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남자 기능에 문제가 있습니까?
(59/79)
59화 남자 기능에 문제가 있습니까?
(59/79)
59화 남자 기능에 문제가 있습니까?
2023.06.24.
아네트가 방으로 돌아간 뒤.
헤르티안은 백작과 둘이 남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래곤 눈알을 뽑아 와 황후께 바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루카스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꼬를 텄다.
순식간에 퍼진 소문이다. 헤르티안이 난데없이 드래곤 서식지로 들어간 것도 모자라, 드래곤 피를 뒤집어쓴 채로 사냥터로 돌아와 황후에게 눈알을 던진 일.
대부분의 귀족은 그가 드래곤을 제압했다는 것에 감탄을 표했지만, 루카스는 그것보다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황후께서 사냥터에 가신 이유가 그 때문인 겝니까?”
마침 헤르티안이 돌아온 날, 황후가 사냥터에 있었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루카스는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헤르티안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그의 소식을 가장 빠르게 들을 수 있도록 사냥터에 간 것이라면 몰라도.
‘대공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 손으로 드래곤을 건들 리는 없을 터.’
루카스는 헤르티안의 담담한 표정을 살피며 자신이 떠올렸던 가정을 마무리 지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황후 폐하께서 건드리신 게로군요.”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황궁 내의 헤르티안의 입지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황후에게 그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 줄도. 하지만 결혼을 한 직후에 대놓고 이런 위협을 가할 정도라고는 아직 생각지 못했다. 그동안은 헤르티안의 참전으로 잠잠했었으니까.
“제가 대공 전하와 아네트의 결혼을 허락한 이유는 아네트를 안전하게 지켜주실 수 있다고 약속하셔서였습니다.”
루카스는 끝내 아쉬운 소리를 뱉고 말았다.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었기에 헤르티안은 덤덤하게 잔소리를 받아들였다.
“아네트가 위험에 처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저택으로 데리고 올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때문에 부인이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헤르티안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굳건하게 답했다. 그때처럼 거짓이나 허풍은 담겨 있지 않았다.
“대공님께서 북부에 계시니 저도 황궁에서 황후 폐하의 움직임을 살피겠습니다.”
그저 불상사만큼은 피하도록 돕는 수밖에.
“이번 일은 황후 말고도 세르디스 또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 말에 루카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세르디스 황자 전하 말입니까……?”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곤란하나 확실합니다.”
동굴 안에서 편지가 모두 불타버렸다.
편지와 카시안의 존재에 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중에서 편지를 불태울 만한 일을 벌일 사람은 세르디스뿐이었다.
“전하께서…… 설마.”
놀란 루카스가 무언가를 떠올리더니 이내 이마를 짚었다.
헤르티안은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세르디스가 예전부터 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담을 느낀 부인께서 결혼을 더욱 서둘렀다는 것도.”
루카스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건 자신이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생각과 같았으므로.
아네트가 세르디스와 데이트를 하러 간다더니 쓰러져서 돌아온 다음 날.
갑자기 결혼하겠다며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때, 슈웰리가 말한 적 있었다.
‘혹시 아네트가 세르디스 전하와 연인이 되는 게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닐까요?’
당시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명분도 없었기에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헤르티안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 가정이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알고 계셨던 겝니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루카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부채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되니 아네트가 헤르티안을 이용했다는 걸 모른 척한 것만 같아서.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헤르티안이 말을 덧붙였다.
“부인께서 저와 결혼한 게 어떤 이유든 상관은 없습니다. 그리고 세르디스가 부인께 마음이 있는 한 해치려고 들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세르디스와 이어지느니 저와 결혼을 강행하려고 했던 부인을 떠올려보면, 세르디스 옆에 있는 게 부인을 가장 해치는 길 같습니다.”
루카스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황자 전하까지 적으로 둬야 한다니.’
하지만 외면한다고 해서 변할 것은 없었다. 세르디스가 아네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자신 또한 두 사람의 미래를 그려보았던 적 있었기에.
“실은 아네트가 갑자기 황자 전하를 피했었습니다. 분명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전하를 만난다며 드레스를 고르던 애가 겁에 질린 얼굴로 결혼하고 싶다길래 이상하다 생각은 했습니다.”
루카스가 결혼 직전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단정 지어 버리기에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네트의 모든 게 변하지는 않았으니까.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하시는군요.”
그럴 만도 하다.
아네트가 백작 부부 앞에서 완벽한 연인이라도 된 양 연기를 하라고 했었으니까. 그녀의 속사정까지 전부 알았다면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었겠지.
아니나 다를까. 루카스가 씁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유도 묻지 않으셨군요.”
“그 아이가 괴로워할까 봐 묻지 않았던 겁니다. 예전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릴까 봐…….”
루카스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추고는 샴페인을 가득 따라 단숨에 한잔을 비웠다.
“아네트가 열한 살이 되었던 해에 리안과 함께 얼음 연못 위에서 놀다가 얼음이 깨져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열흘을 앓고 나서야 눈을 떴는데 모든 걸 떠올리지 못하더군요.”
10년도 더 된 시간이지만, 루카스는 그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연못에 빠져 끙끙 앓던 아이가 건강을 되찾고 난 뒤. 자신을 누군지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보다가, 이내 이것저것 물어보자 아네트는 겁에 질려 오밤중에 저택을 나갔다.
하마터면 귀한 딸을 잃을까 한겨울에 잠옷 차림으로 저택을 나갔고 온몸이 얼어붙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했을 때는 심장이 철렁 주저앉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랬다간 아네트가 가족의 품을 떠날까 봐.
“그래서 이번에도 결혼을 말리기만 했지. 이유를 캐묻지는 못했던 겁니다.”
몰랐던 과거 이야기에 헤르티안은 잠시 잊고 있었던 단어를 떠올렸다.
빙의.
‘단정 짓긴 이르지만, 가능성은 있다.’
“혹시 그때 부인께서는 연못에 빠지기 전과 달라진 게 있습니까?”
“기억을 잃었으니 모든 게 달라졌죠. 사소한 습관부터 식습관까지. 왼손을 쓰던 아이가 오른손을 쓰기 시작했으니 거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잡이로 변했다라.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게 가능한 것인가?
헤르티안은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무수히 많은 궁금증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괴로운 루카스의 얼굴을 보고 더는 질문하지 못했다.
“결혼하면 아네트의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했거늘…… 오늘 본 아네트는 썩 개운해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황자 전하가 아직 아네트를 놓지 못했던 거군요.”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저를 죽여 없애면 혼자가 된 부인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요.”
헤르티안의 말에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통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대공 전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딸아이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당장 눈에 보이는 위협에 전하 탓을 했습니다…….”
헤르티안이 곧장 그를 일으켰지만, 루카스는 선뜻 허리를 펴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자신이 아네트를 위해 해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아네트를 지키겠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매번 이야기하는데도 말이다.
‘기껏 아네트를 지킨다고 했던 게 몸에도 듣지 않는 약초를 가져다준 것과 결혼 반대뿐이라니.’
이처럼 자신이 한심해 보인 적도 없었다.
“백작 탓이 아닙니다.”
“아비가 모자란 탑입니다. 안다고 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르디스가 딸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네트의 건강도 안전도 그 아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한심하게……”
루카스의 뜨거워진 눈시울을 보며 헤르티안은 알게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헤르티안 또한 간절하게 그녀의 건강과 안전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저도 뚜렷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뭐든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백작도 약해지지 마십시오.”
“……하지만 세르디스 전하와 황후의 공격은 계속될 겁니다.”
“계속 화살이 날아온다면 활을 부러트리는 방법밖엔 없겠죠.”
그의 말에 루카스의 눈동자가 놀라 커졌다.
“그동안 화살을 피해 도망만 다녔지만, 앞으로는 피하지 않고 맞설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건……”
세르디스를 꺾는다는 뜻.
황후와는 전면으로 맞붙겠다는 의미였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인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지 위험에 빠트릴 생각은 없으니까.”
루카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황후 측 가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동안 저도 피해 다녔던 것만은 아닙니다.”
“뾰족한 수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가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물었을 때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백작부인, 슈웰리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마침 대공님께서 아직 여기 계셨군요.”
헤르티안은 금세 밝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심각해진 슈웰리는 평소처럼 마주 웃으며 그를 볼 수 없었다.
“대공 전하, 제가 차마 이런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손에 든 부채를 연신 부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헤르티안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정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까 루카스가 말했던 것처럼 황후의 견제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백작 내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고명딸이니 두려울 수밖에.
“황후의 건이라면…….”
“혹시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요?”
그 심정을 잘 알기에 헤르티안이 먼저 운을 떼려고 하자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황후도 황자도 관련 없는 내용이었다.
덜컥 건강을 운운하는 아내를 보며 루카스가 소리쳤다.
“부인!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이오?”
“다른 게 아니라, 아닌 걸 알면서도 멜슨 남작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다녀서요.”
아네트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슈웰리는 사이가 좋은 부부에게서 이렇듯 소식이 없는 걸 내심 두려워했다.
건강한 남녀가 만나서 매일 한 침대를 쓰면 좋은 소식이 먼저 들려와야 하거늘. 아니, 그 전에 아네트는 잘 먹고 잘 자는지 얼굴에 광이 돌았다. 본래 신혼 생활이란 석 달이 넘어가기 전까지는 눈 밑이 퀭하고 몸에 힘이 없는 게 정상인데!
‘대공의 몸에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이렇게까지 잠잠할 리가 없어.’
그래서 떠오른 게 멜슨의 진료기록지였다. 가짜라고 판명 난 건 알고 있다마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도 없었으니까.
“멜슨 남작이라니. 부인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신 줄 아시오?”
“저도 염치 불고하고 여쭤보는 거예요. 아네트는 말해 주지도 않고 답답해서요.”
슈웰리는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고 들어왔다. 아네트가 헤르티안의 약을 챙기는 걸 보고는 그 얘기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으니까.
“멜슨 남작은 부인의 주치의였던 사람 아닙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헤르티안이 되묻자, 그녀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예. 그 작자가 대공님의 진료기록서라고 해서 들고 온 게 있었지요.”
“부인, 그만하시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루카스가 일어나 그녀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대공님의 남자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인가요?”
어마어마한 말을 뱉는 그녀에게는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제 딸과 미래의 손주를 위한 일이기도 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