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남편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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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남편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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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남편이 있었나?
2023.03.25.
그 사람의 물건을 보면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이젠 무섭기까지 하군. 내가 결혼한 사실도 대공비가 알려주던가?”
“검에 달린 장식 보고 알았죠.”
검엔 황가의 문양 외에도 끝에 달린 실을 엮어 만든 장식이 있었다. 저렇게 정교하고 예쁜 걸 황제가 달아줬을 리는 없고, 부하가 선물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부인이면 몰라도.
“부인께서 칸타드님의 무사를 기원하신 검으로 직접 몸을 베면 어떡해요.”
“어차피 두 번밖에 본 적 없는 부인이다.”
나는 천을 감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럼 부인도 여기 같이 데려오셨어야죠.”
아무리 치정 싸움이 진절머리 난다고 해도 그렇지. 부인을 홀로 두고 와?
“이 막사에서 부인과 살라고?”
“집이라도 하나 지어서 살아야죠!”
“호들갑은. 어차피 정략결혼이다.”
무정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문득 헤르티안에게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계약 결혼인데도 내 건강이며 생활을 챙겨 주고 있으니까. 오히려 과해서 문제지.
“제 남편이랑은 정반대네요.”
“……남편이 있었나?”
그가 곧바로 되물었다.
“당연하죠. 제 미모를 보세요. 남자들이 가만히 두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그가 눈을 느른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건 그렇지.”
내 입으로 말했지만, 받아 줄 줄은 몰랐다.
“농담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답하시면 저 민망해요.”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말을 농담이라며 웃어넘겼다.
“사이는 좋은가?”
고민되는 질문이었다.
사이가 좋긴 해도 만들어진 관계였으니까.
“음. 저희도 정략결혼 같은 거라서.”
이번엔 솔직하게 말했다. 여기서 나는 대공비 대리니까.
***
한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잭슨은 길로타의 보고를 듣고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뭐? 정말 마님께서 5천만 골드로 산 약초를 30억에 되팔았다는 거야?”
“쉬, 쉬잇! 소리를 줄이십시오, 잭슨 님!”
길로타는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연신 잭슨의 큰 목소리를 단속시켰다.
“주인님께는 비밀이란 말입니다요.”
“왜? 이미 계약서도 쓰셨다며. 거래가 끝나면 말씀드린다고 하신 거 아니었어?”
길로타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요. 쿠르시아 쪽에서 마님이 직접 치료법을 전수해달라는 조건을 걸었거든요.”
“그걸 대공비 전하께서 받아들이셨다는 거야?”
“그렇습니다요. 그래야 30억을 벌 수 있다고 매일 나가셔요.”
그럼에도 영문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잭슨을 위해, 길로타는 그간 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무슨 상황인 줄은 알겠어.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요?”
“마님이 사업에 열정적인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잭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님께 배정된 예산이 부족했던가?”
수도에서의 생활, 아니 그 이상으로 대공비의 생활은 풍족했다.
삼시세끼 신선한 고기는 물론이오,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의상실의 드레스를 시즌마다 맞춰줘도 남을 만큼의 예산이었다.
그런데 왜? 뭐가 부족했기에?
“실은…….”
그때 길로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길로타, 나한테만큼은 숨김없이 말해줘.”
잭슨은 그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추궁했다. 대공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직속 상사인 잭슨에게까지 비밀로 하자니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달싹거리던 입에서 내막이 튀어나왔다.
“대공성의 보수 때문입니다요.”
“보수라니? 아, 성이 화려하지 않아서? 하긴 성이 좀 오래되긴 했지.”
“아유,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요. 대공비 전하는 치장 같은 데는 관심도 없으신데요. 그보다 성이 춥다며 보수를 원하셨습니다요. 그런데 쿠르시아로 예산이 빠져 보수할 돈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대뜸 사업을 추진하셨습니다요.”
“성을 보수하려고 사업을 추진한다고……?”
잭슨은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번뜩거렸다.
“아니, 아니야.”
“예?”
“얘, 생각을 해봐. 고작 추워서 사업을 벌이는 사람을 본 적 있니?”
“음…… 없죠?”
“나도 길로타 너도 여기서 생활한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성의 보수를 하자고 예산을 비축한 적이 없었잖아.”
“그건 그렇죠?”
잭슨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은밀히 말했다.
“마님이라고 다르겠어? 게다가 마님은 토끼 털, 여우 털, 다람쥐 털로 만든 옷에 따뜻한 방이 있는데 고작 추운 걸로 사업을 벌이겠냐고.”
“그건 그렇네요? 옷을 사면 모를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어떤 사람이 춥다는 이유로 사업을 벌이겠는가?
“분명 숨은 뜻이 따로 있는 거지.”
“아.”
역시 잭슨 님!
그간 묘하게 마님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었는데, 그게 다 이 때문이었구나.
길로타는 그간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렇담 마님께서는 왜 사업을 벌이신 걸까요?”
“길로타, 잘 들어.”
“예.”
잭슨의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무래도 마님께선…… 주인님보다 포부가 큰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예?”
“들어봐. 마님께서 예지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제국 내에서 충분히 사업은 가능해. 근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쿠르시아인을 상대로 30억을 뜯어내신 게 무슨 뜻이겠어?”
“잘 모르겠…… 헉.”
길로타가 뭔가 깨달은 듯 숨을 들이켰다.
“그래, 황제 폐하도, 전대 대공 전하께서도 하지 못한 설욕전을 대공비 전하께서 하시겠다는 뜻이지.”
아까보다 물기 어린 목소리의 잭슨이 코를 쓱쓱 문질렀다.
어쩐지 첫 만남 때부터 남다르다 했다.
매끄러운 손의 비결을 물어봤더니 다짜고짜 거래를 청했던 그때 말이다.
그것 하나로도 제게 거래를 청했던 사람인데, 영지민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는 건 말도 안 되지.
과연 대공이 선택한 여자다웠다.
잭슨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 느꼈다.
“무기를 많이 구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곧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마님이 그런 뜻이었다니. 저는 그런 줄도 몰랐습니다요…….”
“흥, 마님도 정말 고단수라니까. 그래도 눈치 못 챈 척해드리자고. 그래야 마님이 편하실 테니까.”
“그럼요, 그럼요.”
두 사람이 흥분에 사로잡힌 그때였다.
문이 끼익 열렸다.
문에 기대 서 있는 남자를 길로타가 먼저 발견했다.
“주, 주인님?”
그 자리엔 여기 있어선 안 될 인물, 헤르티안이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직이 말했다.
“솔직하게 보고할 기회를 주지.”
***
삼 주가 지났다.
나는 매일 같이 변방 마을로 가 병사들에게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헤르티안에겐 몹쓸 거짓말을 해야 했다.
“오늘도 나가십니까?”
“아직 둘러볼 곳이 남아서. 한 일주일 정도만 둘러보면 더는 둘러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의심이 들 법도 하건만, 그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묵묵히 알겠다는 대답만 해주었다.
그때마다 그가 내 사정을 알면서도 물어보는 건가 의구심이 들곤했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진작 말렸겠지.’
그때였다. 서재 문이 열리고 집사가 다급히 들어왔다.
“주인님, 마님! 지금 성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초대한 손님은 따로 없는데.”
“그게, 세르디스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 탓이다.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나가지 못하겠네요.”
***
블란디체로 오고 나서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세르디스 황자 전하.”
“아네트, 오랜만이야.”
북부에서까지 그를 볼 줄은 미처 몰랐다.
그건 헤르티안도 마찬가지였는지 옆에서 굳은 얼굴로 그를 무섭게 응시하고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금방 내쫓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네트 영애, 아니 이젠 대공비 전하이신데 입에 붙지 않네요.”
세르디스의 뒤로 쭈뼛거리며 따라 들어온 여인 때문이었다.
“비올렛 공녀님.”
그녀를 영지로 초대한 기억은 있었으나, 세르디스와 동행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세르디스가 무작정 비올렛을 쫓아온 것 같았다.
나는 질린다는 얼굴로 세르디스를 보다가 이만 체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응접실에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꼴이 우스웠다. 결국 이 결혼도 세르디스 때문에 이뤄진 일이었으니까.
“비올렛 공녀님!”
때마침 적막을 깨고 리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비올렛의 옆에 앉아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북부에 오신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예요?”
“리리, 오랜만이네.”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나 보다. 나를 대할 때와 다르게 기쁜 얼굴이었다.
나는 리리에게 신경을 끄고 세르디스를 찬찬히 살폈다.
‘이번엔 무슨 속셈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아무 생각 없이 이 먼 북부에 올 리가 없었다. 우리가 잘 사는지 지켜보는 것이든. 아니면 달리 속셈이 있든. 그가 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황자 전하께서는 어쩐 일이시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 근데 북부는 듣던 대로 삭막하고 춥구나. 성도 투박하고.”
그는 천진한 척 성을 둘러보기만 했다.
“잘살고 있는 거 보셨으면 저녁 드시고 가세요. 오늘 출발하면 내일 오후쯤엔 다시 성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아네트. 결혼하더니 왜 이렇게 날 서게 굴어. 혹시 둘이 사이라도 틀어진 거야?”
헤르티안이 큰 소리로 잔을 내려 두었다.
나는 그를 흘긋 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는 헤르티안과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도 내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는지 매일 새벽이 되어서야 침실에 들어와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뿐이었다.
‘이렇게 지내자는 건 아니었는데.’
그저 일에 지친 그가 나 때문에 더 지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관계는 냉랭해졌다. 인제 와서 내가 한 말을 주워 담기엔 이미 늦었다. 아니, 최소 거래가 끝난 후에야 그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우리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바란 말투군.”
상념을 깨는 헤르티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르디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래. 결혼 전에도, 결혼식 때도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해줬잖아. 벌써 잊었어?”
“그러긴 했죠.”
답은 내가 했다.
“너무 격하게 축하해주셔서 황후 폐하의 잔에 독이 든 줄도 몰랐잖아요. 저도 하마터면 독을 마실 뻔했고.”
일부러 세르디스가 벌인 일을 들먹거렸다. 내가 이 사건의 전말을 눈치챘다는 걸 알았으니, 꺼지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세르디스는 그 정도로 물러날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 일로 꽤 애를 먹었거든. 왜 독이 어머니께만 갔는지. 누가 노린 수는 아닌지.”
그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범인을 다른 사람으로 몰고 갔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독을 탈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는데 말이야.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