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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 (40/79)


40화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
2023.04.19.


칸타드 일행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이미 주변에 주둔해 있었다.

칸타드와 정면으로 마주치긴 했는데, 그에게 평소대로 칸타드 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반가우면서도 싫은 눈빛이었다.

내가 먼저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가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내 정체를 알고 있구나.’

긴가민가했지만, 내가 그의 품에서 기절한 게 맞았다. 칸타드는 은근히 정이 많아서 내가 깨어날 때까지 지켜보려고 했을 테니까. 어쩌면 헤르티안과 직접 대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대장장이 딸 아니야?”

“아가씨! 오랜만이야!”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다고.”

다른 병사들은 내 정체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두 친숙한 얼굴이라 미소가 저절로 피어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한가로이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칸타드 앞으로 곧장 다가가 말했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칸타드는 눈으로 나를 살피더니 이내 짧게 대답했다.


“그러지.”

오센과 몇 발치 떨어진 곳에 둘이 마주 섰다.


“돈을 받고도 아무 얘기가 없어서 죽었나 했다.”

운을 먼저 뗀 건 그였다.


“성안에 손님이 찾아와서 갈 겨를이 없었어요. 그래도 먼저 연락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사과는 되었다.”

“그리고 날짜가 하루 비었는데도 넘어가 준 것도 고맙구요.”

여러모로 칸타드에게는 고마웠다.

어쨌든 큰 요구 없이 거액으로 약초를 거래해준 사람이니까.


“알면 되었다.”

“그런데요, 칸타드 님.”

나는 이전처럼 그를 이름으로 부르며 은근슬쩍 운을 뗐다.

시간이 급박했다. 알리가 산 짐승들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었고.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뭘 말이지?”

“지금 숲의 끝에 말이 하나 쓰러져 있어요. 다리가 부러져 걷지 못하는 상황인데 저희 힘으로 말을 끌고 가기는 무리예요.”

“그래서 말을 구해달라?”

그는 거절하지 않고 되물었다. 나는 희망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이 별로 없어요. 저기 저 수레에 말을 함께 올려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들이 사냥감을 가져가려고 끌고 온 수레가 있었다. 저 정도면 알리를 막사까지 데려가는 데 무리가 없을 크기였다.


“부탁인가?”

“부탁을 가장한 거래예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숲을 마음대로 이용한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생각보다 저렴한 편입니다.”

풉,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보는 편한 얼굴이었다.


“너는 타고난 사업가다.”

“그럼 약초 좀 더 사실래요?”

“됐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얼마든지 약초를 찾아달라고 덧붙였다.

칸타드는 기꺼이 병사들을 데리고 알리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덕분에 지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막 숲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칸타드가 다가와 나직이 물었다.


“정략결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헤르티안을 만난 모양이었다.


“정략이랑 비슷하다고는 했죠.”

계약 결혼이니까.


“내가 알던 정략결혼이랑은 형태가 아주 다르다.”

“그건 칸타드 님이 부인 생각을 심각하게 안 해서 그런 거죠.”

“크흠. 아무튼.”

그가 찔렸는지 목을 가다듬었다.


“부러웠다.”

오랜 시간 부인과 떨어져 있다 보니 외로웠던 모양이다.

저런 새삼스러운 말을 내뱉는 걸 보니.

***

알리는 빠르게 구출되었다.

아네트는 막사에 다다르기 전, 칸타드 일행을 먼저 돌려보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띈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얼마 가지 않아 비올렛이 도착하고 우리는 알리를 무사히 옮겨 태웠다.

대공성에 마차가 다다랐다.

오센은 곧장 헤르티안에게 조금 전 일을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기사로서의 소임을 못 한 건 사실이니까.

그때, 아까부터 줄곧 말이 없던 걸 눈치챈 아네트가 오센 옆에 따라붙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 일은 제가 리리를 제대로 간수 못 한 탓이니까. 대공님에게도 그렇게 말할 생각이에요.”

“엄연히 제 불찰입니다.”

“에이.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사실 이걸로 서로 비밀로 하자는 거예요. 쿠르시아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해주세요. 저도 오센이 늦게 온 거 말 안 할 테니까.”

아네트가 입술에 검지를 살짝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그럼 그렇게 알게요! 오늘 고생했어요.”

그리고 망토를 꽉 싸매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마님이었다.

그저 주인의 오랜 첫사랑 상대이자 가끔 주인을 바보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오센의 눈엔 아네트가 썩 곱게 보이지 않았다.

종종 하녀들이 떠들어대는 대로 수도에서 곱게 자란 귀족 영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뭇 영애들보다 조금 더 아름답다 정도?

그런데, 마님의 최근 행보가 심상치 않다.

지참금으로 산 비싼 원단으로 하녀들 옷을 지어주질 않나, 한 달 동안 30억 골드를 뚝딱 벌어오질 않나.

적국인 쿠르시아인을 멋대로 움직이는 건 놀라운 일이긴 했다.


‘확실히 다른 영애들이랑은 다르시지.’

물론 큰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약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으니까. 오센은 그저 마님이 건강 문제로 주인을 걱정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하녀들은 처참한 방 안의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홍색 세르티아 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바닥에 짓이겨져 있었으며 하얀 생크림은 벽에 치덕치덕 발려 있었다. 마침내 아네트가 선물한 리본까지 모두 망가트리고 나서야 리리는 소파에 늘어지듯 누웠다.


“하…… 진짜 짜증 나 죽겠네.”

방금까지 헤르티안에게 혼이 나고 돌아오는 길이다.

오센이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바람에 화를 피할 수 없었다.

아네트가 급하게 들어와 감싸주긴 했다만, 그래도 화가 났다. 헤르티안이 자신에게 화를 낸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극히 싫어하는 쿠르시아인들과 거래하지 않나, 이번에는 기어코 부탁까지. 가짜 새언니인 주제에 가족인 양 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리리 아가씨……. 그래도 마님께서 열심히 준비해주신 건데.”

“그래서? 그럼 내가 이 기분으로 고맙다고도 해야 해?”

기껏 아네트가 준비한 예쁜 케이크와 선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래야 속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물론 여전히 분은 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네트가 준 리본을 머리에 달고 히죽히죽 웃으며 가족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다.


“너희도 이상하지 않아? 쿠르시아에 뭐라도 잡힌 사람처럼 자꾸 쿠르시아인들이랑 뭔가를 벌이잖아.”

하녀들은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희 제국민을 구해오시려고 하는 일이신걸요.”

“너희도 참. 쿠르시아에서 마음 편히 먹고, 자고, 살림 차린 사람들이 여기 오는 게 안 불편해? 나였으면 거기서 콱 죽어버렸을 텐데.”

과감하고 거침없는 언사에 하녀들이 저마다 숨을 들이켰다.

리리가 가끔 뱉는 말은 그녀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너희는 나가 봐. 청소는 다른 애들 시키지 뭐.”

“네, 아가씨…….”

밖에 나온 하녀들은 저마다 한숨을 토해냈다.


“리리 아가씨. 마님이랑 사이가 많이 안 좋은가 봐.”

“그러니까. 그래도 마님이 생일이라고 챙겨주신 선물을 찢으실 줄은 몰랐어.”

“나 약간 무서웠다니까?”

“너 여기 크림 묻었다.”

하녀들은 리리가 케이크를 던졌을 때 묻은 크림을 서로 떼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들 뒤로 그림자가 생겼다.


“리리가 내 선물을 찢었다고?”

아네트였다.

***

리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나랑 티격태격한 것도 모자라, 헤르티안까지 그녀를 몰아붙여서 지금쯤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고 있을 것이다.

리리를 혼자 선물이 있는 방으로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기분으로 나와 함께 생일 선물을 열어볼 기분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생일 케이크 촛불은 같이 꺼야겠지?”

나는 방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망설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사냥을 나가기 전, 예쁘게 장식해두었던 방으로 향했다. 그 앞에 막 나오는 하녀 둘이 보였다.

벌써 정리를 하나 싶어 급하게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리리 아가씨. 마님이랑 사이가 많이 안 좋은가 봐.”

“그러니까. 그래도 마님이 생일이라고 챙겨주신 선물을 찢으실 줄은 몰랐어.”

“나 약간 무서웠다니까?”

선물을 찢었다고?

순간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리리가 아무리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선물을 찢을 정도로 막돼먹은 애는 아닐 텐데.

그래서 아닐 거라 생각하고 물어보았다.


“리리가 내 선물을 찢었다고?”

나를 돌아본 하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믿기 싫지만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마, 마님.”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되겠지.”

하녀들은 차마 나를 말리지 못하고 뒤를 따랐다. 문이 열리자 하녀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왜 그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훅 전해지는 달큰한 냄새. 케이크는 형체도 없이 분리되어 함께 초를 꽂을 수 없게 되었다. 방 곳곳에 달아두었던 리본 끈은 넝마가 되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리리가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보석은 아까우니까 가져갈까?”

리리는 선물한 리본 가운데 있는 보석만 쏙 떼어서 요리조리 보았다.

그 모습이 참 얄밉게 보였다.


“그거라도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새, 새언니?”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봐. 누가 보면 연말 파티라도 벌인 줄 알겠어.”

저절로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보석은 쓸 만하네요. 잘 쓸게요.”

리리가 일어서며 말했다. 목소리 하나는 뻔뻔했다. 놀라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 잘 쓰렴.”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더는 리리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아 참. 그게 네 마지막 용돈이니까 아껴 쓰렴.”

나는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리리가 정신을 차리든 화를 내든 알 바 아니었다.


“용돈을 끊으려고요? 그러세요. 그럼. 헤르티안 오라버니한테 가서 달라고 하면 되니까.”

“그러렴. 계속 대공님께 가서 손을 벌려 봐. 그럼 대공님이 네 씀씀이가 얼마나 헤픈지 금방 알게 되겠네.”

리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로도, 권력으로도 나를 누를 수 없는 위치임을 깨달은 모양이다.

나는 엉망이 된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툭 뱉었다.


“네가 한 일에 대해 책임지라고 했지? 방을 모두 정리하고 나오면 용돈은 건들지 않을게.”

그리고 다시 뒤를 돌자 리리가 악을 쓰듯 외쳤다.


“새언니! 언니는 모르죠? 헤르티안 오라버니가 따로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거.”

이건 무슨 신박한 개소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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