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말 안 듣는 시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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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말 안 듣는 시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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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말 안 듣는 시누이
2023.04.15.
이곳은 변방 마을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의 사냥터.
블란디체령에 칸타드와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손에 들린 활과 무기를 보아하니 여기에 사냥을 나온 것 같았다.
‘그래도 저건 엄연히 불법인데.’
제국민도 아닌 쿠르시아인이 이곳에 나와 사냥하는 건 국가 간 금지 조항이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 사냥을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식량문제는 아니다. 단순히 사냥을 즐기러 나왔을 가능성이 컸다.
여기 있는 동안 그들이 할 일이라곤 가끔 내려오는 몬스터를 잡는 일이니까. 그리고 쿠르시아인에게 호의적인 마을 사람들은 이를 눈감아 줬겠지.
이해는 갔다. 하지만 곧 올라올 기사들 눈에 띄었다간 일이 커질 수 있었다.
‘얼른 가서 말해줘야겠어.’
그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칸타드에게 할 말도 남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겨, 막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때였다.
말이 숲길을 헤쳐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가 획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리리와 비올렛이 말을 타고 숲속 깊은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앞장선 리리 뒤를 급하게 비올렛이 쫓았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리리! 멈춰!”
기어코 새언니 속을 뒤집어 놓는 사촌 시누이 때문에 하루라도 편하게 쉴 날이 없었다.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말 위에 올라탔다. 칸타드 일행도 내 목소리를 듣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리리!”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리리는 아무도 없는 사냥터를 거침없이 헤집고 달렸다.
‘얌전하게 있겠단 말을 믿은 내 잘못이지.’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늦었다.
기사들은 올 생각도 없어 보였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숲 한 가운데 다다르자, 리리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나는 냉큼 말에서 내려 그녀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내려.”
“새언니 제가 뭘 발견했는지 알아요? 저기 안으로 겨울 사슴이 들어갔다고요!”
겨울 사슴은 환상의 동물이었다.
블란디체에 내려오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그게 이곳에 있다고 해도 기사들 없이 우리끼리 가는 건 위험했다.
“사슴이고 뭐고 기사들 올 때까지 기다려.”
당장 대공성으로 끌고 가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열아홉 번째 생일은 새언니 때문에 망쳤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아니 뭐 하러 기사들은 데려온 거예요? 제가 여기 한두 번 온 줄 알아요? 새언니도 괜한 걱정이라니까. 여긴 제 놀이터 같은 곳이에요. 기사들 없이도 수십 번 들린 곳이라고요.”
저절로 튀어나오려던 한숨을 삼키곤 허리에 손을 짚었다.
“리리. 올 때 약속한 것과 다르잖아. 분명 여기 오게 해주면 안전하게 사냥한다고 했어, 안 했어?”
“……알겠어요.”
웬일로 리리가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고삐를 놓았다.
“그래, 안전하게 사냥하자. 끝나고 돌아가면 성에서……!”
그 순간이었다.
“사슴만 보고 돌아오면 새언니 말대로 얌전히 사냥할게요!”
“리리!”
고삐를 놓자마자 리리가 곧장 말을 출발시켰다.
속은 내가 바보지!
다신 사냥 허락 하나 봐라.
“너 거기 안 서?”
득달같이 그녀를 쫓아가는 내가 늙는 기분이었다.
리리는 멈출 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겨울 사슴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속도 줄여!”
홀린 듯이 숲을 따라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마님!”
다행히 기사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리리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나나 기사들이나 역부족이었다.
“저 끝으로 가면 절벽입니다!”
분명 그녀도 들었을 텐데,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세찬 기세에 리리의 몸이 크게 덜컹거릴 무렵이었다. 그녀가 타고 있던 말이 쓰러져있던 거대한 나무를 만나 크게 튀어 올랐다. 동시에 리리도 공중에 튀어 오르더니 자취를 감췄다.
“리리!”
나는 그녀가 사라진 곳을 따라 무작정 뛰었다. 그곳엔 아득한 절벽이 광활한 풍경을 뽐내고 있었다.
감상할 틈은 없었다. 리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리리는 절벽 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를 힘껏 끌어당겨 안전한 곳으로 데려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고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뒤따라온 기사들에게 리리를 부탁했다.
“얼른 대공성으로 데려가야 해요.”
“네, 마님!”
기사 하나가 부랴부랴 리리를 업었을 때였다. 그녀를 걱정스럽게 살피던 비올렛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리리가 눈을 떴어요!”
그녀 말대로 리리가 간신히 눈을 뜬 채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리…… 알리는요?”
“알리? 네 말?”
“응…… 알리는 괜찮아요?”
이 와중에 말 걱정을 하고 있다니.
오센이 확인해보고 오더니 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앞 다리 하나가 부러져 데리고 가기는 무리입니다.”
“그럼, 알리를 버리고 가려는 거예요?”
리리는 금세 울먹거렸다.
“우리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리리를 데려갈 기사를 제외하고 기사 둘과 나와 비올렛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맨손으로 알리를 끌고 가기란 무리가 있었다.
“일단 나가서 사람을 불러오자.”
“안 돼요! 그럼 알리 혼자 여기서 추워 죽으라는 말이에요?”
“그 말이 아니라……!”
“새언니는 잔인해요.”
리리가 기사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히끅 히끅 눈물을 쏟았다.
마음이 착잡했다.
리리에겐 저 말이 혼자되고 나서 곁을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을 테니까.
내겐 카시안 같은 존재나 다름없겠지.
“제가 알리 곁에 있을 테니까 리리를 데리고 먼저 가실래요? 수레를 가져와 주세요.”
고민 끝에 오센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본인의 허술함을 자책하던 그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하나를 구하자고 마님까지 위험에 빠트릴 순 없습니다. 마님께서 찬 바람을 오래 맞지 않게 하라는 주인님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그가 무얼 우려하는지 알고 있다.
“제게 방법이 있어요. 근처에 저와 약초 거래를 했던…… 쿠르시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할게요.”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쿠르시아인이 블란디체 영지에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역시나 그 부분을 걸고넘어졌다.
“변방에 출몰하는 몬스터는 쿠르시아 쪽이든 블란디체 쪽이든 그들이 모두 소탕해요. 허락 없이 국경을 넘은 건 잘못이지만 이걸 이용해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볼 생각이에요.”
내심 당황한 듯 보였던 오센도 생각보다 쉽게 수긍했다.
“저와 함께 가시죠.”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싫어!”
리리였다.
코를 훌쩍거리던 그녀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 모습을 보니 쿠르시아에서 온 영지민의 뺨을 내리치던 리리가 스쳐 지나갔다.
“쿠르시아인한테 도움을 구한다고요? 새언니 미쳤어요?”
“그럼 알리를 안전하게 데려갈 방법은 없어.”
“저런 야만인들에게 알리를 맡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아요.”
쿠르시아인과 거래한다고 하자 리리는 금세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네 오랜 친구라며 친구를 이 추위 속에서 얼어 죽게 만들 거야?”
“알리가 편하게 가도록 지금 죽여 주세요.”
진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리가 쿠르시아인에게 반감이 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무작정 감정으로 밀어붙이는 건 좋지 않았다.
“리리. 여기 있는 쿠르시아인들은 얼마 전에 나와 거래했던 이들이야. 그리고 영지민이 돌아오는 길을 안전하게 터주기도 하는 사람들이라 안심해도 돼.”
“여기 사는 쿠르시아인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싫어요.”
“지금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알리를 구하는 데만 집중하자. 응?”
리리는 고개를 푹 묻어버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는 대화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만 리리를 데리고 성으로 돌아가 주세요. 여기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그렇다면 나도 친절한 새언니 노릇은 때려치우는 수밖에.
“새언니!”
“넌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네 말대로 알리는 여기서 얼어 죽게 둘 거고 쿠르시아인들은 당장 추방할 테니까.”
나는 무감한 눈으로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도 리리의 표정은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왜 그렇게 봐? 네 멋대로 사냥을 나와서 말 안 듣다가 알리가 다리 하나가 똑 부러진 채 얼어 죽게 된 거잖아. 그리고 알리를 지금 죽여 달라고? 싫어. 나도 알리가 꿈에 나올까 봐 무섭거든. 자 검을 줄 테니 네 손으로 직접 알리 목을 베고 와.”
옆에 있던 오센의 검집에서 검을 꺼내 그녀에게 바짝 들이밀었다.
“자, 어서.”
그러자 리리의 얼굴이 곧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씨이…… 얼른 성으로 돌아가요!”
차마 그건 못 하겠나 보지?
결국 그녀는 알리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사냥터를 떠났다. 어찌 되었든 이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비올렛은 남은 기사 하나와 함께 수레를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이곳을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검을 오센에게 건네주었다.
“멋대로 꺼내서 미안해요. 리리에게 겁을 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오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콧등을 찌푸렸다. 기사의 검을 허락 없이 꺼내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기분 많이 나빴어요?”
“그렇다기보다 마님이 생각보다 착한 분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칭찬인지 지적인지 모를 말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의외인 양 쳐다보는 기사를 응시했다.
“제가 착하지 않아서 실망인가요?”
성의 안주인이라고 꼭 너그럽고 착해야 하나?
되레 오센에게 조금 실망할 뻔했다.
“아뇨. 단지 주인님 이상형이 착한 여자인 줄 알았거든요. 주인님이 매번 마님이 착하다 칭찬하셔서.”
하지만 오센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헤르티안이 내 칭찬도 하고 다니는구나.
역시 프로다웠다.
보이지 않는 데서도 틈틈이 계약을 잘 이행하고 있었다.
나는 뿌듯하게 웃다가 오센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센의 이상형은 착한 여자예요?”
“아뇨. 예쁜 여자입니다.”
그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도 자상한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그럼 대공님도 그런 여자가 이상형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