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왜 차만 끓이면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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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왜 차만 끓이면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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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왜 차만 끓이면 일이 생길까?
2023.07.15.
자신이 말하고도 당황한 비올렛은 우물쭈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아니란 거 알아요. 단지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아 신기해서 말했던 것뿐이에요.”
덧붙여 설명해도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은 돌아올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혹시 제 말이 기분 나쁘셨어요?”
“기분 나쁘다뇨. 아니에요.”
아니기는.
비올렛도 감정이 얼굴에 참 잘 드러나는 편이다.
방금까지 해맑게 웃던 미소가 단박에 사라졌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해요.”
그녀가 애써 웃어 보였다. 급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기침을 하기도 했다. 시선이 불편할까 봐 시선을 거두었다.
“죄송할 것 없어요.”
“제가 나갈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요새 외출도 자주 하지 않는데 저를 봤다고 하셔서 당황했을 뿐이에요.”
나긋하면서도 선을 긋는 말투였다.
“나갈 일이 뭐가 있냐니요. 공녀님이 나가고 싶으시면 나가시는 거죠.”
“비 전하께서 생각하는 만큼 제가 그렇게까지 자유롭지는 못해요.”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밖에 나간 지도 오래되었어요.”
차마 이유를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물먹은 듯한 표정이 너무 슬퍼 보였다.
오랜 정적이 흘렀다. 비올렛을 만나고 나서 이런 적이 없었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그녀를 걱정했다.
잠시 뒤.
차를 모두 비운 그녀가 운을 떼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어린 짐승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말투로.
“무슨 말이든 괜찮아요. 공녀님이 듣고 지우라면 지울게요. 저는 그저 공녀님의 친구로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
“친구, 요?”
“처음 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터 친구잖아요. 그때는 신분 차이가 나서 먼저 말을 못 했는데 지금은 제가 먼저 말해도 되는 거죠?”
너스레 떨며 내가 먼저 손을 살포시 맞잡았다.
움찔거리는 손끝이 차가웠다. 실내는 이토록 따뜻한데 뭐가 불편해서 손이 다 차가워졌을까.
‘아마 내가 알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닐까?’
비올렛이 무엇 때문에 힘든지. 나만큼이나 이 세계에서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주변 사람들도.
그 누구 하나 비올렛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사생아라는 이유로 말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울음을 삼키는 듯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왜 비 전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보지 않는 건가 하고. 제가 뭐라고 매번 챙겨주고 반겨주시는지요.”
답은 간단했다.
당신은 여주니까.
처음 든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공녀님과 이렇게 친해질 거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기억나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과감하게 비올렛의 드레스를 벗기고, 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세르디스의 첫 춤 상대가 되어 귀족들에게 긍정적으로 회자되었다.
물론, 나는 기대와 다르게 세르디스를 만나 고역을 치렀지만.
“그때도 말해 드렸듯이 저는 제가 살려고 공녀님에게 접근했어요. 무례하고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받아주신 건 공녀님이죠. 처음에는 딱딱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귀엽기도 하시고. 공녀님 생각보다 제가 공녀님을 아낀답니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나만 비올렛에 대해 아는 게 많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다.
비올렛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비 전하가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줄 몰랐어요. 비전하는 주변에서 인기도 많으신데 왜 저같이 음침한 사람이랑 친구 하나 싶고…….”
“제가 인기가 많다고요?”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확실한 표현이었다.
“저 친구라고는 비올렛 공녀님이랑 어릴 적부터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 딱 두 사람뿐인걸요.”
“그건 비 전하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친구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랑은 결이 다르신 걸요. 아무리 노력해도 저는 곁을 내어주는 사람 하나 없어요.”
“나중에는 그 사람들 다 후회할걸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중에 피눈물 흘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올렛 전하 앞에 줄을 설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움츠러들지 말기!”
움츠러든 작은 어깨를 잡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모두 사실이다.
지금 하나같이 비올렛을 사생아라 무시하고 욕하는 것들.
비올렛을 진짜 가족으로 받아주지 않는 가족들.
사랑하는 세르디스.
‘모두 엉엉 울면서 비올렛 치마 꽁무니만 잡고 다닌다니까?’
“풋!”
그녀가 드디어 딱딱하던 표정을 허물어트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나도 예쁜 미소를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참 이곳을 가득 메웠다.
“아까는 괜히 분위기 흐려서 미안해요. 실은 요새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고 혼자 있고 싶은데, 막상 방에 갇혀 있으려니까 동굴에 홀로 갇힌 느낌이라 너무 힘들었거든요. 때때로 눈물도 나고.”
그녀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이었다.
홀로 치료하기 어려운 종류의 병이었다.
상처가 아문다고 해서 흉터가 사라지지 않는, 오래 남는 병.
나도 지금의 가족을 만나기 전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시큰거린다.
“바보 같죠? 그냥 나가면 되는데 괜히 사람 눈치나 보고 살고.”
“그게 왜 공녀님 잘못이에요. 공녀님을 몰라보고 자기들끼리 노는 저 사람들 잘못이죠.”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버럭 소리가 튀어나왔다.
비올렛의 잘못이 절대 아니었다.
“세르디스 황자 전하도 많이 바쁘신 모양이더라고요. 북부에 다녀오고 나서는 특히 황궁 안에서 일만 열심히 하세요. 종종 황궁에 가면 바쁘다는 말만 돌아와서 저는 어디를 가나 민폐 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탓이라 여기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여위었다.
불현듯 하벨의 말이 떠올랐다.
‘매일 방에 틀어박혀서 뭘 그렇게 하는지. 식사 시간에 맞춰 들어가도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했던 거구나.
하벨은 알면 잘 좀 챙겨주던가!
상한 얼굴에 답답함이 몰려왔다. 이 고구마 가족이 언제쯤 정신 차릴지 모르겠다.
다음에 만나면 하벨에게 잔소리해야겠다.
“절대 민폐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네. 비 전하 말대로 쓸데없는 생각하지 않을게요. 처음부터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제 고집으로라도 전하 얼굴을 봐왔는데 이제 그것도 안 되니까 괜히 속상했었나 봐요.”
“그러실 만도 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건 괴로운 일이잖아요.”
비올렛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턱을 긁적였다.
“비 전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매일 보잖아요?”
“앗, 부모님 이야기였어요. 부모님을 매일 못 보니까!”
서둘러 둘러댔다. 그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진 건지 아까보다 편안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제 비 전하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지난번에 북부에서 비 전하 이야기를 못 들어서 얼마나 아쉬웠다고요. 이렇게 빨리 수도에 오실 줄도 몰랐고요.”
진분홍색 눈이 샐쭉하게 뜨였다.
은근히 자기를 보러 왔다는 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물론 수도에 오면 비올렛을 무조건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 수도행은 강제성이 컸다.
생각만 하면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백작가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제가 아무런 소식도 몰라서…….”
당연히 모르겠지.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있었다면 방에 갇혀 지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얘기하자면 길답니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요.”
그녀의 눈빛이 은근하게 빛났다.
“차 한잔 더 마시고 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비올렛이 문밖에 있는 하녀를 부르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 둘이 들어왔다.
“비 전하께 드리게 차랑 다과를 다시 내와 줄래?”
“네, 알겠습니다.”
하녀가 빠져나가고 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공께서 투란 전쟁 참전 명단에 오르셨어요.”
“대공께서 왜요? 투란이면 주기적으로 물자 때문에 작게 전투를 일으키는 곳이잖아요.”
똑똑한 비올렛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제 영지에 발붙이고 사는 대공 전하를 참전시킨다는 게 이상했죠. 그래서 타당한 이유 없으면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황실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어요.”
“어떻게 되셨어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르디스 황자 전하가 도와주셨어요.”
“황자 전하께서 도와주셨다고요?”
놀랄 만도 하지.
나도 세르디스가 헤르티안의 참전을 막아준 게 놀라웠으니까.
물론, 그게 황후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또 다른 감상이 된다.
참전을 미끼로 수도로 불러내 죽이거나 심하게 다치게 할 생각이었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를 설득하려고 들어갔다가 도움을 받았어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좋은 일이에요. 그래서 바쁘셨나 봐요. 대공님의 전쟁을 막아주시려면 전하께서도 해야 할 일이 많으실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디스가 황후와 한편이 되어 헤르티안을 공격하지 않길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다.
나를 지긋이 응시하던 그녀가 손을 덥석 잡았다.
“사람 마음만큼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없잖아요. 비 전하께서 세르디스 전하를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간곡한 마음이 담긴 부탁이었다.
‘나 세르디스를 미워했나?’
미운 게 아니라 혐오가 아니었던가.
만약 그날, 헤르티안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그의 곁에서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원작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을 테니까.
“미워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줘요.”
그녀가 가늘고 하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지난번 하벨이 내민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태어난 배가 다르다고 해도 가족은 가족인 모양이었다.
나는 덥썩 그녀의 손가락에 내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할게요.”
속으로는 여동생을 나 몰라라 하는 하벨을 욕하면서.
때마침 하녀가 찻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제 차를 한 잔 마시며 비올렛에게 헤르티안을 설득한 방법에 대해 물어볼까 싶었다.
세르디스가 황후의 편에 서서 이 사건을 주도한 것만 아니라면, 원작처럼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갈 길이 있지 않을까란 희망을 품고서.
“공작가에 오면 항상 이 향기가 나던데. 차향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찻잔에 보라색 꽃이 둥둥 떠올랐다.
깊은 향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공작령에서만 자라는 꽃이래요. 향이 좋아서 초대 공작부인이 말려서 차로 즐기던 걸 이어 온 거라고. 읏.”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찻잔에서 급하게 입을 떼어냈다.
“너무 뜨거워서 그만.”
배시시 웃었다.
“천천히 드세요. 저 오늘은 시간이 꽤 있답니다.”
내가 여유롭게 말하자, 그녀가 기쁜 듯이 방긋 눈을 접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녀님, 더 안 드세요?”
첫 모금을 마신 그녀가 찻잔을 멀리 밀어냈다.
마치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