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선 넘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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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선 넘어도 되나요?
2023.05.03.
혼자 남겨진 나는 살뜰하게 디저트를 클리어했다.
먹는 걸 남기면 벌 받는다니까.
헤르티안 자리를 슬쩍 보니 손도 안 댄 과일 디저트가 그대로였다.
“저것도 먹어 치울까?”
오늘따라 단 게 끌렸다.
오찬을 한가득 먹어 치웠는데도 이상하게 속이 허했다. 왜지? 곧 그날인가.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나는 묵묵히 디저트를 눈으로 좇았다.
더 달라고 할까 하다가 홀로 남아 디저트를 먹는 게 처량해 보여서 그만 포기했다.
그러다 헤르티안이 남긴 디저트로 시선을 틀었다.
‘굳이 새 걸 달라고 할 필요 있나? 어차피 버릴 거 내가 먹지 뭐.’
나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그의 자리에 가려고 일어섰다. 그의 디저트 접시를 들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도중 엘레노어의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투박해 보이는 기다란 팔찌였다. 가지런히 놓아둔 걸 보니 식사할 때 불편할까 봐 벗어둔 것 같았다.
“갖다줘, 말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달려갔을 텐데, 이번엔 직접 갈까 말까 고민이 들었다.
헤르티안이 엘레노어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기도 했고,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이야기를 급하게 막는 헤르티안. 그 얘기 이후로 무언가 벽이 생긴 기분이었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있나?
이렇게 따로 얘기까지 하러 나간 걸 보면 둘의 시간을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음. 그래도 움츠러들긴 싫은데.”
두 사람 사이가 어떻든 내가 몸 사릴 필요는 없었다. 그냥 엘레노어가 놓고 간 팔찌를 가져다주는 건데, 그게 왜.
나는 팔찌를 챙겨 곧장 다이닝룸을 나왔다.
“대공님과 함께 온 기사님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앞에서 발견한 집사에게 묻자, 그는 친절하게 밖을 가리켰다.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겠다며 연무장으로 가셨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고민할 틈 없이 그들을 쫓아 나갔다. 연무장으로는 가 본 적이 없어 잠시 헤매긴 했다만 도착 직전, 두 사람이 멈춰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발견했다. 헤르티안이 대뜸 새끼손가락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무언가 약속이라도 하는 걸까?
막상 눈앞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을 보니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겨 그들을 지켜보았다.
‘나 왜 숨은 거지?’
계약 결혼이긴 해도 남편이 다른 여자랑 있는 게 불편했나?
그때 기사 하나가 지나가는 걸 보고 나는 보이지 않도록 나무 뒤에 웅크렸다.
그러자 불현듯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나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다.
어릴 적,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리안이 창밖에서 노는 모습을 한참 보다가 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티 나게 커튼을 치고 숨어버렸다. 그땐 리안이 꼴 보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 부러웠던 거였어.’
나랑 같은 유라고 생각했던 헤르티안이 행복해 보이니까 부러웠던 것이다. 나는 이 추운 데서 이런 고생을 하며 지내는데 누구는 짝사랑 상대를 만나서 히히덕거리고 있으니!
부러워서 속이 허했던 게 틀림없었다.
“헷갈리게 하긴 싫다.”
그때 헤르티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앞에 내용을 전혀 몰랐으므로.
‘설마 이제 와서 고백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의심도 잠시였다. 다음으로 엘레노어의 말을 듣고는 그만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네게 참전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멀어서 잘못 들은 거라 착각하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품속에서 꺼낸 하얀 봉투가 그 증거였다.
뜬금없이 황실 부기사단장이 이 먼 길을 찾아왔다 했더니, 참전을 알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헤르티안과 결혼할 때 딱 한 가지 걱정이 되었던 부분이다.
황후 측 세력의 견제.
다른 귀족도 암암리에 정부를 두는데, 황제만은 자유롭지 못했다. 외가 세력이 거대했던 황후가 사랑스러운 아들이 세력 간 다툼에 휘말려 고통받는 걸 두고 보고 싶지 않아 했기에.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자신처럼 무능한 사람이 황제에 올라 허수아비 짓을 하느니 여러 아들 중에 현명한 이를 골라 황좌를 건네주고 싶었다. 그래서 태어난 게 헤르티안이었다.
그러나 세력이 없는 헤르티안에겐 황제의 아들이라는 자리는 독일 뿐이었다.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게임 속 도망자 신세였다.
그리고 그가 결혼한 지금까지도 게임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나는 방금까지 숨어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단숨에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다 시선을 교환했다.
“비 전하. 언제부터 거기…… 아니 어느 시점부터 저희의 대화를 들으셨습니까?”
먼저 입을 연 건 엘레노어였다. 그녀는 내게 헤르티안과 한 약속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참전보다 약속을 들켰을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방금 참전하라는 얘기부터요.”
그녀가 안심한 듯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엘레노어를 보며 헤르티안이 대신 말을 이었다.
“참전 명령이라고는 하나 나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명령을 거역하기라도 할 셈이에요?”
“아닙니다. 결혼 전에 이미 참전 명령에 따르기 어렵다고 말을 올려두었었습니다.”
그는 황제와 대화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대공성에 정착을 하면서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참전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하지만 보란 듯이 참전 명령이 내려진 걸 보면 이 교지는 황제가 내린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세르디스가 얼마 전에 대공성에 왔던 사실이 떠올랐다. 헤르티안과 시선이 맞닿았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어느 지역으로 참전을 명 받았다고 했죠?”
“투란이라고 합니다.”
“투란이면 큰 규모는 아닐 거예요.”
“그걸 비 전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흥미롭다는 얼굴로 엘레노어가 물었다. 그거야 소설 속에서도 스치듯 지나간 전투였으니까. 큰 전쟁은 대부분 주인공인 세르디스나 비올렛의 에피소드로 다뤄졌다.
“작은 왕국의 변방인 데다가 제국에 바라는 게 명확하니까요. 무리해서 전쟁을 일으키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어요.”
“맞습니다.”
“오히려 잘 되었어요. 대대적인 규모가 아닌 만큼 큰 소란 없이 참전에서 빠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되레 작은 전투에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을 투입한다는 자체가 이상하지.
“비 전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나서서 말씀을 드려볼 참입니다.”
“엘레노어가 왜요?”
“네? 저는 친우의 안전한 신혼 생활을 바라서…….”
“황실 제2 기사단장이나 되는 분이 친우 걱정까지 해줄 여력이 어디 있겠어요. 이건 제가 해결하도록 하죠.”
나는 그녀의 말 허리를 끊었다. 버젓이 대공비인 내가 있는데 타인에게 맡길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헤르티안과 계약 조건이 내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제가 돕는 편이 더 수월할 겁니다.”
“아뇨. 저희 문제니까요.”
단호한 대답에 엘레노어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르티안이 옆에 서서 덧붙였다.
“부인 말대로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니 우리가 해결하도록 하지.”
그 말에 엘레노어는 그를 살짝 노려보는 듯하다가 눈을 휘었다. 무언가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헤르티안은 비 전하께서 계셔서 든든하겠습니다.”
기사단 부단장답게 쿨한 대답이었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탁을 거절한 거니 너른 이해를 부탁드려요.”
나는 엘레노어에게 팔찌를 건네주고는 그의 손목을 살포시 잡았다. 이제 우리끼리 계획에 대해 논의할 시간이었다.
“얼른 가요.”
그렇게 엘레노어를 지나쳐 그를 데려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헤르티안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부인. 혹시 화나셨습니까?”
“네? 제가요?”
“얼굴이 화가 나 보입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것도 단합이 잘 되는 엘레노어와 헤르티안이 부러워서 그런 건가? 돌이켜보니 나답지 않게 격하게 굴긴 했다.
“대공님이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엘레노어, 무례했다면 사과드릴게요.”
목을 가다듬고 한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엘레노어는 빙긋 웃으며 신혼부부니 떨어지기 싫은 마음도 이해가 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
엘레노어와 기사에게 방을 안내해주곤 나는 헤르티안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그는 바로 뒤로 돌아섰다.
“부인.”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잠시만요.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가 지난번 사업 때처럼 내가 나서지 못하게 막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헤르티안과 저는 엄연히 계약 관계 맞죠?”
“맞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제 계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관여할 권리가 있어요.”
내 요구는 이러했다.
나도 이번 참전과 관련된 일에 관여하겠다고.
왜냐면 헤르티안은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될 테니까.
원작에선 그랬다. 헤르티안이 참전하지 않은 전투는 손가락에 꼽힐 만큼 적었고 그중에서 투란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헤르티안은 이번에도 참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일은 세르디스와도 관련이 있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위험한 일입니다.”
그는 걱정하는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다. 쿠르시아 문제에서도 느꼈듯이 그는 자기 일을 누군가 해결해 주는 게 편하지만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혼자 떠맡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번 일에 세르디스가 관여되어 있다면 더욱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알아요. 헤르티안이 자기 영역에 마음대로 들어오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 거. 그래도 함께 사는 동안은 제게 너무 선 긋지 말아주세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 제가 제 영역에 부인이 들어오는 걸 싫어한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에요?”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어선 목에 조인 타이를 한차례 풀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럼 선 넘어도 되나요?”
세르디스가 연관된 이상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세게 넘을 생각이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더는 뒤흔들지 못하도록. 괜한 트집을 잡아 나와 헤르티안을 이혼시킬 계획이라면 더더욱.
헤르티안은 답이 없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나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그의 귀가 새빨갰다.
“헤르티안. 귀가 빨개요. 많이 추워요?”
“아, 아닙니다.”
“아니긴요. 몸에 열이 많다고 해도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면 탈이 난다니까요.”
내가 주는 약은 제대로 챙겨 먹는지.
나는 식어버린 벽난로에 불씨를 옮겨 넣곤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보니 수도에서 봤을 때와 비슷한 옷차림에 걸친 얇은 망토가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여러 방면으로 선을 넘어야겠어요.”
하녀 옷은 지어줘 놓고 정작 헤르티안의 의복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게 마음이 쓰였다. 이런 추위에 돌아다니면 튼튼한 사내라도 병에 걸리는 게 당연한데.
그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귀가 빨간 것과 별개로 무척 따뜻한 손이었다. 되레 내가 온기를 전달받았다.
“저도 선을 넘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