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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남편의 짝사랑 상대 (42/79)


42화 남편의 짝사랑 상대
2023.04.26.



“이게 아니라면 달리 이유가 없으니까요.”

리안이 그렇게 죽고 나서, 어머니는 꽃이 만개했으니 낙화할 때가 온 거라 하셨다.

그렇다고 확실한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문양에 대해 연구했지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유가 뭐든 지금 확실한 건 제 병에 치료법이 없단 거예요.”

나는 여전히 그를 등진 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가까운 미래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목숨이 아니라 죽기 전까지의 내 삶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조용해진 걸 보니 생각이 많아 보였다. 걱정할 법도 했다. 여기 와서 툭하면 픽픽 쓰러진 데다가 멋대로 밖을 돌아다니기도 하니, 나와의 결혼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때 그가 조용히 이불을 목까지 올려 주었다. 슬쩍 그를 바라보니 그가 촛불을 후 불어 껐다. 하나 남은 촛불이 꺼지자 그의 얼굴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가 대뜸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숲속 마을에 사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헤르티안?”

“책 내용이 궁금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책 이야기였구나.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던 모양이었다. 나도 더는 아픈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


“해 주세요.”

“마녀가 찾아와 착한 소년에게 못된 저주를 걸어 괴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돌을 던지고 욕을 했습니다. 소년은 사람을 만나지도, 집안을 벗어나지도 못했습니다.”

“평범한 동화네요.”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였다.


“알고 있습니까?”

“그 얘기는 처음이지만 끝이 다 비슷한 건 알지요.”

“그럼 소년이 어떻게 저주에서 벗어났는지도 아십니까?”

“아마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다든가, 뜨거운 입맞춤을 해서 벗어났겠죠?”

동화라는 게 으레 그렇지 않나.


“부인의 병도 저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치료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동화를 읽고 있던 건가 보다.

내 병이 저주라고 생각해서.


“동감이에요. 저주나 마찬가지죠.”

심지어 독초를 먹어도 죽을 수 없다. 그게 저주 아니면 뭐겠어.


“그렇다면 부인께서도 같은 방법으로 저주를 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잠시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같은 방법?

나는 곧장 일어나 앉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에 그의 얼굴이 어슴푸레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는 뜻이에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동화일 뿐인데요.”

“하지만 못 해 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밑져야 본전이죠.”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말인데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불현듯 이곳도 소설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현실에서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마법도 존재하는 세상.

그 말대로 밑져야 본전이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살다 죽기는 인생이 아까웠다. 저번 생에도 병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해봤는데, 이번 생에도 허무하게 죽고 싶진 않았다.

헤르티안과 결혼도 했고, 원작 여주인 비올렛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안정권 아닌가?

이제야 씁쓸했던 마음이 조금 옅어졌다.

나는 더듬더듬 헤르티안의 손을 잡았다.


“헤르티안 말이 맞아요. 이대로 손도 못 쓰고 죽으면 편하게 눈도 못 감았을 거예요.”

어둠 속에서 그가 미소 짓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부인께서도 훨씬 행복하실 겁니다.”

그는 사랑을 해 본 사람처럼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리리의 말이 재차 떠올랐다.


‘헤르티안에게 숨겨둔 짝사랑이 있었구나.’

그것도 이뤄지지 못한 짝사랑이.

나도 그의 사생활이니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으시니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면 보일 겁니다.”

“제가 연애 안 해 본 건 어떻게 아셨어요?”

‘모태 솔로’인 게 겉으로도 티가 나나?


“원래 동족끼리는 알아본다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네요.”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사랑이든 뭐든 즐기면서 방법을 찾아볼게요!”

“멀리서 찾지 마…….”

“그럼 누구부터 만나봐야 하지? 기사님들 중에서라도 알아봐야 하나.”

“부인. 잠시만…….”

“헤르티안도 같이 찾아봐요. 좋은 남자가 있으면 소개해주시고.”

나는 헤르티안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우다다 내뱉었다. 왜인지 그가 조금 괘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헤르티안만 따로 상대가 있는 건 불공평하지.

나도 짝을 찾아 나서야겠어.


 

***

헤르티안은 오늘도 잠든 아네트를 보며 짝사랑의 고배를 마셨다.


“괜히 동화 이야기를 꺼냈나.”

그의 의도와 다르게 아네트가 다른 남자를 찾아보려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하곤 피식 웃었다.

이렇게 매일 전전긍긍하는 삶을 사는 게 얼마 만인가.

첫 전투에서도 이 정도로 불안한 적은 없었다.


“그나저나 많이 피었네.”

헤르티안은 헤쳐진 아네트의 가운을 조심스럽게 여며주었다. 오랜만에 본 벨라돈나의 문양이 바뀌어 있어 속으로 많이 놀랐던 차였다. 아네트 말대로 문양이 아니면 병증을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게 문양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는 얼마 전부터 새롭게 새운 가설과 문양의 관계성을 떠올려 보았다. 르앙베리아 백작가 사람에게만 새겨지는 이 문양이 빙의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그때는 무언가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

대공성의 보수는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성에 활기가 감돌았다.

사용인들과 기사들도 한마음이 되어서 보수를 도왔다. 밤낮없이 돕는 데도 그들의 얼굴엔 기쁨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가운데 뚱한 얼굴로 리리가 서 있었다. 그 옆엔 커다란 짐 가방이 있었다.


“어디 가려고?”

“제가 가출이라도 할까 봐서요? 새언니한테는 좋은 일이겠네요.”

리리와는 여전히 이런 상태였다. 헤르티안이 개입하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관계에 호전은 없었다.


“무슨 말이 그래. 어딜 가는지는 알고 있어야지.”

리리는 나를 한 차례 흘겨보곤 대답했다.


“수도에 있는 이모님네에 다녀올 거예요. 간 김에 비올렛 공녀님한테도 들를 예정이고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

그녀가 종종 수도로 놀러 가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한창 놀 나이인데 아무도 없이 성에 갇혀 있는 게 그녀를 예민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헤르티안 오라버니한테도 잘 말해주세요. 한 달 안으로 돌아올게요.”

곧바로 허락을 받을 줄 몰랐는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옷을 여며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리리의 마차가 저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흘 후.

리리가 떠난 그 길로 말이 급하게 이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사?”

자세히 보니 하얀 제복 위로 황실의 기사단을 뜻하는 초록 휘장이 보였다.


‘황실 기사가 여기에 왜 온 거지?’

세르디스가 대공성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다. 또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우선 저택 안으로 들어가 집사에게 헤르티안에게 보고를 부탁했다.

그리고 막 성 앞에서 고삐를 잡아당기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긴장되어 얼굴이 굳었다.


“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앞에 선 기사가 말에서 내려 내게 예를 갖췄다. 여린 목소리와 얇은 허리. 짧은 머리카락이었지만 나는 기사가 여자라는 걸 대번 알아보았다. 그녀를 따라온 기사도 내게 인사했다.


“황궁 기사분들이 이 먼 북부까지 어쩐 일이죠?”

예민한 말투에 여기사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니니 경계하지 말아 주십시오.”

“따로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온 이유는요?”

“그건…….”

그녀가 미처 대답을 끝마치기 전이었다. 눈동자가 내 뒤로 다가온 헤르티안에게로 굴러갔다.


“엘레노어?”

“헤리!”

헤르티안이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반색하며 다가갔다. 엘레노어는 기쁘게 웃으며 그에게 폴짝 뛰어갔다. 기사답게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여기까지 왜 왔어.”

“네 결혼식에도 못 갔는데 한 번 얼굴은 비춰야지.”

둘이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서로 반말까지 쓰는 걸 보니 꽤 친밀한 사이인 것 같은데.

나는 그 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곧 헤르티안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때 함께 전쟁을 치렀던 전우입니다.”

그녀가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황실 제2 기사 부단장 엘레노어 크레아예요. 전우라고 소개하니까 너무 건조한데 헤르티안이 대공이 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예요. 칼릭스 밑에서 같은 훈련을 받았거든요.”

전대 대공인 칼릭스는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사였다. 그를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고 들었는데, 엘레노어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실력을 인정받아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 기사단으로 들어갔고 그 이후로는 헤르티안과 연락만 종종 주고받은 사이.

설명을 들으니 둘의 관계가 납득이 갔다. 오히려 조금 안심이라고 해야 하나.

헤르티안이 마냥 쓸쓸한 인생을 살았던 게 아닌 것 같아 좋았다.

나는 바로 경계심을 풀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저는 아네트라고 해요. 북부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그녀가 눈을 휘며 웃었다. 깊게 패는 입 아래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신부로 맞았는지 몰랐네요. 헤르티안, 너 복도 많다.”

털털한 말투에 헤르티안이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인생 최고로 운이 좋았지.”

“그러게 말이야. 전쟁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언제 비 전하를 만난 건지. 얌전한 고양이가 생선을 먼저 차지한다더니. 딱 맞구나.”

“얌전하지 않게 굴었거든.”

“너…… 내가 알던 헤르티안 맞지?”

헤르티안이 보란 듯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무장 해제된 헤르티안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나를 둔 채 둘만의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설마 헤르티안이 좋아하는 사람이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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