 뭐라고 하시든 아무 상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공녀님께는 매번 상처만 주시잖아요.”

항상 세르디스만 생각하고 걱정하는 비올렛에게 매몰차게 대하는 세르디스다. 귀찮다며 떼어내려고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뱉기도 했다.

묵묵히 받아주니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그 정도는 점점 심해져 가겠지. 비올렛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을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실컷 구르는 게 세르디스의 운명이었다.

소설은 해피엔딩을 맞는다만, 결말까지 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독이었다.


“전 괜찮아요.”

그녀가 고요히 미소 지었다.

이미 각오가 된 사람 같아 보였다.


“공녀님 마음 존중할게요.”

“고마워요, 영애.”

그녀가 내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나중에 대공님도 소개시켜 주세요. 두 분이 너무 궁금해요.”

“약속할게요.”

역시 세르디스에겐 아까운 사람이었다.


 

***

비올렛에게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이 없을까?

좋은 남자를 만나면 그녀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원작을 완전히 바꿔버리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좋은 남자라…….”

책상에 앉아 머리를 핑핑 굴리고 있자니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손에 잡힌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시안밖에 없어.”

내 주변에 남자라고는 아버지와 헤르티안 둘뿐이고. 이 둘을 제외하면 남은 건 카시안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시안을 소개시켜 주자니 걸리는 게 있었다.

얼마 전, 헤르티안이 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영애를 참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그날 이후로 이 얘기가 계속 귀에 윙윙거렸다.

카시안이 날 좋아한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왔었고, 이유 없이 내게 호의를 베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이 흐르고는 달랐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그는 내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제 만나 볼까 해도 사정이 있다고 하고, 자신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길 극도로 꺼렸다.


‘혹시…… 얼굴 때문에?’

내가 실망할까 봐?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고작 얼굴 때문에 무너질 사이는 아니지 않나.

서운한 감정도 들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컸기에 아무렴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날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 이상했다.


“왜 자꾸 신경 쓰이는데!”

곧 결혼할 새신부가 딴 남자 편지를 보고 이런 생각이라니.

딴 사람이 보면 의심할 문제였다.

나는 거칠게 편지를 집어넣고 책상 위에 놓인 깃펜을 잡았다.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계속 편지를 주고받기는 불편하니, 이번에야말로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 봐야겠다.


“헤르티안 말이 틀릴 수도 있는 거니까.”

만약 카시안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비올렛에게 소개해줄 작정이었다. 그의 인성은 내가 보증하니까.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몇 글자를 적어 내렸다. 곧 끙, 소리와 함께 종이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글씨가 이상했어.”

다시 새 종이를 폈다. 그 위로 카시안의 이름부터 재차 적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잉크가 번졌잖아.”

그렇게 몇 개의 편지지를 버리고 나서야, 그래도 봐줄 만한 편지가 나왔다. 나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소중하게 접어 넣곤 실링을 찍었다.


“드디어 다 썼다.”

뻐근해진 어깨를 펴고 숨을 돌리니, 바닥에는 구겨진 종이 뭉치가 한가득 쌓인 채였다. 원래 편지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괜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똑똑.

그리고 때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온 베티가 난장판이 된 방을 보고 놀라 외쳤다.


“세상에나! 방에 도둑이라도 들었어요? 당장 주인님께 알려야…….”

나는 그녀를 바로 말렸다.


“그 도둑 나야.”

“예?”

“편지를 쓰다 보니까…… 아니, 그냥 그렇게 되었어.”

베티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이내 나를 찾은 목적을 떠올린 듯 몸을 돌렸다.


“아가씨, 그보다 새로운 소식이 있어요.”

“응. 말해.”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를 황궁으로 초대하셨어요.”

예상은 했었다.

헤르티안이 황궁에서는 쫓겨나듯 나온 처지라지만, 그는 명실상부 황제의 아들.

식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황제가 나를 찾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언제야?”

“내일이요!”

“폐하께서 성격이 급하시네.”

당장 만나야겠다고 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아가씨, 저 애는 진짜 하녀로 쓰실 거예요?”

베티가 내게 붙어 작게 속삭였다.


“보니사? 걔가 왜?”

보니사는 그날 이후로 우리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날 따라온다고 끈덕지게 매달리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모른 척하기엔 살롱에서의 실수로 더는 일감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만든 태피스트리가 꽤 마음에 들었기도 했고.


“아니, 하녀 일을 하나도 안 해본 티가 너무 나잖아요. 빨래며 뭐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진짜?”

나는 의외라는 듯 눈을 키웠다.


“평생 심부름을 하던 애라서 대부분은 다 해본 일일 텐데?”

“저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요. 글쎄, 주방에서는 음식을 다 태워 먹질 않나. 청소하랬더니 걸레 대를 부수질 않나……. 그래서 하루는 일은 내버려 두고 교육만 했는데도 전혀 나아지는 게 없더래요. 하녀 일이랑은 영 거리가 있어 보여요.”

베티가 진저리치며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며칠 만에 이런 불만이 나온다면, 앞으로 보니사에 대한 불만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제대로 된 하녀 교육이나 추천장이 없는 그녀라면 더욱이.

나는 어떻게 할지 곰곰이 고민하다 베티에게 말했다.


“보니사를 불러줄래?”

 

***

르앙베리아 백작 저 뒤뜰.

저 멀리서 보니사가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녀 복이 이렇게 안 어울리는 하녀는 처음이네.


“아가씨, 부르셨어요?”

어김없이 양 갈래 머리를 묶은 그녀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불안하니?”

“예……. 제가 실수투성이라 실망하셨죠.”

보니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서글피 말했다. 본인도 일을 못하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이거 선물이야.”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선물했다. 그녀는 얼떨결에 건네받고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별의 선물인가요……?”

“어때? 내가 직접 수놓은 손수건이니까 잃어버리지 마.”

나는 그녀의 말은 살포시 무시했다. 올라간 그녀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쳐졌다. 그러더니 이내 선물 받은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예쁜 손수…….”

그녀는 예의상이라도 하려던 말을 잇지 못했다.


“엉터리지?”

왜냐면 누가 봐도 엉터리였으니까.

나는 손재주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선생님에게 과외받아도 내 손만 닿으면 저주받은 듯한 물건이 탄생하곤 했다. 집중과 감각이 필요한 자수에서는 그게 톡톡히 드러났다.

지금 보니사가 받은 것처럼.

그녀에게 선물한 손수건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터져 나온 실밥에. 무아지경으로 조합된 색은 촌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그거 이틀은 꼬박 걸려서 만든 거야. 자수 선생님이랑 같이.”

“말도 안 돼…….”

보니사는 할 말 다 해놓고 뒤늦게 입을 가렸다.


“말도 안 되지?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깊은 동감을 표하며 나는 앞장서 걸었다. 뒤따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곧 내가 멈춰 선 곳은 갖가지 약초들이 무성히 자라있는 밭 어귀.


“겨울 약초들이 잔뜩 자랐네.”

나는 밭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뒤에 멈춰 선 보니사에게 물었다.


“너 이 약초들이 무슨 약초인 줄 알아?”

“아뇨. 잘 모르겠어요.”

“너희 고향은 춥다고 해서 잘 알 줄 알았는데. 여기서부터 겨우살이, 자리공, 말굽버섯, 우슬이야. 들어본 적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는 자리공은 소량을 달여 마시면 통증과 소변 장애에 효과가 있어.”

“아가씨는 약초에 대해 해박하시네요.”

허리를 숙인 그녀가 나를 따라 자리공을 바라보았다.


“보기에도 건강해질 것 같은 모양이에요.”

“하지만 좋다고 해서 많이 먹으면 온몸이 마비되고 죽음에 이르지.”

“독초였어요?”

“그래.”

“그럼 기억해놨다가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되겠어요.”

나는 자리공을 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무서운 걸 보듯 한 걸음 물러났다.


“어떤 약초든지 양면성은 존재해. 때론 몸에 이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몸에 해를 끼치기도 해. 마치 나처럼. 나는 손재주는 없지만, 약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지.”

나는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도 하녀 일엔 서투르지만 손재주는 남들에 비해서 월등히 좋지. 그게 네 양면성이야.”

“제 양면성…….”

보니사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앞으론 집안일 말고 다른 일을 줄게. 네 좋은 면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일로. 앞으로는 겨울옷과 태피스트리를 많이 만들어줘.”

오늘 그녀를 부른 이유는 이거였다.

보니사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기 위해. 애초에 그녀는 내게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따라온 거니까.


“해줄 거지?”

잠시 말을 잃었던 그녀는 곧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백 개…… 아니 천 개도 만들 수 있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러다 손가락 다 나간다.”

보니사는 강아지처럼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문양도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럼 좋지.”

나는 싱긋 웃었다.


“근데 아가씨. 그 약초로는 뭘 하시려고요?”

그러고 보니 자리공을 그냥 들고 와 버렸다.


“아, 놓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

돌아가려면 꽤 거리가 있는데.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자리공에 묻어 있는 흙을 털어냈다.


“너 혹시 어디 아픈 데 있어?”

“딱히 없는데…….”

“그럼 어쩔 수 없네. 내가 먹어야지.”

입을 크게 벌려 자리공을 씹어 먹었다. 특유의 생약초의 쓴맛과 흙 내음이 입안 가득 퍼졌다. 오랜만에 먹어도 적응 안 되는 맛이었다.


“아가씨! 그만 드세요!”

보니사는 그런 나를 뜯어말렸다.


“많이 먹으면 독초라면서요! 그러다가 큰일이라도 나시면 어쩌시려고요!”

나는 보니사의 만류에도 자리공을 꼭꼭 씹어 먹었다. 보니사는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나를 살폈다. 꿀꺽 자리공을 삼킨 나는 입 주변을 쓱쓱 닦았다. 보다시피 내 몸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는 상관없어. 독초도 약초도 안 듣거든.”

 

 
웃기게도 난 독초로는 죽을 수 없는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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