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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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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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사냥
2023.04.12.
오늘따라 해가 화창했다.
그리고 창가에 내리쬐는 빛을 맞는 비올렛도 환한 웃음을 지었다.
“공녀님께서는 안 가셔도 되겠어요?”
“저야 전하가 없으니까 편하게 비전하랑 말할 수 있어서 좋은걸요.”
세르디스가 떠나고 나는 비올렛과 둘만의 티타임을 가졌다. 비록 날이 추워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지만, 따뜻한 햇살과 그윽한 차향이 여유로움을 가져다주었다.
“블란디체령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 몰랐어요.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다니. 햇빛에 반짝거리는 게 무척 예뻐요.”
“보기엔 예쁘지만, 밖에서 차를 즐기지 못해서 아쉬워요.”
“나중에 수도에 올라오면 저희 저택에서 같이 마셔요.”
“좋아요.”
나는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비올렛은 차를 홀짝거리면서 한참 풍경을 구경하다가 돌연 내게 다가와 물었다.
“여기는 살 만한가요?”
수도에 가족들을 두고 혼자 나와 타지에 사는 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금 추운 걸 빼면 살 만해요. 사람들도 다 좋고요.”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행이에요. 근데 리리랑은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던데……. 제가 리리에게 잘 말해 볼까요?”
“아니에요. 리리도 다짜고짜 새언니랍시고 제가 나타나니까 어색해서 그런 걸 거예요.”
아마도.
사춘기 소녀 마음은 나도 모르겠다.
“그렇군요.”
“공녀님은 리리랑 어떻게 알고 지낸 사이예요?”
“리리가 대공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연회장에서 오가며 만났어요. 처음부터 저를 잘 따라 주더라구요.”
역시 비올렛.
그녀는 묘하게 마음이 가는 매력이 있었다. 세르디스만 모를 뿐이지.
특히 저 볼때기. 하얀 찹살떡 같은 저 볼은 볼 때마다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조금 더 친해지면 몰래 시도해 봐야겠다.
“근데 신혼집이라기엔 성이 조금 삭막해 보여요. 제가 저택으로 돌아가면 신혼 분위기 나는 장식을 선물로 보내드릴게요.”
비올렛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해맑게 말했다.
대공성이 삭막해 보이기는 했다. 전대 대공께서 부인이 안 계셔서 성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
“성이 좀 허전하죠?”
“음. 첫눈에 반한 상대라고 하셔서 저는 조금 더…… 뭔가를 기대했었나 봐요.”
그녀가 몸을 배배 꼬았다.
그 이상으로 무언가 원하는 눈치다. 그때처럼 첫눈에 반한 상대와의 결혼이 그녀에게는 환상처럼 보이는 거다.
‘공녀님이 원하신다면야 기대에 부응해주는 수밖에.’
나는 후후 웃으며 그녀의 손을 끌었다.
“공녀님 이쪽으로.”
그러고는 응접실에 있는 장식장 앞으로 데려갔다.
“응접실은 손님들이 왔다 가시는 곳이라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는데. 공녀님이 궁금해하시니까 특별히 보여드리죠.”
그리고 굳게 닫힌 장식장 문을 활짝 열었다. 그와 동시에 비올렛의 눈이 보름달처럼 동그래졌다.
“이게 다 뭐예요!”
“저희 둘이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눌 때 이용하는 물건이랄까요?”
같은 문양의 두 개의 잔.
두 개의 스푼.
두 개의 깃펜.
.
.
.
마지막으로 한 쌍의 원앙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이름하여 커플 아이템.
대공성으로 오기 전에 미리 구비해 둔 물건이었다. 응접실을 제외하고도 욕실, 다이닝룸, 침실 곳곳에 누가 봐도 ‘우리 신혼입니다.’ 할 만한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나중에 부모님이 놀러 오시거나 집안 어른들이 오셔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말이다.
“이걸 공녀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네요.”
나는 살짝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지금 입고 있는 속옷도 그이랑 같은 문양을 그린 것이랍니다.”
“어머나…… 부끄러워라.”
비올렛의 얼굴이 소녀처럼 수줍게 달아올랐다.
귀엽게도 감탄을 뱉으며 부러운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공녀님께서 세르디스 전하와 결혼하시면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정말요? 너무 행복해요.”
비올렛의 얼굴이 기쁨에 물들기도 잠시.
“공녀님!”
응접실 문이 열리고, 리리가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그녀는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한 채 비올렛에게 쪼르르 달려가 찰싹 붙었다.
“리리? 여기는 웬일이야.”
“공녀님. 리리랑 놀아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리. 새언니한테는 인사 안 하니?”
리리는 슬쩍 나를 흘겨보더니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실랑이가 있던 날 이후로 줄곧 이런 상태였다.
“새언니, 좋은 오후예요.”
인사 외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해해보려고 먼저 손을 내밀어도 그녀는 단단히 삐쳤는지 나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시어머니 모드가 되어 버렸다.
“리리. 비 전하한테 버릇없게 굴면 안 돼.”
보다 못한 비올렛도 한 마디를 얹었다.
“알겠어요. 앞으로는 예의 바르게 굴게요. 그나저나 공녀님, 저랑 같이 사냥 가요!”
“어머, 사냥?”
사냥 얘기에 비올렛이 반색했다.
“성에 활 많아요. 공녀님은 활을 잘 다루시잖아요. 실력을 보여주세요. 네?”
“하지만 수도 외곽에 있는 사냥터랑 다르게 북부는 지형도 기후도 달라서 저희가 사냥할 만한 토끼나 사슴도 없는걸요.”
“대신 다른 작은 마물들이 있어요. 솜털을 두른 작은 동물도 있는데 얼마나 귀엽다고요.”
리리가 흥분하며 비올렛을 끌어당기는 걸 내가 막아섰다.
“안 돼.”
“새언니한테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
“그럼 더 안 되지. 내가 같이 가지도 못하는데 만약에 사냥을 나섰다가 공녀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물 거니?”
“제가 물게요.”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오면 생각해 볼게.”
내 말에 리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새언니!”
“그래, 나 네 새언니야. 그러니까 말 잘 들어야지? 손님 앞에서 소리 지르고 버릇없이 굴면 내가 널 더 못 믿겠는데?”
리리 앞에 서면 자꾸 잔소리할 게 생긴다.
말다툼을 지켜보던 비올렛도 멋쩍게 웃으며 슬쩍 손을 빼냈다.
“리리. 나중에 비전하랑 수도로 놀러 와. 거기에 영애들이 갈 수 있는 안전한 사냥터가 있으니까 같이 가자.”
“공녀님! 왜 새언니 편을 들어주세요. 공녀님도 같이 사냥하고 싶잖아요.”
“나는 수도에서 언제든지 하면 되니까.”
“하지만…….”
리리는 말로 스스로를 잘 깎아 먹는다. 그저 서글서글하게 굴면 내가 어련히 보내줬을까.
하지만 여기서 내가 봐주면 리리의 버릇은 절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자, 여기 앉아서 차나 같이 마시자.”
비올렛이 소파에 앉아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고 리리의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
“오늘…… 내 생일이란 말이에요!”
생일?
아차 싶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 누구의 생일을 챙길 겨를이 없었으니까.
적어도 헤르티안이랑 리리의 생일은 알아뒀어야 했는데. 내 실수였다.
“공녀님은 그렇다고 쳐도 새언니도 내 생일 몰랐죠?”
화살은 당연히 내게로 날아들었다.
조금 억울했다.
그럼 나랑도 친하게 지내주든가!
초야 내기도 이겼는데, 새언니 취급도 안 해주면서 생일이라고 밀어붙이면 내가 봐줄 것 같았나? 흥.
“그럴 줄 알았어요. 기대도 안 했어요.”
리리가 흥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나를 싫어한다고는 하나, 세상에 둘뿐인 가족 중 하나인데 생일을 까먹은 건 심했나?
나는 일 분 동안 깊게 고민했다.
결론이 났다.
다른 날도 아닌 생일에 리리와 싸울 수는 없지.
에휴.
“리리. 네가 원하는 사냥하러 가자.”
새언니가 되어서 너는 내 생일을 알았냐? 하며 쪼잔하게 굴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대공님한테 기사를 내어달라고 할 테니까 기다려.”
리리는 그제야 입을 꾹 다물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공녀님. 리리랑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저는 대공님께 다녀올게요.”
“네, 그럴게요.”
***
이번 기회에 리리랑 화해하기로 마음먹었다.
헤르티안에게 리리가 좋아하는 음식도 물어보았고, 미리 케이크도 주문해 놓았다.
생일 선물로는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리리가 좋아하는 분홍색의 공단 리본으로 선택했다. 예쁘게 포장하고 편지도 동봉했다.
그간 서로 서운한 감정은 풀고 서로 아끼면서 잘 지내보자고.
리리도 나랑 어색하게 지내는 게 불편할 테니까.
근데 이것도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
모르겠다. 어색하게 지내는 거지 뭐.
“아이 예쁘다.”
분홍색 실링이 깔끔하게 찍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리리가 들어오자마자 파티할 수 있도록 방 하나를 분홍색으로 꾸몄다.
생각보다 잘 꾸몄는데?
‘나 이런 데에 소질 있는 걸지도 몰라.’
누군가의 생일을 챙긴다는 건 여전히 기쁜 일이었다. 빙의 전에는 절대 누려보지 못할 추억이기도 했다. 부디 리리가 마음에 들어 하길 바라며.
나는 선물은 방에 두고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헤르티안도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일정이 되지 않아 대공가의 기사를 붙여주었다.
“대공비 전하, 안녕하십니까.”
난 조금 생경한 눈으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수도에는 경비대가 곳곳에 배치되어 개인 기사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사와 함께 다니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선 헤르티안의 최측근인 오센도 있었다. 뭔가 불만에 차 있어 보이는 오센에게도 인 인사를 건넸다.
“오센이죠? 대공님의 보좌관이신.”
“예.”
오센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나를 딱딱하게 대했다. 내가 딱히 잘못한 게 있나?
“오센도 제가 싫어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지만, 그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 말고 또 싫다는 사람이 있으셨습니까?”
묘하게 걱정스러우면서도 기분 나쁜 말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은 찡그린 채로 입꼬리를 당겼다.
“저도 저 싫다는 사람이랑 말하기 싫어요. 오센은 리리랑 공녀님이나 잘 지켜주세요.”
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앞으로 척척 나아갔다.
오센이 뒤따라왔지만 시선을 주진 않았다.
헤르티안과 다르게 난 속이 좁은 편이니까.
사냥터는 마을에 있는 산길 중턱에 위치했다. 평평한 평지 위로 얕게 쌓인 눈과 튀어나온 풀. 시원하면서 신선한 공기가 피부를 간지럽혔다.
‘나오니까 좋긴 좋다.’
몰래 나온 것도 아니고 비올렛과 함께 나온 거라 더 들뜨는 기분이었다.
리리도 얼굴에 함박웃음이 맺혔다. 물론 기분이 좋다고 해서 내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공녀님. 얜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제 친구 알리예요.”
“알리? 이름이 예쁘다.”
“꽁지깃도 정말 예쁘죠?”
비올렛에게 제 말을 소개해주는 리리는 행복해 보였다.
그래도 리리가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우리는 함께 사냥터에 자리를 잡았다.
“천막을 쳐 놓겠습니다.”
“네.”
기사들은 마차에서 짐을 내려 간이 천막을 세웠다.
“리리, 아직 가지 마.”
“제가 여기 한두 번 온 줄 아세요? 여기는 안전해요.”
“저는 리리를 따라갈게요. 천막이 완성되면 뒤따라와 주셔요.”
“알겠습니다.”
나도 말 위에 올라 그녀를 뒤쫓았다. 멈춰 선 곳은 침엽수가 빼곡한 숲이었다. 리리는 나무 뒤에 숨어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이 근처에 몽글이가 서식해요.”
“아까 네가 말한 털복숭이?”
“네, 귀여워도 잽싸니까 빠르게 사냥해야 해요.”
비올렛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리리 뒤를 쫓았다. 나는 연신 뒤를 바라보며 기사들이 올라오는 길을 두리번거렸다.
“기사들이 오면 움직이자.”
“그럴 시간 없어요. 사람들이 몰리는 걸 알면 그 전에 다 도망가 버릴걸요?”
“그래도 위험해.”
“새언니. 여기까지 와서 사냥도 못 하고 돌아가라고요? 제 생일인데.”
그럼 멀리 가지 말고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
“알겠어요.”
“제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네트.”
“리리가 돌발행동하지 않도록 공녀님이 막아주세요.”
“그럴게요.”
그나마 비올렛이라도 있어서 한시름 놓았다. 멀어지는 두 사람은 금세 사냥감을 발견한 건지 나무 뒤에 자리를 잡았다.
기사들은 한참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우리가 숲으로 들어선 길을 찾지 못한 건가? 나는 숲길과 리리 일행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숲길 입구로 몇 발짝을 옮겼다.
기사들은커녕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럴 거면 천막은 나중에 치고 함께 오자고 할 걸 그랬나 보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였다.
저쪽 숲 아래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칸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