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네트가 빙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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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아네트가 빙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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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아네트가 빙의자?
2023.03.18.
대공성 꼭대기 층.
혼자 남겨진 고독한 순간이 찾아오자 시름에 잠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헤르티안은 창가에 걸터앉아, 조금 전의 상황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네트가 건넨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밖을 나섰다.
“우린 계약 관계일 뿐이니까 일일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분명 알고 있었다.
현재 자신이 아네트에게 어떤 존재인지. 리안을 잃고는 혼자 갇혀 지냈던 그녀였기에 마음의 문을 열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알았다.
그리고 헤르티안은 자신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직접 듣는 건.
‘생각보다 고달프다.’
아네트와 재회한 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실망시킨 적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이 정도 존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영영 이 상태로 제자리걸음일 것 같다는 공포감이 그를 무겁게 옭아맸다.
“하…….”
헤르티안은 생각에 잠겨 뱉지 않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네.”
매번 자신이 아네트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 중이었다.
그는 축 처진 몸을 일으켰다. 상심할 시간은 없었다. 그녀가 그은 선 앞에 선 만큼 이번엔 제대로 된 한 발짝을 내디딜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네트 곁에 있던 거머리도 떨어졌고, 결혼도 한 마당에 조급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보다 아네트 건강이 우선이지.”
침착함을 되찾은 헤르티안은 책장으로 다가가, 황제의 서재에서 빼 온 고서를 꺼냈다. 책장을 펼치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끼쳤다. 파르르 넘어가던 종이는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그가 몇 번이고 눈여겨본 페이지.
종이 위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가 적혀 있었다. 오래된 고서인 만큼 대부분의 미스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라 판명이 났지만, 딱 한 가지. 가짜라는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것이 있었다.
“……빙의.”
정말 말도 안 되는 단어.
그 아래엔 빙의자에 대한 예시가 줄지어 적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고 종종 이 세계엔 없는 말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천재성을 띤다고 한다. 또한 요상한 병을 앓다가 죽는 사례가 대다수란다.
분명 허무맹랑한 이야기임에도, 헤르티안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만약 단순히 계약 결혼 상대였으면 몰라도 그는 줄곧 그녀를 지켜봐 왔으니까.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상자 속, 수북이 쌓여 있는 봉투 더미. 끝이 누렇게 바랜 종이 안에 적혀 있는 낯선 글자. 제국, 아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전쟁을 떠돌던 그도 처음 보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종종 그녀가 보낸 편지 안에는 그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적혀 있었다.
마치 이 고서 안에 적혀 있는 ‘빙의’했다는 사람처럼.
***
‘혹시 기분 나빴나?’
헤르티안이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먼저 나가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딴엔 편하게 해준다고 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일순 표정이 굳는 것 하며, 그대로 다이닝룸을 나가는 것 하며, 분명 기분 상한 얼굴이었다. 왜? 귀찮은 일을 덜게 해준 건데. 머리를 굴려보아도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과라도 해야 하나?’
그것도 이상하지. 다시 절 신경 써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잖아.
똑똑.
그때, 때마침 보니사가 들어왔다.
“마님, 저 왔어요.”
그녀를 보니 수런했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내겐 중요하게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어?”
“마을에 내려가서 보따리 상인들을 잡고 물어봤는데, 쿠르시아에서 신전 출입을 전면 막았대요.”
“이유는?”
“모든 신전의 재정비가 들어갈 예정이라고 당분간은 폐쇄하기로 했대요. 마님 말씀이 다 맞았어요!”
내 물음에 보니사가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시기까지 나를 도와주네.’
쿠르시아에서 신전을 폐쇄하기 시작했다면 그 남자가 정보를 알아내기도 쉬울 것이다. 이미 황궁과 신전 측에선 대안을 찾기 바쁠 테니까.
“고생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헤르티안의 무거운 짐도 조금 덜 수 있겠지.
“마님, 그리고 태피스트리 만들라고 하신 것도 다 만들어 두었어요.”
게다가 보니사의 말은 나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그 많은 양을 벌써 다 만들었다고?”
“태어나서 줄곧 태피스트리만 만들고 살았는데, 고작 몇십 개가 대수일까요.”
그녀가 태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도 그 많은 양을 한 번에 만드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대공성에 있는 하녀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추운 지역이라 그런지 다들 한 번씩은 만들어 봤다더라구요.”
“그랬구나.”
장하기도 하지.
나는 보니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판판하게 묶은 머리 느낌이 좋았다. 줄곧 만져 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로 소원 성취였다.
“고생 많았어.”
보니사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더니 내게 물었다.
“마님……께서는 태피스트리로 뭘 하시려고요?”
“변방 마을에 가져다주려고. 일반 마을보다 산 위쪽 지대라 그런지 더 추웠잖아. 게다가 대부분은 얇은 천으로 만든 태피스트리밖에 없어서 바람을 막긴 역부족이라 이거라도 하나씩 나눠주려고.”
그곳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공성도 추워서 못 살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은 정도가 심했다. 장작을 잔뜩 때도 허연 입김이 모락모락 났다.
‘앞으로 자주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버티려면 이거라도 해놔야지.’
마을 전체를 보수할 순 없으니 급한 대로 태피스트리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마님께서 결혼하실 때 지참금으로 사신 비싼 면직물이잖아요.”
보니사 말이 맞다.
원래는 대공가에서 필요한 옷을 만들려고 가져온 것이었지만, 드레스는 이미 차고 넘쳤고.
그보다 더 유용한 곳에 썼을 뿐이었다.
“고작 드레스를 쓰는 것보다 그편이 낫지 않겠어?”
“그래도 마님 건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요?”
“성에 있는 태피스트리도 충분히 좋은걸.”
사업으로 돈을 벌고 나면 대공성도 보수를 할 테니, 굳이 욕심부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보니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참을 뚱하게 서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번뜩 들며 말했다.
“태피스트리를 만들고 남은 원단이 꽤 있어요. 그걸로 제가 마님 옷을 지어 드릴게요!”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아니, 그걸로는 성안에 있는 하녀들 겉옷을 만들 거야.”
“예……? 그 귀한 원단으로요?”
“응. 보니사, 너건 특별히 두 개 만들어 입어. 옷이 이게 뭐야. 금방 감기 걸리겠다.”
매번 하녀들이 얇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신경 쓰였다.
보는 내가 다 춥달까?
그래서 싫다고 해도 만들어서 입힐 생각이었다.
보니사는 멍해진 채로 멍하니 나를 보았다.
“그래도 그럴 수는…….”
“거절하면 내 옷을 네게 줘버릴 거야. 저기 토끼털이 마음에 드니?”
내가 옷장 문을 여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다급히 달려와 나를 말렸다.
“아, 아니에요! 입을게요!”
의외로 순순히 입겠다고 말하는 걸 보며 나는 아쉬운 척 뒤를 돌았다. 그러자 문득 결혼식장에서 드레스 장식으로 실랑이를 벌였던 때가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카시안한테는 아직도 편지가 없어? 결혼식 때 답장을 보냈으니까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됐는데.”
그나저나 편지가 늦는다.
수도가 아닌 북부라서 전달이 늦는다 해도 말이다.
“마님 앞으로 온 편지는 백작님께서 보내신 게 전부예요.”
보니사도 내 표정을 따라 시무룩하게 답했다.
‘막상 만나려니 부담스러웠나?’
마지막 편지엔 만나고 싶은 날짜를 정했었다.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기간을 넉넉하게 잡아두었다. 그런데도 아직 답이 없는 거면 준비가 덜 되었을 수도 있었다.
“곧 오겠지. 그래도 럭키가 깜빡했을 수도 있으니까 백작가에 연락을 넣어줘.”
“네, 마님.”
***
요새 들어 보니사의 얼굴에 활기가 가득 찼다.
‘마님은 정말 좋은 분이야.’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보니사에게 살아갈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아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그녀를 쫓아왔지만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부 생활은 고향 생각이 나서 즐겁기도 했다.
“얼른 옷을 만들어서 마님한테 보여드려야지.”
그녀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안고 하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녀들도 아네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곧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의 기대를 단숨에 무너트렸다.
“마님은 요새 밖에 외출하는 재미에 빠지셨다며?”
“그렇대도. 매일 성을 돌아다니면서 노시느라 안 살림은 하나도 안 돌보신대.”
“그럴 줄 알았지 뭐. 착하시면 뭐 해? 우리나 영지 사람들한테 하나도 관심이 없는데.”
뒤에서 떠들기 좋아하는 것들인 줄은 알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욕까지 할 거라곤 미처 몰랐다.
“수도 귀족 아가씨들이 다 그렇지 뭐. 보석이나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재미에 사는 거지.”
쾅!
듣다 못한 보니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하녀 둘은 보니사를 힐끗거릴 뿐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레 보니사가 들어오니 큰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마님이 들어와서 괜히 우리 영지 돈만 축나는 거 아닌지 몰라.”
“내 말이. 마님은 수도 귀족이신데 우리 사정을 이해나 해주시겠어?”
“어떻게 알아 우리 속을……악!”
그때, 하녀들 머리 위로 무거운 천 더미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보니사가 던진 것이다.
아네트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하녀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더는 들어줄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하녀는 신경질적으로 보니사를 흘겼다.
“야야…… 내버려 둬. 마님이 데려온 하녀라잖아.”
옆에 있던 하녀는 쉬쉬거리며 보니사를 위아래로 흘겼다.
“넌 좋겠다. 마님 옆에서 따뜻하고 몸 편하게 있을 테니까.”
“어제 태피스트리 만들라고 시킨 것도 마님이라며? 몸이 약하셔서 추위에도 약하시다던데 방에 덕지덕지 걸어두시려는 모양이지? 고작 이 정도 추위도 못 견디시는데 나중에 후사는 이으실 수 있으려나 몰라.”
보니사는 어느새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마음 같아선 머리채를 잡아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도 멋대로 행동하지 않은 건, 자신 때문에 아네트를 욕 먹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보니사는 이를 꽉 깨물며 그녀들을 노려만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래? 우리는 마님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야. 설마 우리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마님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를 생각은 아니지?”
“……옷 만들 준비나 해.”
그러고는 물기 어린 소리를 삼키며 말했다.
“또 마님이 새로운 드레스를 만들어 오기라도 하라셔?”
사실 헤르티안이 선물해준 드레스를 제외하고 아네트는 있는 옷을 덧대 입었다.
하지만 하녀들 눈에 아네트는, 그저 철없이 노는 영애로만 보일 뿐이었다.
‘리리 아가씨 말이 맞았어. 대공비라고 편하게 즐기려고 온 거야.’
게다가 부부 사이도 좋으니, 먹고 논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하녀들은 속으로 리리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몇 벌이나 만들면 되는데?”
퉁명스러운 물음에 보니사는 억울함을 삼키며 대답했다.
“50벌.”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