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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불효자 남주 (23/79)


23화 불효자 남주
2023.02.18.



“세르디스 너까지…….”

황후의 원망 어린 목소리에 그가 넉살 좋게 웃었다.


“오래전에 황궁을 떠났는데 이 자리가 당연히 불편할 만도 하지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하지만 저게 나한테 말하는 버릇을 좀 봐.”

“어머니께서 먼저 독이라도 탔냐며 다그치지 않았습니까. 그러지 않았으면 헤르티안도 어머니께 괜히 대들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

세르디스는 헤르티안에게 눈을 찡긋거리기까지 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료가 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갑자기 세르디스가 헤르티안을 동생으로 생각할 리는 없었다. 뭔가 속셈이 있어 보였다.


“세르디스 말이 맞소. 언제까지 저 녀석과 척지고 살 거요? 황후는 짐이 모르는 척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시오.”

“폐하……!”

모두의 질타에 황후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제 자식인 세르디스마저 황후에게 사과를 종용했다. 황후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빨갛게 칠한 입을 앙다물었다. 사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과는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결국 보다 못한 헤르티안이 그를 말렸다.


“마음 넓은 네가 이해한다니 고맙다. 그래도 이렇게 가면 서로 불편한 마음만 남으니까. 딱 차 한 잔만 더 하고 가.”

세르디스의 물음에 헤르티안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아네트, 그래 줄 거지?”

나도 차마 이런 분위기에서 나가버릴 순 없었다.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헤르티안, 차 한 잔만 마시고 나가요.”

“……알겠습니다.”

다행히 진짜 마음 넓은 헤르티안이 이해해주었다.


“그럼 저번에 진상품으로 받았다던 차가 있는데 그걸 마시자. 자, 가서 차를 새로 내와라.”

곧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새로 찻물을 끓여 왔다.

부산스럽게 사람들이 움직이자, 얼음처럼 굳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새로 준비된 찻잔에 김을 내뿜는 찻물이 가득 찼다.

은은한 초록빛이 감도는 차였다.


“페퍼민트라고 하는 차야. 입에 머금으면 입안이 개운하고 시원해져. 얼른 마셔 봐.”

찻물을 멀거니 바라보자니, 세르디스가 알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향이 독특하네요.”

하지만 나는 섣불리 차를 먹지 못했다.

진하게 배어 나오는 민트 향 끝으로 독특한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향이었다.


‘여기다가 뭘 섞었구나.’

“기존에 있던 차랑은 차원이 다를걸? 한 모금만 마셔 봐.”

세르디스의 은근한 재촉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아네트 영애, 정말 귀한 차니까 한 모금만 먹어 봐요.”

황후도 거들었다. 그녀는 여기에 무얼 탔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눈으로 찻물을 바라보다, 이내 찻잔을 들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니 세르디스의 기대 어린 눈빛이 보였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 차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황자 전하 말씀처럼 향이 좋네요.”

그가 내 반응을 샅샅이 살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내 몸엔 아무런 이상 반응이 없었다.


“그, 그래? 그럼 많이 마셔, 아네트.”

“감사히 마실게요.”

보란 듯이 한 잔을 뚝딱 비워냈다.


“잘 마셨습니다.”

멀쩡한 내 상태에 세르디스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이내 날카로운 눈빛이 한 시종에게 향했다.


“전하께서도 한잔하세요.”

나는 태연하게 세르디스에게 차를 권했다.

어떤 반응을 원했는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었다.


“영애가 그렇게 맛있게 마시는 걸 보니 내가 다 먹고 싶네요. 나도 한 잔 주렴.”

황후가 먼저 차를 내오라고 했다.

이 편도 나쁘지 않지.

세르디스도 차를 잘못 내 온 줄 알고 있으니 굳이 막지 않았다.


“언제 맡아도 적응되지 않는 향이야.”

황후가 그대로 찻잔을 기울였다.

아까 일로 속이 탔는지 찻물을 꽤 많이 마셨다.


‘뭐가 나오려나.’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향만 맡아선 약초 한두 개를 섞은 게 아니었기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나를 죽이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딱 십 초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

황후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몸이…….”

그녀가 몸을 배배 꼬더니 이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의원! 의원을 불러오라!”

순식간에 황후는 여유를 잃고 바닥에 누워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녀의 곧은 허리가 동그랗게 말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배를 감쌌다.


 


“배가…… 배가…… 살려줘…….”

이마에 땀이 맺히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심한 복통을 앓게 된 것이다.


“어머니……?”

난데없이 쓰러진 황후를 보고 세르디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이내 제 어머니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 심호흡하세요.”

그리고 궁정 의원들이 막 달려왔을 때는, 황후는 세르디스 품에서 편안해 보였다.


“네 말대로…… 조금 덜 아픈 것 같아.”

그녀는 세르디스가 마치 산소통이라도 되는 듯 달라붙어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세르디스의 진짜 목적.


‘몸도 약한 나에게 자기가 필요한 존재임을 보여주려던 거였어.’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왜 이런 짓을 벌였냐며 따질 수도 없었다.

대신 나는 내 찻잔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잔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누가 황후 폐하의 차에 독을 탔습니다!”

 

***

황후는 방으로 돌아가 치료받았다.

만찬장에 남은 이들은 그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독 발언 때문이었다.


“은잔이 검게 변했습니다!”

“진정 독이라는 말이더냐?”

“예, 폐하.”

차에서 독이 나왔다. 정확히는 은을 변색하게 만드는 독초이긴 하나, 독성이 강하지 않아 통증만을 일으키는 약초 성분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약을 탄 세르디스만이 알고 있으니 차마 독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영애도 같은 차를 마셨는데 몸에 이상이 없다. 찻잔이 깨져 따로 검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부러 잔을 깨트리길 잘했다.

내 차도 독 검사를 했다면 분명 검게 나왔을 테니까.


“찻잔에 독을 발라놓았을 겁니다. 그럼 독을 마시길 원하는 상대에게만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떻게 독이라고 확신했느냐?”

황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황후 폐하께서 쓰러진 직후 눈앞에 이 장면과 같은 장면을 보았습니다. 황궁 전체가 범인을 찾기 위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나는 미리 생각했던 대답을 늘어놓았다.


“아네트. 지금 뭘 봤다고 하는 거야?”

내가 이전에 황제와 만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세르디스가 물었다.


“미래요.”

“미래라니……?”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종종 미래를 봅니다.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께서는 알고 계세요.”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황자 궁에서 독이 나왔다고 한다면 바로 의심받을 테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별다른 후유증 없이 금세 완쾌하실 겁니다.”

“범인은 보았느냐?”

“그건…….”

말꼬리를 흐리며 세르디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피했다.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황궁 안에서 사는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굳이 세르디스를 지목하진 않았다.

그가 노린 건 나였고, 독을 써서 죽일 의도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

꼬박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는 황궁 밖을 나올 수 있었다.


“약을 탄 건 세르디스 전하예요.”

나는 마차 안에서 헤르티안을 붙잡고 열을 토했다.


“정말 재수 없지 않아요? 그 이상한 능력을 보여주려고 저한테 약을 먹이려고 한 거예요!”

세르디스가 아네트에게 차인 이유를 알겠다.

마비 능력으로 계속 아네트를 쥐었다 폈다 하려고 든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죠. 갑자기 축하한다느니 뭐니, 평소랑은 전혀 달랐잖아요.”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원래는 영애께 먹이려고 했겠지만.”

줄곧 대답이 없던 헤르티안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찻잔을 대고 코를 킁킁거리는 영애를 보고 알았습니다. 영애께서는 약초 달인 물을 드실 때 코를 킁킁거리는 버릇이 있으시니까요. 그 안에 다른 게 들어 있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헤르티안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

그가 눈을 도로록 굴렸다. 나는 그를 잡고 따져 물었다.


“그럼 제가 차를 마시고 아무렇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계셨나요?”

“네. 알고 있었습니다.”

뻔뻔한 대답이었다.


“제 뒷조사라도 하셨나요?”

“그때 병실에서 영애께 그랬죠. 영애의 병이 낫도록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그래서 영애의 병세가 뭔지 백작께 이것저것 질문을 했습니다. 자잘한 것까지도요.”

사실 뒷조사를 했어도 할 말은 없었다.

나도 헤르티안의 치부를 알고 있는데, 그도 나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예민했어요.”

빠른 사과에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늘따라 처연해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내가 담겼다.


“저야말로 오늘 일은 미안합니다.”

그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헤르티안이 뭐가 미안해요?”

“영애 앞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헤르티안답지 않게 자신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이걸 추태라고 하시면 우리 가족은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내밀고 다니게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느 가족마다 사정은 다르고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도 달라요. 황제 폐하가 어떻든 황후 폐하가 어떻든. 저는 헤르티안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어떤 막장 가족이라고 해도, 헤르티안만 곁에 있다면 아무런 상관없었다.


“영애는 대단합니다.”

그제야 그는 조금 안심했는지 작게 웃었다.


“그렇죠? 저도 제가 멋져요. 황후 폐하께서 바닥에 누워서 떼굴떼굴 구를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드셔야지! 헤르티안에게 나쁜 소리를 한 벌을 받으신 거예요.”

“영애랑 함께라면 몇 번을 잔소리 들어도 좋습니다.”

“저는 헤르티안이 잔소리 듣는 거 싫은데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마차 안을 잔잔하게 울렸다.

***

헤르티안은 저택 문 앞에서 손을 방방 흔드는 아네트를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이내 그녀가 사라지자, 표정을 지웠다. 곁으로 기사 하나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 황궁으로 모셔 오란 명이 있으셨습니다.”

“가지.”

그는 곧장 말 위에 올라탔다.

황궁은 적막했다.

아네트가 있을 땐 그럭저럭 버틸 만했는데, 그마저도 없으니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일이 있어 늦었다더니 아비의 서고를 뒤진 것이더냐.”

황제는 헤르티안이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황제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말을 했으면 될 일을 굳이 몰래 뒤져서까지 훔쳐 간 물건이 무엇이냐?”

“말씀은 드릴 수 있으나 돌려드리지는 못합니다.”

아들의 뻔뻔한 대답에 벙찐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땅문서라도 털어갔느냐?”

“마르카바 나무에 얽힌 고서입니다.”

아네트를 치료할 방법을 찾다 보니 마르카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조사하는 의미가 있었기에 황제의 서고를 찾았다.


“마르카바? 아카데미 졸업하기도 전에 전쟁에 내보냈다고 다시 입학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는 대충 대답하고 뒤를 돌았다.

그러자, 아까 일을 떠올린 황제가 말을 이었다.


“대공령으로 돌아가면 지옥이 펼쳐질 거다.”

“제 삶은 이미 지옥이었습니다.”

“더 밑바닥의 지옥일 거다. 칼릭스가 사라진 영지는 방패막이 사라진 영지와도 같다. 지금의 제국처럼 말이다.”

씁쓸함이 묻어난 걱정이었다. 하지만 평생 아버지라는 그늘 없이 자란 그에게 기껍게 들릴 리 없었다.


“저는 누구처럼 무능하지 않습니다. 아네트도 영지도 모두 지켜낼 겁니다.”

“지킬 거면 확실히 지켜내라. 오늘처럼 세르디스가 딴짓 벌이지 않도록.”

헤르티안이 고개를 돌리자 황제의 냉정한 눈과 마주쳤다. 황제는 이미 오늘 일에 대한 진범을 알고 있었다. 그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도.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태까지처럼.


“가족 놀이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신경 쓰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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