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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뜨겁고 강렬한 초야 (25/79)


25화 뜨겁고 강렬한 초야
2023.02.25.



“당신이 내 새언니 될 사람이야?”

뒤를 돌아보니 분홍색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내려오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키는 한 뼘 정도 작고, 커다란 리본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아이였다.


“넌 누구니?”

“내가 먼저 물어봤어. 당신이 내 새언니냐고. 헤르티안이 데려온 사람 맞냐고.”

말투는 이 집 내력인가?

근데 헤르티안은 가족이 없는데.

달리 가족이 없는 대공가에 이런 화려한 차림의 여자아이라. 귀족 아이 같아 보이는데.


“응. 나는 아네트라고 해. 너는?”

“나는 리리.”

리리.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용인들이라도 보이면 아이를 돌려보내라고 할 텐데. 넓기만 한 이곳에 사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쳇. 하필이면 예쁘네.”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거든! 헤르티안 오라버니 탐내지 마.”

버릇없는 리리를 보며 나는 조금 놀려주고 싶었다.


“탐내진 않아. 단지 이제 내 거일 뿐이지.”

“아니야!”

리리는 성이 떠나가라 소리를 빼액 질렀다.

하마터면 귀청이 터질 뻔했다.


“둘이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지? 갑자기 결혼한 게 이상했어. 리리는 다 알거든?”

“리리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진짜 사랑하는 사이야.”

“나 안 어리거든? 이래 보여도 내년에 성년식을 올린다고.”

성년식이라고?

엄청난 동안 미모에 깜빡 속았다.


‘그럼 지금 열아홉 살이라는 거잖아.’

내년에 성년이라면 버릇없이 구는 건 그냥 못 넘어가지.


“리리. 대공성에 있을 땐 나한테 존댓말을 쓰도록 해.”

“싫은데? 내가 왜? 헤르티안이 그러라고 시켰어?”

“아니. 이건 새언니로서의 부탁이야.”

“초야도 제대로 못 치를 거면서 무슨 새언니야.”

그러고 보니까 초야가 있었지.

리리를 보니 알겠다. 대공령의 다른 사람들도 나를 탐탁지 않고 수상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을. 그럼 다들 우리가 급히 결혼한 데에 의심을 가질 거란 것도.


“우리 초야는 누구보다 뜨겁게 보내기로 약속했는데?”

리리의 눈이 부리부리하게 뜨였다.


“지어낸 말이겠지.”

“나랑 내기할래? 내가 초야를 무사히 치르면 내게 공손하게 존댓말을 하는 걸로.”

“됐거든!”

나는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떵떵거릴 땐 언제고. 자신 없구나. 리리.”

 

 


“아니야! 해. 하면 될 거 아냐. 내가 이기면 여기서 쫓아내 버릴 거야.”

“마음대로 해.”

여유롭게 대답해주곤 목에 꼿꼿하게 힘을 줘 그녀를 지나쳤다.

망했다.

초야는 생각도 못 했는데.

***



“드디어 찾았다.”

컥.

대공성이 너무 넓어 헤르티안의 집무실을 찾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집사가 안내해줬건만, 이 성은 어찌 된 게 미로처럼 복잡한지.

다리가 터질 것 같아서 이젠 아무렴 좋았다.

곧장 집무실 문을 열고 외쳤다.


“헤르티안…… 초야는 뜨겁고 강렬하게…… 헉헉.”

이건 리리랑 한 약속이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바람에 뒷말이 이어지지 못했다.

유독 조용한 방에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들자, 그 앞엔 돌아가 있는 의자와 헤르티안의 보좌관인 오센만이 보였다.


“집사가 헤르티안이 여기 있을 거라 했는데…….”

허탕 친 건가?

또 다른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거냐고.


“……대공비 전하?”

오센은 안경을 고쳐 쓰더니 예의 갖춰 인사했다.


“대공님은요?”

“여기 있다.”

그리고 돌아간 의자 뒤편으로 헤르티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내가 왔는데도 헤르티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 영지 풍경을 보고…… 콜록.”

“집무실도 춥네요. 그러다가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담요라도 덮어주려 했건만, 헤르티안이 급히 나를 말렸다. 나는 시무룩하게 담요를 내려두고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센, 미안하지만 대공님이랑 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오센이 집무실을 나가고, 나는 본론부터 꺼냈다.


“헤르티안. 오늘 우리 초야인 거 잊지 않았죠? 우리 비록 계약 결혼이지만 불편하더라도 당분간은 방을 함께 써요.”

“……그러겠습니다.”

다행히 그는 쿨하게 허락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그 말만 남기고 나는 다시 집무실을 떠났다.

***

아네트가 떠나고 오센은 다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 탓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냉기가 돌던 방이 훈훈하게 느껴졌다.

대공비 전하가 왔다고 장작이라도 땠나 싶었는데, 벽난로는 잿더미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그런 센스를 타고나신 분은 아니지.’

그런데, 열은 다른 데서 나오는 것 같았다.

창문을 향해 바라본 의자 위로 뿌연 김이 올랐다.


“지휘관님……?”

오센은 조심스럽게 주인 쪽으로 다가갔다.


“오센.”

달뜬 음성에 흠칫 그가 걸음을 멈췄다.


“뜨겁고 강렬한 초야를 치를 수 있게 준비하도록.”

 

***



“집사가 대공령에도 약초는 있다고 했었지.”

헤르티안 방에서 나온 나는 재차 집사를 찾았다. 잭슨의 피부병이 부쩍 좋아졌다고 해서 붉나무를 구해다가 줄 생각이었다. 수도에서는 약재방에 가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지만, 이곳엔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마님.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집사, 대공성에 약초가 있다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

“보고 싶은데, 안내해 줄 수 있어요?”

보통 귀족 집안에는 온도 조절이 일정하게 되는 유리 화원이 있었다. 블란디체 영지는 매서운 바람과 낮은 온도로 식물이 자라기에는 악조건이긴 했다.

저택을 둘러봤을 때는 딱히 유리 온실 같은 곳도 없어 보였고, 그럼 달리 장소가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집사는 나를 데리고 대공성 깊숙한 곳의 문을 열었다. 그가 안내해준 곳은 유리화원도, 정원도 아닌 돌계단이 이어진 지하.


“여기라구요?”

“정확히는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집사가 등불을 내게 주었다.

저 밑엔 감옥이 있어서 죄수들 숨소리만 겨우 들릴 것 같은데.

진짜 저곳에서 식물이 자란다고?

의심할 여지 없이 나는 집사에게서 등불을 건네받고 곧장 밑으로 향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마님.”

집사는 따라오지 않고, 문 앞에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같이 안 가요?”

“저는 이만 할 일이 있어서.”

혼자 가기는 무서운데.


‘그래도 약초를 찾으려면 가야지.’

나는 무거워진 다리에 힘을 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나 지하까지 내려온 걸까.

내려온 것까진 좋은데 다시 돌아가려니 앞길이 막막했다. 이래서 집사가 안 따라온 거구나.


“없기만 해 봐. 이상한 감옥 나오기만 해 봐!”

괜히 집사를 탓하며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그 앞엔 입구와 같은 나무 문이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감옥 문 같이 생긴 문을 잡아당겼을 땐.


“우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꼭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광활한 대지. 천장에서 쏟아지는 정체 모를 환한 빛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풀밭이 이어졌다.

한 발짝 들어서자 흙 내음이 콧속을 간질였다.


“정말 있었네?”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나비가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정원이 정말 존재했다.

어떻게 이런 지하에 정원이 있는지. 신비할 따름이었다.


“근데 여기 따뜻하다.”

또 기묘한 점은 계단을 내려올수록 점점 따뜻해진다는 것이다.

분명 몇 계단 위까지만 해도 얼어 죽을 것 같았는데, 여기만 따뜻하다니.

게다가 밭 옆으로 작은 샘물이 흐르기도 했다. 보면 볼수록 기이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침대 가져다 놓고 살면 안 되겠지?”

여기가 수도랑 기온이 비슷한 것 같았다.


“일단 꽃부터 찾고 올라가자.”

우선 두 팔을 걷어 올리고 꽃을 찾아 나섰다. 알록달록한 열매와 풀이 가득해 오랜만에 저택 뒤뜰에 온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붉나무는 이곳에 없었다. 대신 효능이 비슷한 어성초를 발견했다. 오랜 시간 병에 대한 연구를 하다 보니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

약초를 갖고 나온 후, 성을 외우는 데만 두 시간, 집안 고용인을 안내받은 데만 한 시간, 대공가의 전통에 대해 공부하는 데만 세 시간이 꼬박 걸렸다.

그중 반은 오들오들 떠는 데 시간을 보냈다.

몸을 쓱쓱 비비며 움츠려 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저택에서 나를 따라온 베티와 보니사를 비롯해 대공성의 하녀들은 초야를 위해 한 시간 전부터 내 몸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때는 적당히 밀자.”

“아가씨, 아니 대공비 전하. 깨끗하게 때를 밀어야 대공님께서 좋아하시지요.”

“아니야……. 때라도 있어야 내가 여기서 버틸 것 같아.”

나는 베티 손에 들린 말린 수세미를 옆으로 치웠다.

두꺼운 옷으로도 이 추위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몸에 붙은 때라도 있어야 덜 추울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을 몸을 닦고 문지르고 나서야 해방이었다.

밤의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찬 복도를 뛰어갔다.

침실 문을 열자, 꽃향기가 그윽하게 퍼졌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 방을 은은하게 비추는 촛불과 더불어 침대보 위엔 장미꽃이 흐트러져 있었다.


“거추장스럽게 꽃잎은 왜 따놨대.”

나는 꽃잎을 치우고 두툼한 이불 속으로 몸부터 밀어 넣었다.

폭신한 감각과 따뜻한 온기에 나른하게 잠이 몰려왔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하던 중, 대뜸 남자의 큰 가슴이 내 시야를 점령했다.


“아,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 근육을 쳐버렸다.


“미, 미안해요. 놀라서 그만.”

여태껏 만져보지 못한 단단함에 얼얼해진 손 위로 헤르티안이 보였다.


“놀라셨다면 미안합니다.”

그는 급히 하얀 가운을 여몄다. 방금 씻고 들어온 건지 머리에 물기가 젖어 있었다.


“오센이 오늘 늦을 거라고 했는데. 일은 다 끝냈어요?”

“영애께서 꼭 뜨겁고…… 큼큼. 초야를 치러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급하게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침대맡에 등을 기대앉았다. 옆에서 본 그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성욕자라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헤르티안, 혹시 제가 불편해요?”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게 편할 리가 없지.


“그럼 제가 소파에서 잘까요? 저는 괜찮은데.”

소파 앞에 벽난로가 있어서 따뜻한 편이라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베개를 들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곧장 저지했다. 슬그머니 베개를 빼앗아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여기서 같이 주무셔야 합니다.”

나는 쿡쿡 웃으며 풀썩 드러누웠다.


“헤르티안도 얼른 누워요.”

팡팡, 옆에 있던 베개를 두드리니 그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매를 곱다랗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잘 자요.”

그리고 다시 이불 안으로 몸을 묻었다. 분명 내일 눈을 뜨면 몸살이 나 있을 거다. 그렇게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안아도 됩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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