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무성욕자가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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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무성욕자가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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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무성욕자가 맞을까?
2023.04.22.
방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헤르티안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장난치지 마.”
무성욕자에다가 평생 비혼을 주장하다가 가신들한테 몇 년을 시달리던 그한테 여자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새언니가 여기서 저한테나 가문에나 노력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말하는 거예요.”
리리가 귀여운 얼굴로 독사 같은 말을 뱉어냈다. 보아하니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떠들어대는 이야기였다. 여기엔 네 자리가 없으니 가족 행세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네가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지. 차라리 내가 싫다고 대놓고 말해. 네가 원하는 게 내가 여기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막는 거잖아. 성에선 내가 너보다 밑인 걸 알려주고 싶어서. 안 그래?”
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칠게 쏘아붙이자, 리리가 한층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헤르티안 오라버니를 갖고 장난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요. 판단은 새언니가 하세요.”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헤르티안에 대한 이야기는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나를 싫어서, 성에서 제 입지를 똑똑히 보여주고자 하는 얘기였음엔 틀림없었다. 몇 년을 이곳에서 주인처럼 살았으니 외부인이 제게 잔소리하는 게 싫었을 테니까.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알겠고. 대공님이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여기서 묻어두자. 더는 꺼내지 마.”
나를 업신여기는 건 둘째치고, 괜한 소문을 흘릴까 걱정이었다.
“새언니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안 궁금해요?”
여기서 궁금한 척해야 하는 건가.
찐한 신혼부부를 연기하면서 이런 소문에도 휘둘려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
“궁금하다고 하면 알려주기는 할 거니?”
“물론이죠.”
웬일로 리리가 흔쾌히 대답했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여유만만한 태도로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대신 저번 일 사과하세요. 저 말고 쿠르시아에서 돌아온 영지민 편을 들었던 거요. 그럼 그 상대가 누구인지 말씀드릴게요.”
그럴 줄 알았다.
리리한테 뭔가 기대한 내 잘못이었다.
“그건 네가 잘못했던 거고. 그리고 나한테 사과할 사람은 너 같은데? 내가 준 생일 케이크랑 선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사과를 바라는 건 양심에 찔리는 행동 아니야?”
물론 그녀가 사과할 거란 기대는 없었다.
“상대가 누군지 말해준다면 이번 일은 눈 감아 줄 수도 있고.”
이번엔 내가 한껏 턱을 치켜들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리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더니 혀를 쭉 내밀었다.
메롱.
“안 알려줄 거예요.”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쉭쉭 끌며 방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리리와 친해지는 건 포기해야겠다.
***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원작 속 헤르티안은 어땠더라?’
나는 따뜻한 욕조 물 안에서 멍하니 물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리리랑 말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홀로 생각해 보니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아는 거라곤 헤르티안이 무성욕자이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끝끝내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긴 한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다.
단지 소설 속 헤르티안은 그런 모습으로 묘사되었기에 곧이곧대로 믿었을 뿐이었다.
왜 그가 무성욕자가 되었는지, 정말 무성욕자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다. 헤르티안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위한 조연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도 별다른 의심 없이 헤르티안에게 원작 프레임을 씌웠다.
“설마 진짜 좋아했던 사람이 있나?”
리리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다. 다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데도 나와 결혼한 게 신경이 쓰일 뿐이었지.
‘이상하잖아.’
책에서도 그렇고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았는지.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왱왱 떠돌아다닐 때쯤이었다.
“마님, 오늘따라 오래 계시네요. 대공 전하께서 먼저 침실에 가셨대요.”
보니사가 수건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왔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닦아주려는 보니사의 손길을 냉큼 붙잡았다.
“보니사, 궁금한 게 있어.”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님께서 선물해주신 옷에 관해 물어보시려는 거죠?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마님이 옷을 지어주셔서 이 대공성 생활도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다른 하녀 애들도 드레스라도 되는 것처럼 입고 다닌다니까요.”
아, 그것도 있었지.
어쩐지 요즘 하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한 층 부드러워졌더라니.
여기저기 일이 많아 깜빡 잊고 있었다.
“다들 좋아한다니 다행이야.”
“모두 마님 덕분이에요. 게다가 대공성도 보수한다면서요? 다들 얼마나 기대하고 있게요.”
“어? 어.”
내 질문보다 보니사가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보니사는 그 이후로도 입이 마르랴 내 칭찬을 해댔다.
몸에 도톰한 털 가운을 걸칠 때까지 얘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이러다가 물어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녀를 다시 한번 붙잡았다.
“보니사,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긴데.”
대놓고 헤르티안 이야기를 할 수 없어 남 얘기라고 빙자해 말했다.
“누구요? 비올렛 공녀님이요?”
“아니 다른 친구 얘기야.”
“마님께 친구가…… 있었나요?”
아 맞다. 나 친구 없었지.
아카데미 때도 카시안을 제외하면 교류했던 사람은 교수님들뿐이었다.
병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다가 친구는커녕 지인조차 없었고.
“아는 교수님 얘기야.”
나는 적당히 둘러대며 말을 이었다.
“교수님이 정략결혼을 하셨었는데 당시에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대. 근데 왜 다른 여자랑 결혼한 걸까?”
내가 질문해놓고도 이상했다.
보니사는 이상한 질문에도 열심히 고민하다가 답해주었다.
“음.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이 아니었을까요? 교수님이라고 하셨으니까 저처럼 하녀나 평민과는 아무래도 결혼하기 어렵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
현실의 벽이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원작처럼 아예 비혼 선언을 해버렸으면 가신들도 마지못해 허락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일단 결혼하고 후에 정부로 들이거나.
그 이유라고 하기엔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아니면 그 상대가 이미 결혼했을 수도 있죠? 아니면 좋아하는 상대가 따로 있거나?”
이번 가정은 꽤 그럴듯했다.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궁금한 부분도 해결이 되었다.
어느새 보니사는 내게 도톰한 잠옷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많이 친한 분이세요? 마님 얼굴이 심각해 보여요.”
그 말에 얼떨떨해진 나는 얼굴을 더듬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모양이다. 이게 뭐라고.
헤르티안이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던 없던 이 계약 결혼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나는 그만 리리의 말을 잊기로 하고 입가에 기계적인 미소를 띠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
침실에 들어서자 침대맡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 헤르티안이 보였다.
오늘따라 그가 달라 보이는 건 리리의 말 때문일까? 아니면 보니사의 말 때문일까?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한 채 책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내가 그의 옆자리에 올라앉기까지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깔끔하다 못해 담백한 이미지를 주는 까만 머리칼. 하지만 그에 대비되도록 화려한 이목구비는 세르디스 못지않게 뭇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다.
‘심지어 세르디스처럼 소극적이지도 않아.’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에둘러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런 완벽한 남자를 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가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아차차.
또 그를 두고 이상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나는 다시금 심각해진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시나 싶어서요.”
“아.”
그는 급하게 책을 덮어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나는 슬쩍 책을 바라보았다. 책 표지가 뒤집혀 있어 제목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책 같은데 무슨 내용이에요?”
“별 내용 아닙니다.”
“무슨 내용이길래요.”
그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사실 크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이상한 의심이 들었다.
혹시 좋아하는 여자랑 관련이 있나?
한 침대에 있어 우리가 계약 결혼이라는 걸 깜빡할 뻔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를 꺼내는 건 그의 사생활 침해나 다름없으니.
나는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만 자리에 누워 등을 돌렸다.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럼 마저 책 읽다 자요. 전 먼저 잘게요.”
그리고 헤르티안이 그 여자를 빨리 잊기를 바랐다.
그래야 상처도 덜할 테니까.
근데 왜 아까부터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어깨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잠깐 봐도 됩니까?”
헤르티안이 내 어깨를 살포시 감싼 것이다. 평소처럼 감싸 안아주는 게 아닌 그는 내 가운을 살짝 들춰보려 하고 있었다.
날개 죽지에 그려진 벨라돈나 문양을 보기 위해서.
“얼마든지요.”
나는 기꺼이 머리카락을 반대쪽으로 넘기며 목을 기울였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피부에 닿자 몸이 움찔거렸다. 보이진 않지만 문양 쪽으로 헤르티안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어 이상했다.
“이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고 하셨죠?”
“네. 아버지도, 리안도, 저도 백작가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있었어요.”
결혼하기 전, 그에게 문양을 보여주며 이야기해주었다.
르앙베리아 백작가의 핏줄이면 누구나 몸에 이 문양을 갖고 태어난다고. 벨라돈나 봉우리는 변하지 않지만, 오라버니인 리안은 그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고. 그리고 그 끝엔 죽음이 있었다고.
“그때보다 잎이 조금 더 벌어졌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리안이 죽고 난 뒤,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내 문양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급격히 몸은 약해져 시도 때도 없이 쓰러지는 몸이 되었고.
“리안에 비하면 자라는 속도는 빠르지 않아요.”
리안은 문양이 변하기 시작하고 2년 후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리안이 세상을 떠난 뒤로 오 년이나 지났지만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렇다고 희망적이건 아니다.
‘원작에서 아네트는 변경백이랑 결혼하고 얼마 안 가 죽었으니까.’
나는 문득 원작 속에서 나와 헤르티안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접점이 전혀 없었다.
원작에서 세르디스가 구르기 시작해 아네트가 죽음에 이르고, 그렇게 전여친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나서야 전쟁터를 돌던 헤르티안이 세르디스 앞에 나타났으니까.
다시 생각해봐도 뼈 아픈 현실이다. 헤르티안이나 나나 두 주인공을 돋보이게 할 희생양일 뿐이었다는 게.
조금 마음이 착잡해졌을 무렵, 그가 먹먹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부인께서도 이 문양이 몸을 병들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