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단순히 정략결혼 아니었나?
(36/79)
36화 단순히 정략결혼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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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단순히 정략결혼 아니었나?
2023.04.05.
이 주 전 일이다.
길로타와 잭슨 앞에 헤르티안이 떡 하니 나타났을 때였다.
“그게…… 실은 말입니다요. 마님께서 직접 일을 맡지 않으면 5천만 골드를 손해 볼 수 있다고 하셔서 저도 예산을 날리는 일만큼은 막아보고자…….”
“맞습니다. 길로타는 그저 대공성을 위해서 주인님께 말하지 못했습니다.”
쩔쩔매던 그들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토했다.
그리고 처분을 기다렸다.
주인을 속이고 명령을 거부한 건 큰 죄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헤르티안의 표정이 유례없이 흉흉하니, 제아무리 아끼는 부하라도 벌은 피하지 못할 터.
“나보다 부인의 말을 따른 건 칭찬해주지.”
“예?”
하지만 헤르티안의 입에서 칭찬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저희를…… 칭찬해주신다는 말씀입니까요?”
“앞으로도 부인이 너희에게 부탁한 일이 있으면 그게 뭐가 되었던 반드시 따라라.”
“예? 예.”
결과적으로 가장 벌을 받아야 할 부분에서 칭찬받고야 말았다. 길로타와 잭슨은 허공에서 얼떨떨한 눈짓을 주고받다가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공과 대공비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물어도 아는 얘기였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공비의 말을 먼저 들으라니.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들에겐 잘된 일이었다.
그들의 안목도 인정받았고,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도 다 해낸 셈이니까.
“부인께서 사업을 진행하려던 게 대공성이 추워서였다고?”
“예. 마님께서 워낙 추위를 많이 타시다 보니 견디기 힘드셨나 봅니다요.”
이렇게 된 거 길로타는 있는 그대로 모두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대공성의 보수를 원하셨는데 제가 쿠르시아에 들어가는 예산 때문에 미처 대공성의 보수를 하지 못하였다고 보고했더니, 마님께서 바로 약초를 구입하셨습니다요.”
그 얘기에 헤르티안은 짧게 조소했다.
아네트가 추위에 약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속여서까지 사업을 벌일 만큼 힘들어하는 줄은 몰랐다.
밤에 몸을 따뜻하게 데운답시고 멋대로 그녀를 껴안은 것 빼면 자신이 아네트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던 셈이다. 오히려 그녀를 무리시켜서까지 사업을 벌이게 만들다니. 스스로가 나약하게 느껴졌다.
“거래를 하려고 매일 변방으로 나가 치료법을 알려주는 게 그 조건이었고?”
“그렇습니다요.”
어쩐지 몸에서 약초 냄새가 진하게 풍기나 싶었더니.
‘아네트답달까?’
하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에게 비밀은 없었으면 했던 건 자신만의 바람이었나.
아니었다. 다 해줄 것처럼 데려와 놓고 성의 보수도 하지 못하게 막은 능력 부족 탓이었다.
“다음 달에 성의 보수를 하도록 하지.”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예? 하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않아 필요합니다요.”
“진행해. 예산 걱정은 하지 말고.”
헤르티안의 강직한 목소리에 길로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산이야 어떻게든 메꿀 수 있다.
하지만 아네트가 이 일로 고생하는 꼴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사업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헤르티안이 성 보수비를 모두 마련한 때였다.
세르디스가 저택을 찾아왔다.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늘었다.
‘평생 한 번을 온 적 없는 놈이 이제야 이곳에 온 이유는 뭐지?’
아니나 다를까.
“설마 이 편지 말이야?”
안 그래도 의심하고 있던 찰나에 리리와의 대화를 엿들었다.
오래도록 오지 않았던 편지가 세르디스 손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같잖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혼? 같잖은 소리.’
한 번 빼앗겼지 두 번 빼앗길까. 이제 와서 발버둥 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그로부터 삼 일 뒤.
강제로 쫓아내려는 걸 눈치챘는지, 세르디스가 다리를 다쳤다는 핑계로 대공가에 드러누웠다.
아네트는 일찌감치 밖으로 나갔다. 헤르티안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세르디스가 머물기 시작한 후로는 줄곧 그랬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마을에 도착하고 마부가 바퀴에 밧줄을 감았다.
그동안 마을을 구경할 겸 아네트가 거리에 나오자, 그녀를 미행하는 무리가 붙었다. 그 자리에서 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서 처리하면 아네트가 눈치챌 텐데…….’
그래서 아네트가 마차에 오르기 직전. 강한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와 동시에 미행하려던 남자 셋을 제압했다.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마부는 자신을 발견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마차를 미행하는 무리가 있었다.”
“미, 미행이요?”
“처리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아네트는?”
“마님은 마차 안에 계십니다.”
헤르티안은 아네트가 타고 있던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뒀다.
마차는 출발했다.
이제는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난 산속으로 사라졌다. 마음 같아선 아네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녀를 뒤따르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기절한 사내 셋을 대공저의 감옥에 가뒀다. 그들을 심문하려고 했지만 전부 혀가 잘려 있었다. 혀를 자르는 건 입을 잘못 놀린 시종들에게나 가해지는 형벌이었다. 잔인한 방식이라 일반 귀족은 쉬이 행하지 못한다. 황족이라면 모를까.
그는 성을 뒤로하고 변방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 아네트가 보였다.
작은 막사 안에서 타국의 병사들에게 오목조목 알려주는 모습.
그는 열정 어린 아네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를 보고 헤벌쭉거리는 병사들의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럼, 아네트가 싫어하겠지?
어차피 아네트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오직 돈을 위해서 의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잠시 후, 그녀가 나왔다. 이번엔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눈치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울타리 근처에 기대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무거운 바구니를 가지고 큰 막사로 걸음을 옮길 뿐 시선은 주지 않았다.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저 막사에 있는 놈 눈빛도 이상했지.’
그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늘 아네트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아쉬운 눈빛으로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
그건 분명 어엿한 관심이었다.
‘이틀만 눈 감아 주자.’
백날 눈빛으로 마음을 고백해봤자, 아네트에게 들릴 리 없으니까. 저 남자도 세르디스 같은 종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네트에겐 자신이 있으니까.
오늘따라 아네트가 일찌감치 막사를 빠져나왔다. 반가움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그런데 아네트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눈빛이 이상한 놈의 품 안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정신 차려라!”
헤르티안은 심장이 느리게 뛰는 걸 느꼈다.
이 꼴을 보려고 기다린 게 아니었는데.
헤르티안의 눈이 눈보라보다 차갑게 식었다.
“목소리 줄이지?”
남자에게서 아네트를 빼앗아 오고 나서야, 비로소 후회되었다. 이런 후진 곳에 아네트를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되었다고. 아네트의 화를 사더라도 막았어야 했다고.
“당신이 새로운 영주인가?”
이기적인 타국의 종자에게 아네트를 내보인 게 잘못이었다.
“그렇다.”
헤르티안의 시선 끝에 푸른 약초 물이 밴 아네트의 손이 어른거렸다.
‘난 대체 뭘 한 거지?’
낮에는 아네트를 쫓고, 밤에는 영지의 일을 처리했던 그다. 한숨도 편히 자지 못하고 고생했던 건 이 꼴을 보기 위해서였나.
“내 거래 상대이기도 하니 깨어날 때까지 내가 돌보…….”
그리고 부인을 상대로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사내에게 이런 소리나 듣기 위해서였나.
“주군이 아니라 남편이라서다.”
헤르티안은 아네트가 끝까지 갖고 있었던 비밀을 지켜주지 못했다.
실은 지켜주고 싶지 않았다. 저놈에게 아네트가 자기 여인임을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다시는 제 눈앞에서 이상한 눈빛을 보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남편이라?”
예상대로 칸타드의 눈빛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일 테니까.
대공의 부인, 대공비.
단순한 대리가 아니라 그녀 자체였다.
“블란디체의 대공비였다……?”
“변방에 살다 보니 보는 눈도 없어졌나 보군.”
아니.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그대로 믿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으니까.
아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범상치 않은 여인이 고작 평민일 리는 없었으니까.
애써 외면한 것이다. 그녀가 대공의 부인만 아니기를.
언제 만났다고 관심을 품었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다음번에 수도로 돌아갈 때는 함께 가고 싶어졌을 뿐. 함께 있으면 편했을 뿐이었다.
“알았으면 꺼져라.”
잠시 꾸었던 단꿈이 단번에 깨졌다.
칸타드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단순히 정략결혼이 아니었나?”
헤르티안은 그 질문이 썩 기분 나빴다. 아네트가 낯선 사내에게 둘만의 이야기를 시원하게 털어둔 것만 같아서. 그게 속이 상했다.
“알 필요 없다.”
그렇기에 에둘러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선을 그었다. 아예 이 울타리 밖의 타국인을 대하듯이.
***
긴 암전이 이어졌다.
묵직한 몸을 일으켰을 땐, 캄캄한 방에 켜진 촛불 몇 대가 보였다.
수도와는 거리가 먼 삭막한 겨울 풍경.
그제야 오래된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칸타드!”
꽥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돌아가야 해.
헤르티안이 여기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칸타드는 누굽니까?”
그런데 그때.
곁에서 헤르티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분명 여기는 변방의 집이 맞다.
“부인.”
그런데 헤르티안이 떡 하니 있는 건 왜일까.
환영이 아니라 진짜다. 헤르티안이 변방으로 올라왔다.
모두 다 알게 된 거다.
‘이제 하루만 버티면 되는데!’
여태 잘 버텨놓고 인제 와서 들킬 건 또 뭔지.
나는 일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화를 샀다가는 앞으로 한 보 남은 거래까지 무산이 될 수 있었다.
“헤르티안…….”
“칸타드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데.”
“아뇨. 그건…….”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벽에 기댄 채 나를 내려다 보고 있던 헤르티안의 눈동자가 내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전부 설명할게요.”
마치 바람을 피우다 걸린 여인 같았다.
차라리 바람이면 나았다. 서로 사생활은 존중해 주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사업은 가주인 헤르티안과 직결되어있으니 함부로 건들지 않는 게 맞았다.
“칸타드는 제 거래 상대예요.”
나는 차근히 이야기를 꺼냈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미 그는 나에 대해 모든 걸 보고 받았다. 또한, 쿠르시아인을 상대로 거래했으며 그 수익이 약 30억을 오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모른 척해줬던 거예요?”
내가 놀라 묻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중간에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너무 열정적이셔서.”
“그랬군요…….”
어쩐지 한 달 동안 대공비가 영지를 돌아다닌다는데 흔쾌히 허락해준다 싶었다.
“다음부터는 몸을 상해가면서까지 일을 벌이진 말아주십시오.”
그가 내 손을 잡아 제 가슴에 올려두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세차게 팔딱거렸다.
“보다시피 부인이 아프면 제 상태가 심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