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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카시안을 초대했습니다 (66/79)


66화 카시안을 초대했습니다
2023.07.19.


비올렛의 찻잔을 빼앗았다.


“공녀님께서 드시지 않으시면 제가 대신 마셔도 되죠?”

“비, 비 전하. 새로운 차를 내어 드릴게요.”

“아뇨. 목이 타서 식은 물을 마시고 싶어서요.”

찻물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찻물엔 내 것과 같이 찻잎만 동동 띄워진 채였다.

슬쩍 차를 가져온 하녀의 얼굴을 살폈다.

차를 입에 가져다 대어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맛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독특한 차향에 가려 다른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맛도, 향도 동일한 차였다.


‘내가 착각한 건가?’

최근 이런저런 일을 겪었더니 예민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차를 다시 내오라고 해야겠죠?”

굳어 있는 나를 그녀가 불안한 시선으로 흘끔거렸다.


“아뇨. 오늘 준비해주신 음식을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차는 이 정도로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찻잔을 내려두고 비올렛과 마저 이야기하려던 때였다.

그녀가 잔기침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어 보였다. 귀빈실은 따뜻하고 감기에 걸렸다기엔 급작스러웠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급히 입을 가렸지만, 기침을 멎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피가 얼굴에 쏠려서 기침만 쏟아 내면서.


“물을 가져올게요.”

테이블 언저리에 있는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고 물을 받아 마신 그녀가 조금 나아졌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잔에 담긴 물을 끝까지 들이켰다.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타고 드레스까지 이어진 살결을 따라 올라온 붉은 반점을 보았다.


 
일순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감사해요, 비 전하. 사레가 들렸나 봐요. 이제 괜찮아요.”

“몸에 이게 뭐죠?”

“네?”

그녀가 다급히 옷을 여몄다.

한번 든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실례라면 미안해요.”

나는 손목까지 내려온 그녀의 소매를 걷었다. 뽀얀 살결이 빨갛게 충혈됨과 동시에 곳곳에 작은 붉은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명백한 알레르기 반응이었다.

비올렛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음식에 복숭아가 들어 있지는 않았는데.

나는 먹었던 음식을 떠올리다가, 앞에 놓인 디저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복숭아가 들어간 음식은 없었다.

차도 마찬가지였다.


“차?”

찻잔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올렛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녀님은 왜 찻잔을 멀리 밀어두셨죠?”

그녀는 분명 찻잔을 외면하며 밀어냈다. 보통 마시지 않았으면 마시지 않았지. 밀어내지는 않는데.

충혈된 비올렛의 눈이 깜빡거린다.


“솔직하게 말해주셔야 해요. 그래야 무슨 문제인지 알 수 있어요.”

겁먹은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그녀는 역시 말하기 힘들어 보였다.

이대로 그녀의 말을 기다리기 전에 목이 부어오를 것이다.


“찻잔 받침에 뭔가가 있었군요.”

비올렛이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녀 앞에 놓인 찻잔 받침을 들어 올렸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걸로는 확인할 수 없다.

손가락으로 한번 쓸어 보이자, 손끝에 하얀 가루가 묻었다.

이걸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제대로 닦지 않아, 먼지가 뜬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에겐?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는 문제지.’

“복숭아 털이군요.”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저……. 비 전하께서는 제가 복숭아를 먹으면 안 되는 걸 알고 계셨어요?”

나는 고개를 살포시 끄덕거렸다.


“공녀님이 혹시 드시지 못하는 게 있는데 선물을 보낼 수 없어서 미리 알아보았습니다.”

거짓말이지만 납득할 만한 말이었다.


“일단 여기 계세요. 증상을 가라앉힐 만한 약을 가져올게요.”

 

***

복숭아 털이 비올렛의 찻잔 아래에만 있다.

게다가 그녀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벌인 일일까?

나는 먼저 약이 될 만한 걸 찾아 비올렛에게 전달했다.

털을 그대로 들이켠 그녀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얼굴이 부어 있었다.

더는 그녀와 말을 주고받기 어려운 상태였다.


“마시고 푹 주무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녀에게 약을 건네주고 침대에 누였다. 괴로워 보이는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썼다.

우연한 이유였다면 이토록 속상해 보이지는 않을 텐데.


‘비올렛도 누군가 일부러 벌인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내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테지.


“저 가볼게요. 푹 쉬고 연락주세요.”

그녀를 저대로 두고 나오자니 속이 꽉 막혀왔다.

그렇다고 공작가의 일에 관여하자니 그것대로 비올렛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어버린다.


‘비올렛의 입지는 대체 언제쯤 나아지는 걸까.’

원작 시작 시점을 한참 지났다.

지금쯤이면 세르디스가 비올렛에게 마음의 문을 열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 때문인지, 세르디스는 비올렛은커녕 다른 여자들도 만나지 않았다.

점점 그녀가 사랑받는 날이 멀어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저택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마차 안에서 바라본 샤르페넌 가의 저택이 오늘따라 어둡게 느껴졌다.

심란함에 잠겨 있을 때였다. 달리고 있는 마차 문이 벌컥 열리고, 지금은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대로 제 얼굴도 안 보고 가시는 겁니까?”

나와 반대로 기쁜 얼굴인 하벨이었다.


“하벨 님도 저택에 계셨나요?”

“대공비 전하가 오신다길래 씻고 옷을 갖춰 입느라 시간이 다 갔죠.”

그는 멀끔하게 올린 머리칼을 쓸어 보이며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분명 다시 만날 때는 조금 반가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비올렛이 당하는 꼴을 본 내 마음은 더 없이 식어버렸다.

그래서 참다못한 오지랖이 터졌다.


“하벨 님께서는 단장할 시간은 있으시고 여동생을 챙길 시간은 없으셨나 봐요.”

“아, 그때 했던 약속이요? 당연히 지켰습니다! 비올렛에게 같이 먹자고 했는데 결국 거절당했지만.”

“그럼 저도 하벨님과 한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겠어요. 이만 가주세요.”

하벨이 비올렛과 식사를 함께하자고 말하기로 했고, 그 대신 북부로 가기 전 그를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같은 저택에 있으면서 여동생이 아파 누워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은 필요 없었다.

하벨은 답답한지 기껏 깔끔하게 입은 타이를 풀었다.


“비올렛이 비 전하께 저에 대한 말을 했습니까?”

“아뇨.”

나는 획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아픈 비올렛을 이간질한 사람으로 몰기 싫었다.


“가족 이야기는 입에 담지도 않았어요. 아니, 이야기할 엄두도 내지 못하셨던 거겠죠.”

“그럼 갑자기 비올렛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라도 알려주세요. 제가 잘못한 거라면 당장 가서 비올렛에게 사과하겠습니다.”

하벨의 말에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을 정리했다.

눈물까지 보이는 나를 보고 그가 흠칫거렸다.


“무관심이 제일 무섭다더니 맞는 말이었네요. 하벨 님은 공녀님이 복숭아를 먹으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나요?”

“…….”

“가족이 이렇게 무관심하니까 비올렛 전하도 아무 말 않고 당하기만 하시는 거겠죠. 오늘 공녀님의 찻잔에만 복숭아 껍질에서 나오는 털이 쌓여 있었어요. 이상하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제 찻잔은 멀쩡했고, 꼭 복숭아만 닿으면 몸에서 열이 나는 공녀님 찻잔에만 있었다는 게.”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는 그에게 줄줄이 이야기했다.

오지랖은 부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궁금해하니 말해주는 것이다.


“누가 그런 짓을…….”

“누가 되었든 공녀님이 복숭아를 못 드신다는 걸 아는 공작가 일원이 아니겠어요?”

무례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공작가 일원이라는 건 사용인을 포함해 가족들에게도 해당하는 거니까.


“형님과 아버님께 말하겠습니다. 비올렛이 가문으로 들어오고 나서 피했던 건 사실이지만 절대 이런 짓을 당하도록 무시하지는 않았어요. 진심으로요.”

하벨이 덧붙여 설명했다. 그게 내겐 변명처럼 들렸다.


“저에게 설명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공녀님이 아파하는 게 보기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니까. 제 말 때문에 공녀님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는 않길 바랄게요.”

“지금 어떤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으시겠군요.”

“미안한데 가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기 불편해요.”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비록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이지만 비올렛의 얼굴이 겹쳐 보여 더는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다.

하벨 딴에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눈엣가시인 사생아 여동생 때문에 가만히 있던 자신이 싫은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방관도 가해다.

무관심이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든단 말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비올렛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알아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로 잡겠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벨도 굳이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차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가 짧은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저대로 내버려 두기엔 비올렛이 너무 가엽잖아.’

아무도 그녀가 아픈 줄 모르고 평소처럼 우두커니 방에 박혀 있다며 수군거릴 것이다.

차마 그 꼴은 보기 싫었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던데 혹시 안에 문제가 있습니까요?”

하벨이 오간 걸 모르는 마부의 물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계속 가던 길을 가달라고 했다.

샤르페넌 가에 올 때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소중한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건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멀어지는 샤르페넌 가에서 눈을 떼었다.

이대로 울적하게 돌아갈 순 없었다.

내가 울었던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헤르티안이 분명 걱정할 테니까.


“그나저나 헤르티안은 오늘 볼 일이 있다더니 돌아왔으려나.”

이 근처에 있다면 함께 가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지금 그를 만나면 묵직한 이 기분도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연락할 방법은 없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때 선물했던 인첸트.

소매를 걷자, 그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은 색상의 팔찌가 드러난다.


“나 약간 스토커 같나?”

에이.

알았어도 헤르티안이라면 이해해줄 것이다.

작동법은 간단했다.

인첸트를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돌렸다.

그러자, 마법처럼 앞에 작은 창이 떠올랐다.

그 속에는 제국을 본떠 놓은 지도가 있었다.

게임 속에서나 보던 미니맵 같았다.


“빨간 표시가 헤르티안 위치인가?”

수도에서 깜빡거리는 빛은 멀게 느껴져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깜빡거리는 빛으로 손을 뎄더니 서서히 지점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역시 사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조금은 잊혔다.


“응?”

그런데, 빛이 멈춰 있는 지점이 이상했다.


“여기는 샤르페넌 공작가잖아.”

비올렛이랑 하벨이 있는 샤르페넌 공작가가 인첸트에 잡혔다.

나 분명 위치 추적 인첸트는 헤르티안에게 선물했는데.

헤르티안이 공작가에 갔다기는 무리가 있었다.

나를 데리러 왔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공작가에 따로 연고가 있지도 않았다.


“색도 헤르티안에게 선물했던 브로치랑 같은 건데.”

아무래도 물건을 잘못 가져온 것 같다.

위치 추적 능력이 비올렛에게 간 듯했다.

샤르페넌 공작가에서 움직이지 않는 불빛을 보니 말이다.


“다시 가서 선물을 바꿔준다고 할 수도 없고.”

고민 끝에 위치 추적 장치를 껐다.

나중에 바꿔치기하자. 비올렛 몰래.

***

백작가에 도착하자 헤르티안이 일이 있어 타운하우스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백작가를 나섰다.

엄마에게 헤르티안에게 무슨 약을 먹인 거냐, 따져 물으려다 말았다.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나는 북부로 가기 전에 기회가 있다면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겼다.

그리고 헤르티안이 있는 타운하우스로 향했다.

타운하우스는 어딘가 어수선했다.

상주하는 사용인들도 분주했고, 무엇보다 헤르티안도 바쁘게 움직였다.

더불어 화려한 장식 아래 갖가지 요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부인의 친구분을 오늘 초대했습니다.”

“네? 카시안을요?”

“예. 마침 백작저로 연락이 왔길래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과연 세심한 헤르티안답게 신경을 많이 써 두었다. 따로 내가 도울 부분은 없어 보였다.


“어서 모시고 싶군요. 기대가 많이 됩니다.”

그런데 왜일까.

씨익 올라간 그의 입꼬리에서 불길한 징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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