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75억이 필요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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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75억이 필요하다고요?
2023.03.08.
길타는 뜨끔한 얼굴이었다. 예산서에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라 섣불리 말하기 어려워했다.
“저는 이 성의 안주인 되는 사람이에요. 정확한 사정을 알아야 해결 방법도 고민할 수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길타는 한 박자 늦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실토했다.
“실은 전대 대공 전하께서 쿠르시아로 잡혀간 대공 영지의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끌어다 쓰셨습니다요.”
“쿠르시아로 잡혀간 영지민이라면…… 설마 쿠르시아 제국이 통일하고 난 직후 노예로 바친 제국민인가요?”
“맞습니다요.”
오필 왕국과 통일한 쿠르시아는 오필 왕국과 사이가 돈독했던 레퀴에스 제국을 견제해 거대한 전쟁을 벌이려다가, 당시 전염병으로 인해 약해진 병사력으로 인해 몇 가지 불합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전쟁을 일단락시켰다.
그중 하나가 제국민 중 젊고 건강한 사람을 쿠르시아에 바치는 것.
수백의 평민이 난데없이 타국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다시 데려올 방법은 없었다.
“대공께서는 모든 제국민은 아니어도 블란디체에서 먹고 자란 영지민만큼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힘쓰셨습니다.”
“영지민을 탈환시키지 못하니까 돈을 주고 밀수를 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물론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었다.
“영지민 한 명을 데려올 때마다 드는 비용은요?”
“한 명당 3억 골드입니다. 합법적인 방법은 아닌지라 가격은 매년 올라가고 있습니다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했다.
3억?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 그럼 앞으로 남은 영지민의 숫자는요?”
“25명입니다요.”
앞으로 75억이 남았다는 소리였다.
억 소리 나는 금액에 나도 모르게 영지민을 포기하면 안 되겠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당연히 그건 안 될 말이다.
선대 대공의 뜻이자 헤르티안이 이어받은 임무이기도 했다.
만약 영지민을 이대로 포기한다면, 앞으로 헤르티안을 영주라고 인정해 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75억은 심했지!’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황제가 싼 똥을 헤르티안이 치우고 있는 셈이다.
아들이 이 고생을 하는 줄도 모르고, 여유롭게 황궁에 있을 황제를 생각하니 짜증이 일었다.
“그럼 매년 12억 정도 예산으로 영지민을 탈환한다고 치면 일 년에 4명. 최소 6년은 지나야 모두 돌아오겠네요?”
“예, 마님.”
그럼 6년 뒤에나 대공성의 보수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때를 기다리느니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이혼을 기다리기도 전에 얼어 죽겠지만.
“돈을 벌어야겠어요.”
방법은 이뿐이었다.
직접 발로 뛰어서 돈을 버는 것. 돈을 벌어서 하루라도 빨리 영지민을 탈환시켜야 한다.
“하지만…… 보다시피 저희 영지는 척박해서 내로라하는 특산물도 없습니다요.”
“특산물은 없어도 제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마님께서요?”
“제가 예지 능력이 조금 있거든요.”
길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랄 건 없어요. 예언자가 된다거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다만 문득문득 가까운 미래의 일이 펼쳐지는 정도예요.”
원작에서 멀어졌다고 책 속 정보까지 버릴 이유는 없다. 최대한 활용해서 돈을 벌어야지.
“우선 상인을 불러 구할 수 있는 만큼의 약초를 구해주세요.”
“어떤 약초를 말입니까요?”
“제가 리스트를 적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구해야 해요. 아시겠죠?”
갑작스러운 요구에 길타가 어버버거렸다.
“하, 하지만 마님. 대공성에서 자라는 약초만 해도 영지민을 치료하고도 남는데, 굳이 약초는 사서 무엇 하시려고 합니까요?”
“약초로 장사를 할 생각이에요.”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라 비싼 값에 팔리지 않을 텐데요?”
“제게 생각이 있어요.”
***
나는 길타와 헤어지자마자 곧장 대공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언제 와도 기분 좋아지는 온기에 몸을 녹이던 것도 잠시. 가져온 바구니에 급히 약초를 따다 넣었다.
“마님. 이 많은 걸 다 따서 뭐에 쓰시려고요? 상인에게도 약초를 많이 구해오라고 시키셨다면서요.”
“이건 따로 필요한 데가 있거든. 부지런히 따서 넣어.”
여기엔 다양한 약초가 있어서 여러 가지 조합으로 약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약초를 모두 손질해 빻아 넣은 후엔,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종이를 펼쳤다.
아카데미에서 연구한 치료법. 그리고 무수히 많은 약초와 약을 먹었던 경험을 되살려 병증에 대한 치료법을 적었다.
기억을 되살려 빠짐없이 기록하고 나니 책 한 권이 금세 완성되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으십니까?”
“헤르티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책을 적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시계를 확인한 나는 멋쩍게 웃으며 책을 덮었다.
오늘도 가운 하나만을 걸치고 침실로 들어온 헤르티안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내 뒤로 다가왔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마저 쓰십시오.”
“그래도 돼요?”
헤르티안은 기꺼이 허락했다.
내가 다시 글을 적어 내려가는 동안 그는 무언가를 가지고 다시 내 뒤에 다가섰다.
“머리를 빗어드려도 됩니까?”
그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빗이었다.
매번 검만 잡았던 손에 작은 나무 빗이 있으니 사뭇 귀엽게 보였다. 나는 흔쾌히 머리를 내어주었다.
“살살 빗겨주세요.”
“맡겨만 주십시오.”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목덜미로 슬쩍슬쩍 닿는 손길은 기분이 아주 묘해지기도 했다.
얼마 안 가 책을 완성했지만, 다정하게 머리를 빗겨주는 손길이 좋아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머리를 묶어줄래요?”
그가 조금만 더 만져줬으면 하는 바람에 그런 부탁을 했다. 그는 말없이 긴 끈을 가져와 내 머리칼을 빗어 모았다. 그 감각이 좋아서 스르륵 눈이 감겼다.
“부인께선 머리를 묶는 모습도 아름다우셨는데 말입니다.”
그 말이 흐릿하게 귓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
북부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화사한 장미꽃이 가득 핀 방이었다.
리리는 그윽이 퍼지는 장미 향을 맡으며 오후 드레스를 갈아입고 있었다.
“새언니는?”
리리가 요새 버릇처럼 묻는 말이었다.
리리의 전담 하녀는 기다렸다는 듯 은밀하게 다가와 속삭였다.
“굳이 제국이 버린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제국에 있는 상인들도 여럿 불러 모았다고 해요.”
리리는 혀를 쯧쯧 찼다.
“숙부도 그렇고 왜 쓸데없이 돈을 들여서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하는지 몰라. 새언니는 영지 사람도 아니면서 헤르티안이 시키지도 않은 일에는 왜 목을 매단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적국인 쿠르시아에서 살림 차린 사람들을 영지로 데려오려는 이유가 뭔지.
게다가 공짜도 아니고 고급 드레스를 수백 벌 살 수 있는 돈으로 말이다.
“아가씨 때문은 아닐까요?”
“나 때문에? 왜?”
“저번에 아가씨가 쿠르시아 아이를 데려온 여자를 혼내주셨다면서요. 마님께서 이 성의 실세인 아가씨를 견제하려고 보란 듯이 적국인들을 데려오려는 속셈이실 수도 있잖아요.”
아무리 대공비라 하더라도, 오랜 시간 대공성에서 일해온 하녀에게 주인은 리리 하나였다.
리리의 입지가 낮아지는 건 자신의 입지 또한 낮아지는 셈.
그저 내버려 두다가 아네트의 전담 하녀들에게 입지를 다 빼앗길 게 뻔했다.
“정말 그렇네.”
그리고 리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티 내지 않았지만, 리리 또한 안 살림을 차지한 아네트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진짜 새언니가 오기 전에 가짜 새언니를 몰아내야지.”
***
넓고 척박하기로 소문난 대공 영지를 구경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마차를 타고 성을 나서는 내내 뽀얀 눈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나무가 보였다.
“추운 것만 빼면 매일 이 풍경을 보는 것도 즐겁겠어.”
수도에서 살 때는 리안과 함께 눈 내리는 날만 기다렸었다. 조팝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새하얀 눈을 보고 싶어서기도 했고.
눈이 올 때마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았던 기억이 있어서, 내게 눈은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손바닥 위로 내려앉은 눈꽃 송이 하나로도 웃음이 저절로 피어났다.
“마님. 지금이라도 성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요? 주인님께서 아시면 제가 죽어납니다요.”
“전하께는 영지를 구경하고 오겠다고 말해놨으니 괜찮아요. 길타가 말하지 않는다면야…….”
나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길타가 앞장서 나갔다.
“대신 딱 한 시간입니다.”
“약속할게요. 가자, 보니사.”
다른 하녀들보다 힘이 좋은 보니사와 함께 국경으로 향했다.
눈 쌓인 벌판 위에 있는 작은 마을, 그 사이에 울타리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울타리 너머엔 두꺼운 천막으로 만들어진 막사가 여럿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온전히 즐기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고, 평민들이 입는 옷을 입으니 몸이 다 나은 것만 같았다.
“보니사. 나한테 아가씨나 마님이라고 부르면 안 돼. 알겠지?”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래, 좋아.”
마을 바로 옆 국경에 막사가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국인 레퀴에스에서 갑자기 쳐들어올 적을 막기 위해서. 게다가 마을이 옆이니 물자를 얻기도 쉬우니, 감시 겸 생활이 가능한 곳이 이 지역이었다.
하지만 마을의 입장에서도 마냥 거슬리는 존재는 아니었다.
“오크 두 마리가 내려옵니다!”
“일일이 보고하지 말고 알아서 처지하고 돌아와.”
산에서 내려온 몬스터들이나 산 짐승들이 있으면 쿠르시아 측 기사들이 알아서 해결해주곤 하니까.
‘공생 관계라는 거네.’
막사에서 튀어 나간 기사 여럿이 온몸에 오크의 피를 두르고 돌아왔다.
꽤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는지 따라갔던 병사 하나가 다리를 절면서 들어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울타리 너머로 건너와 아는 얼굴을 찾았다.
“아줌마, 깨끗한 수건 하나 있어? 있으면 하나만 빌려줘.”
마을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온 쿠르시아 기사들에게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가져다줄 테니까 힘들게 움직이지 말고 거기 있어요.”
나는 아주머니가 가져가려는 수건을 대신 받아 들고는 막사로 향했다. 울타리를 넘어도 기사들은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수건을 부탁했던 병사 외에 세 명의 말단 병사가 더 보였다.
“이 아줌마 또 귀찮다고 딴 사람 시켰네. 그러게 그냥 달라니까.”
나는 그 병사에게 다가가 수건을 내밀었다. 병사는 거칠게 수건을 뺏어다 얼굴을 벅벅 닦았다.
“오크 피는 독성이 있으니까 세탁해서 보낸다고 전해줘.”
“네.”
“안 가?”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이상함을 느낀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곧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젖혔다. 뒤에 있던 보니사가 깜짝 놀라 나를 잡고 뒤로 물러났다.
“너…….”
깜짝 놀란 건 보니사뿐만이 아니었다. 로브를 젖힌 병사도 내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키웠다.
‘설마 내가 대공비라는 걸 알아보기라도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