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둘이 계약 결혼이잖아.
(53/79)
53화 둘이 계약 결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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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둘이 계약 결혼이잖아.
2023.06.03.
“정말 그곳에 헤르티안이 있다면 더는 비밀로 해서는 안 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한 장소를 들은 엘레노어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배어 나왔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나는 궁전으로 돌아가 투란의 보물을 꺼내와, 그것을 엘레노어에게 전달했다. 그녀가 의문 어린 얼굴로 보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엘레노어 잘 들어요. 저는 황후의 초대로 내일 일찍 사냥터에 가야 해요. 저 대신 황제 폐하를 만날 수 있죠?”
“물론입니다.”
만약 헤르티안이 그곳으로 보내졌다면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신히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멀쩡히 나오기는 어려울 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르티안을 도와야 해.’
나는 엘레노어에게 투란의 보물을 내어주고 황제의 도움을 얻을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자식을 내버려두는 아버지라도 궁지에 몰린 자식을 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
이른 아침.
홀로 단장을 마치고 나오자, 화려한 금박이 수놓아진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마차 안엔 세르디스만큼이나 불편한 얼굴이 있었다.
“황후 폐하께 인사드려요.”
“오랜만이에요. 대공비.”
황후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이 궁전에 나와 헤르티안을 내몬 것을 잊기라도 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간 소식이 없어서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요. 북부는 지낼 만해요?”
안부까지 물어주니 하마터면 황후가 독초물을 보낸 것도 잊을 뻔하였다.
“네. 지낼 만합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화를 내거나 하소연을 한다면 그건 황후가 원하는 일일 테니까. 철없는 귀족 영애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내겐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북부가 어떻게 살기 좋겠어요. 매일 눈보라가 몰아치는 데다가 예쁜 꽃도 자라지 못하는 곳이잖아. 살기는 수도가 훨씬 좋지요.”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황궁에 와보니 북부가 그리워졌습니다.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대신 여느 사교계 부인들처럼 가시가 있는 말을 뱉었다.
버려진 궁을 내어주고 시녀를 이용해 내게 수를 쓰려던 것.
실패한 계략이라고 없었던 척하려나 싶었기에.
‘아니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황후가 꾸민 일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조용히 북부에서 사는 헤르티안을 기어코 들쑤시려는 거라면, 앞으로 두 사람에게 평화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황후가 개입한 일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장난을 친 게 섭섭한 모양이에요.”
새침하게 나를 보던 황후가 모든 일을 장난이라며 인정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장난은 친한 사이에 하는 게 아닌가요?”
“어머. 우리가 먼 사이였나?”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나는 냉랭하게 반문했다. 결국, 이번 일로 헤르티안을 사지로 내몬 것도 황후니까. 더는 그녀에게 차릴 예의 따윈 없었다.
“진짜 가족이 되는 수도 있죠. 대공비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런데 대뜸 황후가 의미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제가 원하면 진짜 가족이 된다니요. 그게 바란다고 쉽게 되는 일이었나요?”
“시간은 여유로우니 천천히 이야기하자고요.”
황후는 부채를 펼쳐 후후 웃을 뿐, 답을 주진 않았다. 마음 같아선 헤르티안을 납치해서 어쩌려는 건지. 무슨 속셈인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만 입을 다물었다. 괜히 내 기분만 나빠질 테니까.
‘볼수록 세르디스랑 닮았어.’
“할 말 많은 얼굴이네. 눈빛이 건방져요.”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그것도 마음에 들긴 하네.”
“……이것도 장난이시죠?”
내가 잘못 들었나.
건방진 눈빛이 마음에 든다고?
“장난 좀 쳤다고 내가 대공비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의문 어린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황제도 아니고 황후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헤르티안을 돕는 내가 거슬렸으면 거슬렸겠지.
황후는 내 속을 읽기라도 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겠네요. 그때 내 찻잔에 페퍼민트가 아닌 다른 찻잎이 들어있는 걸 알고 있었죠?”
그때라면 헤르티안과 처음으로 황궁을 찾았던 날이다.
세르디스가 내게 민트 차를 건넸고, 약초나 독초가 듣지 않는 내 몸에서는 이상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뒤따라 차를 마신 황후는 극심한 복통을 앓았던 사건.
“그래서 일부러 시녀에게 독초 섞인 물을 보낸 거야. 대공비가 정말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 궁금했거든.”
내 발을 묶어 두려는 게 아니라, 나를 시험해 보았던 거다.
‘내가 황후를 만만히 봤구나.’
단순한 사람인 줄 알았던 건 내 착각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여자를 죽이고도 뻔뻔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네. 알고 있었어요.”
나는 차분하게 답했다. 나를 시험해 보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 독초는 세르디스가 탄 것이고 내겐 죄가 없으니까.
“무슨 찻잎인진 몰랐어요. 다만 세르디스 전하가 저를 이 자리에서 죽일 거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황후께서 드셔도 문제없다고 생각했어요.”
“변명은 됐어요. 어차피 내 아들이 탄 걸로 일을 크게 벌일 생각도 없으니까.”
그녀가 부채를 접어 휘휘 저었다.
“대공비가 황궁에 산다면 더없이 좋은 아군을 얻는 기분일 것 같아. 그래서 탐이 났어요.”
“대공님을 건들지 않으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황후께 아군이 될 거예요.”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헤르티안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헤르티안을 잃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황후의 뜻과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죠.”
***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사냥터.
봄이 오자 사교 시즌을 맞아 사냥제가 크게 열렸단다.
귀족 영애들은 나와 남편감을 찾고, 패기 어린 영식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힘을 뽐내는 자리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사냥터까지 어쩐 일이세요!”
그러니 이런 자리에 황후가 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대공비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애들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황후는 고아한 웃음을 지으며 영애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대공비가 수도에 내려온 기념으로 함께 구경을 왔습니다. 저희가 방해된 건 아니겠죠?”
“방해라니요. 저희는 황후 폐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게 되어서 영광인걸요!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영애들은 알아서 자리를 만들어 우리를 중심으로 퍼져 앉았다. 그 뒤로 하녀들이 분주히 다가와 찻잔에 찻물을 부어주었다.
“몇십 년 만에 사냥터에 오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사냥하는 황제 폐하를 보려고 여기서 매일 같이 시간을 보냈었죠.”
황후가 운을 떼자 영애들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황후 폐하께서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군요. 저희도 마찬가지랍니다. 에보트 영식이 언제 내려오실지 눈이 빠져라. 저곳만 바라보고 있어요.”
한 영애의 시선이 닿은 건 사냥터 입구였다.
사냥을 나간 영식들이 오고 가는 곳.
황후도 그걸 보고는 옅게 웃었다.
“영애의 순수한 사랑이 아름다워요. 저도 기다리는 이가 있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요?”
“정확히는 우리 대공비가 기다리는 사람을 함께 기다려 주려고 왔달까요?”
황후가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동시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대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어머. 대공비는 모르는 얼굴이네요.”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알아서 자기가 무슨 일을 벌인지 실토했다.
“어제 이른 새벽에 대공이 드래곤 사냥을 나갔다지 뭐예요?”
황후의 목소리가 기쁨에 달떴다.
‘예상이 맞았어.’
어제 엘레노어의 보고를 전해 듣고 떠오른 장소가 있다.
절벽 끝, 드래곤이 서식한다는 플라보 동굴.
포악한 드래곤이 있는 근처이기에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곳이다. 덕분에 많은 동물과 마물들이 몰려들었고, 제국에선 절벽에서 일정 거리 떨어진 위치까지 사냥터로 정해두었다.
당연히 드래곤이 움직이는 시기에는 사냥터를 폐쇄한다. 지금 같은 봄날에는 드래곤의 휴식기이기 때문에 사냥터를 개방하고 있고.
“하지만 그 동굴은 출입 금지구역 아닌가요?”
“금지구역으로 정해둔 건 드래곤이 위험해서지요. 누구든 사냥할 수 있다면 출입은 언제든 가능해요.”
“하지만 휴식기에 들어간 드래곤을 건드는 건 위험하다고 하던데…….”
한 영애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내 눈치를 보았다.
“누가 일부러 드래곤을 깨우지 않는다면 드래곤은 쉽게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나는 황후 쪽을 바라보았다. 만약 깨운다면 그건 당신일 테니까.
“대공이 겁을 먹고 도망쳐 나오지만 않는다면야 직접 깨웠겠죠?”
능구렁이 같은 대답에 애써 지었던 미소가 사라졌다.
“대공비가 걱정이 많이 되나 보군요.”
나는 말없이 황후를 노려보았다.
“괜찮아요. 혹여라도 대공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과부가 된 대공비는 특별히 우리 세르디스의 짝으로 삼아 줄 테니까.”
내 고개가 휙 돌아갔다.
“농담이에요.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니까요.”
농담이라도 그런 악담을 퍼붓는 거 아니다.
“만약 대공님이 불화를 당하신다고 해도 제가 세르디스 전하의 짝이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요? 그게 대공비에게 가장 좋은 처우일 텐데.”
“가장 좋은 처우요?”
“만약 대공이 돌아오지 못하고 대공비가 홀로 남겨진다면 대공비는 평생 황궁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황후는 의미 모를 이야기를 계속 늘어두었다. 남들 앞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빙빙 돌려서 하는 느낌이었다. 나와 황후의 대화를 지켜보는 영애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숨을 죽이고 내 대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나를 굳이 이곳에 데려다 앉힌 이유 같은데.’
마차에서 나중에 하자고 아까 두었던 이야기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슬쩍 보니, 황후의 눈빛이 얼른 물어보지 않고 무얼 하고 있느냐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물어보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디저트가 참 많네요.”
나는 궁금하지 않은 척 말을 넘겨 버리곤, 테이블 위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었다.
역시 수도의 마카롱은 달고 맛있었다. 단번에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다.
“대공비는 언제나 디저트를 좋아하네요. 먹고 있는 걸 보자니 저도 하나 먹고 싶어져요.”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임에도 황후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황후 폐하도 하나 드셔 보세요. 맛이 일품이랍니다.”
나는 마카롱이 담긴 접시를 황후 쪽으로 건네주었다. 황후는 화답이랍시고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접시째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를 어째. 손이 미끄러져서 그만.”
그녀는 하나도 놀라지 않아 보였다. 마치 일부러 떨어트린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보란 듯이 접시를 떨어트린 것이다.
“접시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황후께서 다친 곳이 없는 게 중요하죠.”
대충 그녀를 걱정하는 척 말했다.
“꼭 이렇게 뭔가 떨어트리는 날이면 안 좋은 소식이 들리곤 하더라고.”
헤르티안이 안 좋은 일이라도 있길 바라는 말투였다.
“그러게요. 오늘따라 하늘이 어두워요.”
“곧 비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햇살은 사라지고 구름이 막막하게 하늘을 가렸다. 슬슬 걱정되었다. 사냥터 입구엔 영식들이 한 둘씩 내려오고 있는데, 헤르티안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손 위로 황후의 손이 겹쳤다. 차가운 감각에 하마터면 그녀의 손을 뿌리칠 뻔했다.
“걱정은 말라니까요. 만약 죽거든 내가 시신은 잘 수습해 줄게요.”
“황후 폐하. 적당히 하세요.”
“왜 진심인 척하는 거죠? 둘이 계약 결혼이잖아.”
이게 내가 황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이유였구나. 헤르티안을 죽이고 세르디스 짝으로 나를 앉혀두려고. 이건 세르디스의 뜻일까,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던 황후의 뜻일까.
“이상한 상상은 그만 하세요.”
“내가 하는 상상이 전부 현실이 될 것 같아서요.”
그녀가 부채를 펼치며 후후 웃었다. 정말 헤르티안을 죽여 없애기라도 한 사람 같아 보였다.
‘아니야. 헤르티안이 죽을 리는 없어.’
원작에서 헤르티안은 그렇게 쉽게 죽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원작에 개입해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도 절대.
“대공비의 여유가 얼마나 갈지 궁금하네요.”
하지만 내 여유보다 황후의 여유가 먼저 사라졌다.
“황후께서 저를 마중 나오셨나 봅니다.”
끈적한 선혈을 뒤집어쓴 헤르티안이 사냥터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공님!”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무언가를 황후의 발치에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