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거 패악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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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그거 패악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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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그거 패악질이야
2023.03.04.
영락없는 리리의 뒷모습이었다.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리리 앞으로 중년의 여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뺨을 만졌다. 옆으로는 내 허리춤만 한 꼬마 아이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그녀의 팔에 매달려 울었다. 나는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리리.”
그들을 보며 씩씩거리던 리리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리고 그 화살은 내게로 돌아갔다.
“새언니는 성 관리도 똑바로 못 해요? 왜 불결한 쿠르시아인이 성을 돌아다니게 놔두냐고요!”
새언니라고 호칭을 정정했지만 듣기 불편한 말투였다.
“다짜고짜 따지지 말고 앞뒤 상황 정리해서 말해.”
나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리리는 나를 노려보더니 소리 지르듯 말했다.
“이 여자는 적국인 쿠르시아 남자와 살림을 차린 여자예요. 이 애가 날 보더니 막무가내로 배고프다고 조르는데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엄마라는 사람은 애를 말릴 생각은커녕 구걸이나 하고 있고. 경비가 얼마나 엉망이면 성안에서까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요!”
쿠르시아 제국.
몇 해 전에 오필 왕국을 집어삼킨 제국이었다. 한땐 형제라고 불리었던 오필 왕국을 멸망하게 만든 쿠르시아를 적국이라 여기는 건, 이곳 레퀴에스인이라면 당연했다.
‘수도에만 있어 직접 쿠르시아 사람을 본 적은 없는데.’
블란디체 령이 쿠르시아 제국과 붙어 있는 북부이다 보니 소수 민족이 넘어온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쿠르시아인이 아닙니다…….”
그때 중년 여자의 입에서 흐느낌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뼛속까지 제국민입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닙니다. 저희는 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받아주신 제국민입니다…….”
여인의 울음 섞인 대답에 리리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너는 아니라고 우겨도 이 애의 아빠가 쿠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쿠르시아인이 대공령에 사는 것도 불결한데 이젠 마음대로 대공성까지 드나들면서 구걸해? 당장 헤르티안에게 말해서 너희를 추방시킬 거야.”
철퇴 같은 소리에 여인은 눈이 자욱이 쌓인 바닥을 기어 리리의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더럽게 어딜 잡아!”
리리는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고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다신 대공성에 오지 않을 테니까 저희를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다시 쿠르시아에 간다고 해도 저희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제발.”
리리는 거칠게 여인을 발로 쳐냈다. 부어오른 뺨 위로 리리의 구두에 묻은 검은 눈이 철퍼덕 올라갔다. 눈물 섞인 검은 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뚝뚝 흘렀다.
“새언니, 뭐 해요? 헤르티안에게 가지 않고.”
리리의 악랄한 태도가 도를 넘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고 해도 교육까지 받지 못한 건 아닐 텐데. 어디서 이런 막돼먹은 애가 나온 거지?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을 발로 차고 버러지 취급하다니.
보는 사람까지 화가 날 정도였다.
“안 갈 거면 말아요. 난 먼저 갈 테니까.”
눈을 퍽퍽 밟으며 온갖 짜증을 부리며 앞서 나가는 리리를 보니 답이 나왔다.
저건 말로 해서는 고쳐지지 않을 싹수였다.
나는 가만히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을 한데 모아 뭉쳤다. 꽤 단단한 눈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걸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던졌다.
“아!”
눈덩이가 주인을 정확하게 찾아갔다. 리리는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묻은 눈더미들을 털어내며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았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눈 던진 거예요?”
“그래 던졌다.”
나는 기세에 눌리지 않고 받아쳤다.
“마님…….”
뒤따라온 하녀가 뒤에서 나를 말렸다. 저걸 건드리면 골치 아파진다는 건 이곳 하녀들도 모두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더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지.
“저랑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거예요?”
그녀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물었다. 전혀 자기 잘못을 모르는 눈치였다. 하나하나 알려주는 수 밖엔 없었다.
“리리. 이들한테 사과해. 당장.”
“내가 왜요?”
“영지민을 함부로 때렸잖아.”
“난 귀족이고 쟤네는 평민이에요. 그리고 내가 이유 없이 때렸어요? 쿠르시아인이 멋대로 성에 들어와서 구걸했다고요!”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만 호소했다. 어떤 상황이 되었든 손찌검은 잘못된 행동이었다.
“오죽했으면 성까지 찾아와서 구걸했겠어? 그걸 이해 못 해?”
“내가 저들 사정까지 일일이 이해해야 해요? 당장 내가 짜증 나 죽겠는데!”
“너 그거 패악질이야.”
그녀가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패악질……? 새언니가 뭔데 저보고 패악질을 했다고 해요?”
“앞으로 내가 네 보호자야. 그리고 이 성의 주인은 네가 아니고 나야.”
“보호자 같은 소리 하네.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지금 부모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너한테 보호자가 필요하면 내가 해야지.”
“웃기지 말아요. 아무리 대공비여도 새언니보다 내가 여기 더 먼저 살았어요. 그리고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리리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새언니는 헤르티안이랑 가짜 결혼한 거잖아.”
“뭐?”
놀라서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죠? 비밀 들키기 싫으면 저한테 이래라저래라하지 말아요.”
리리는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흥, 코웃음을 치고는 뒤를 돌았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헤르티안이 리리에게 말했나?’
최측근인 오센이 알고 있다는 것 정돈 나도 눈치챘다.
하지만 리리까지 알게 되는 건…….
“리리!”
나는 쓰러져 있던 여인을 먼저 일으켜 보내고, 리리를 뒤쫓았다. 하지만 미처 리리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성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몸이 휘청거리더니 쓰러져 버렸으니까.
***
눈이 떠보니 헤르티안이 있었다.
침대맡에 앉아 내 손을 꽉 잡고 기도를 드리는 것 같았다.
‘나 또 쓰러졌구나.’
성 밖에서 찬 공기를 계속 마셨더니 몸에 무리가 갔나 보다. 저주받은 몸뚱어리는 그새를 못 참고 쓰러졌다.
“저 건강해요.”
나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자 그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밑으로 하얀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마치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놀다가 다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을 이었다.
“북부가 이렇게 추운 줄도 모르고 신나서 눈 구경을 한다는 게 그만…….”
그래서 괜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리리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괜히 가족끼리 틀어졌다는 걸 알면 그가 더 걱정할 테니까.
“답답합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뱉은 말이었다.
몸도 약한 주제에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이 사달이 났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기껏 따뜻하게 만들어줬는데 바로 쓰러져서 할 말이 없네요.”
“제가 해줄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답답합니다.”
이번에도 내가 생각한 뜻이 아니었나 보다. 그가 마저 설명을 덧붙였다.
“약초도, 마법도, 신력도 모두 통하지 않는 몸이라고 들었습니다. 몸이 아픈데 제가 도울 방법은 없고 계속 쓰러지는 걸 눈으로 봐야 하는 게 답답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내가 답답한데, 오죽했으면 그가 대놓고 이런 말을 할까?
“조심할게요.”
나는 그의 말을 내게 주의를 하는 거라고 받아들였다.
막 결혼한 신부가 픽픽 쓰러진다는 소문이 돌면 그에게도 피해가 갈 테니까.
그래서 나를 걱정하는 거라고.
헤르티안은 짤막하게 마른 세수를 하곤 화두를 바꿨다.
“리리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해결할 때까지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이미 그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잘 지내고 싶은데 어렵네요.”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목소리를 줄여 물었다.
“헤르티안. 혹시 리리가 우리의 계약 사실을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그런데 리리는 우리가 가짜 결혼이라고 믿고 있어요.”
리리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가장 가능성 있는 건.
‘헤르티안이 무성욕자인 걸 눈치챈 거야.’
어릴 적부터 헤르티안과 이 성에서 함께 지냈다고 하니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한창 활활 타오를 나이에 이성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의심스러울 만도 했다.
“리리에게는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러니 부인께서는 무리하지 마세요. 제 부정맥이 더 심해지는 기분입니다.”
“알겠어요.”
“이리 오십시오. 몸이 차갑습니다.”
그제야 진지한 표정을 푸는 헤르티안을 보며 나도 긴장을 풀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
무리하지 말라는 헤르티안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해가 뜨자마자 부랴부랴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잭슨!”
블란디체의 행정관 잭슨.
그가 오늘 내 상대였다.
“마님?”
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잭슨은요?”
“잭슨 님께서는 수도에 출장을 가시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요.”
대신 몽글몽글한 수염이 있는 다른 사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럼 잭슨 대신 예산을 관리하는 건 당신인가요?”
“예. 길타라고 합니다요.”
길타는 나를 흘긋흘긋 쳐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오늘부터 대공비로서 임무를 다해야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예산을 직접 관리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요?”
“네, 대공 전하께서도 공사다망하신데 제 짐까지 짊어지게 할 순 없잖아요.”
그는 느릿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마님이 성에 적응하실 때까지는…….”
“제가 맡게 해줘요. 무조건.”
내가 나서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공성 전체를 보수해야겠어요.”
“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요?”
“그것보단 성 내부 곳곳이 부서지고 녹슬었어요. 그동안은 대공 전하께서 전쟁으로 부재했기에 관리가 어려웠다고 쳐도, 이젠 대공비까지 있는 마당에 성이 이런 꼴로 유지된다면 관리 소홀이라고 수군거릴 거예요.”
물론, 이건 구실이었다.
‘성이 추워서 살 수가 없어요!’
이게 진짜 속내였다.
예산 면에서도 구멍을 막아야 불필요한 난방 비용을 절감할 테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우선 예산서를 주세요.”
길타는 군말 없이 내게 예산서를 건넸다.
블란디체 영지의 일 년치 예산은 대략 30억 골드. 여기서 대공령에 필요한 자금을 제외하더라도 성 전체를 수리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길타. 내일까지 성에 보수할 곳을 전부 확인하고 보수 비용을 책정해서 주세요.”
“아니 됩니다.”
그렇다면 거리낄 것 없이 진행하면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길타가 막아섰다.
“안 된다뇨?”
“성의 예산이 부족합니다요.”
“큰 행사를 잡게 되더라도 5억 골드는 족히 남는데, 이게 부족하다구요? 만약 빠듯하다고 하더라도 이번에 전쟁에서 전하께서 가져오신 배상금이 수억은 될 텐데요. 아니면 성이 너무 노후되어서 새로 지어야 할 수준인가요?”
“성은 보수만으로 충분하긴 하나, 그렇게 되면 영지를 운용하기 어렵게 됩니다요.”
이상한 얘기였다. 다른 영지에 비하면 큰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단다.
“그렇다는 건 다른 데 쓰이는 돈이 있단 얘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