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삼자대면
(68/79)
68화 삼자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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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삼자대면
2023.07.26.
“미카엘.”
타운 하우스로 들어오는 그를 반겼다.
“어서 와요.”
헤르티안도 함께라 말을 놓지 않았다.
은발을 말끔히 묶은 그가 반갑게 웃었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이어서 내 옆에 서 있는 헤르티안을 보고 예의를 갖추었다.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들고 온 선물을 건넸다.
집사가 건네받자마자 헤르티안이 선물을 바로 알아보았다.
“마카롱으로 가장 유명한 파티세리의 디저트네. 부인께서 디저트를 좋아하는 걸 알고 사 오신 모양입니다.”
“북부에서도 더 맛있는 디저트를 즐기시겠지만, 특히 이곳 마카롱을 좋아하셨던 게 기억이 나서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미카엘이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저야 디저트는 항상 환영이죠. 이 가게는 매번 줄을 서야 해서 사 오기도 까다로운데. 고마워요.”
고맙게 받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이 파티세리는 빙의 전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 곳.
‘세르디스 앞에서 그곳의 디저트를 먹으며 그를 구원자라고 착각했었지.’
그때의 기억 때문에 다시는 발걸음 하지 않은 가게였다. 다시 그곳을 방문하면 악몽이 되살아날 것만 같아서.
하지만 편지로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그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저 내 생각을 해서 사 온 선물을 고맙게 받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잡생각을 얼른 지워버렸다.
“식사 끝나면 다 함께 먹어요.”
“좋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타운 하우스에서의 만찬은 완벽했다.
늙은 호박을 넣은 펜네. 버섯을 곁들인 소고기 찜과 알감자를 넣은 그라탕까지.
모두 카시안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헤르티안이 내 편지를 몰래 읽어본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오늘 준비한 요리 중엔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많았기에 취향이 비슷한 걸로 결론을 지었다.
준비한 만큼 미카엘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 자리가 불편한가 싶어 그에게 가 슬쩍 물었다.
“많이 불편하면 말해도 돼.”
“불편할 게 뭐가 있어. 내가 온다고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지.”
“다 네가 온다고 대공님께서 준비하신 거야. 친하게 지내고 싶으셔서 그런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있어도 돼.”
미카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도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둥근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헤르티안이 먼저 접시를 들어 음식을 가득 펐다.
그러고는 미카엘의 앞에 놓아주었다.
“오늘 버섯요리가 맛있게 만들어졌지.”
고기 위로 버섯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는 빠짐없이 소스도 곁들여 주었다.
“많이 들어.”
카시안이 특히 좋아하는 음식 재료가 버섯이었기에 나는 뿌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주면 빨리 친해지지.
“대공께서 챙겨주시니 더 맛있어 보입니다.”
미카엘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버섯과 함께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헤르티안이 말했다.
“음식은 입에 맞나?”
“네. 아주 맛있습니다.”
“다행이군. 좋아하는 생선 요리는 미처 준비 못 해서 혹여나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전에 나와 식사했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한 말이었다.
미카엘이 무척 잘 먹었는데, 나는 맛있게 먹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오늘 대접받은 요리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깍듯한 대답이 이어졌다.
“미카엘은 오늘도 황궁에 다녀온 거예요?”
나는 그의 옷차림을 보며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끔한 제복 차림이었다.
“네. 요새 일이 많아 황궁에 살다시피 지냅니다.”
“세르디스 황자의 보좌관을 맡았다고 들었는데.”
헤르티안의 물음이었다.
미카엘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편하게 말해도 돼. 황자의 측근이라고 해도 전혀 불편해할 이유는 없으니까. 이 자리에 초대한 사람은 그저 부인의 오랜 친우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안 그래요, 부인?”
그가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 말대로 헤르티안은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미카엘이 황자의 보좌가 된 것도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기에. 나도 그가 세르디스 보좌라고 해서 불편한 것은 없었다.
“당연하죠. 오히려 나 때문에 억지로 일을 떠맡은 건 아닌가 싶어서 미안한걸요.”
손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차기 황제가 될 사람 곁이니 나쁜 조건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시작은 이유가 있었어도 나름 만족하면서 황궁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겐 좋은 기회죠.”
“오늘 초대에 대한 일도 황자께서 알고 있나?”
“…… 네.”
헤르티안의 질문에 그가 약간 망설이다 답했다.
“따로 말씀은 없었고? 그때 북부에서 다리 부상을 당한 채로 돌아가셔서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게 생각이 나서.”
“별다른 말은 없으셨습니다. 그저 의외라고 여기신 것 같습니다. 제가 대공비 전하의 오랜 친구라는 걸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하긴 나도 놀라긴 했지. 부인이 정체를 모르고 지냈던 오랜 친구가 황자 전하의 보좌관이라니. 근데 부인께서 미안해하시는 걸 보니 부인께서 황자를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접근하신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우정이 정말 깊은 것 같아 부럽기만 하지.”
그의 말에 미카엘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렸다.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놀라서 황자 전하께 가면 알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대공 전하와 결혼을 했다는 걸 알고 놀랐었죠. 그래도 다행입니다. 대공 전하 곁에서 비 전하가 편안해 보이십니다.”
“그래도 소후작만 하겠어. 부인께서 매번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말씀하시는데.”
“그렇다기엔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산 세월이 너무 길죠. 가문에서도 형제들한테 밀리는 처지라 차마 용기 내지 못했습니다.”
헤르티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미카엘은 가면처럼 일정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태생이 서자 출신이라 열등감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이런 열등감 덩어리를 편견 없이 받아줄 사람을 찾다가 비 전하께 저도 모르게 마음을 기댔습니다.”
그는 계속 자신을 탓했다.
그런 이유에서 내게 편지를 보낸 건 줄은 몰랐었다.
카시안은 항상 기둥처럼 기댈 곳을 내어준 사람이지, 내게 기대어 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서자 출신에 열등감 덩어리라…… 소후작. 나랑 비슷하군.”
헤르티안의 말투가 서늘해졌다.
듣고 보니 서자 출신에 형제 때문에 고생하는 건 미카엘보다 헤르티안 쪽이 심한 편이었다.
그를 겨냥한 말이 아니라도 기분이 나쁠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와인잔을 돌리고 있는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건 미카엘 실수야.’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건 고마웠지만 헤르티안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헤르티안이 서자라 황궁에서 쫓겨난 걸 모르지 않았을 테니까.
나까지 얼굴이 굳자 미카엘이 분위기를 눈치채곤 사과했다.
“이런. 제가 말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저는 그저 제 처지가 이래서 비 전하의 친구가 되지 못할까 두려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야. 오히려 편하게 말하는 게 보기 좋은데. 어차피 부인의 친구는 내 친구나 마찬가지니 편하게 말해도 돼.”
“너그럽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르티안이 가볍게 넘겨주어서 다행이었다.
“대신 나도 조금 편하게 말하고 싶은데.”
“물론입니다.”
“그래서 알아낸 건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무얼 말씀입니까?”
미카엘이 잠시 생각하다 되물었다.
헤르티안이 돌리고 있던 잔을 멈추며 답했다.
“부인을 위해서 황자 곁으로 갔다면 알아낸 게 있나 궁금해서 말이지. 의견을 듣고 싶은데.”
지난번엔 미안한 마음에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카시안이라면 분명 가만히 황자를 지켜만 보진 않았을 것이다.
측근이라면 그가 무엇을 꾸미고 있고,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미카엘은 부정의 답을 주었다.
“황자 전하께서 철저한 분이시라 저와는 일 이야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습니다. 저는 황궁에 가서 주어진 서류만 보다가 오는 게 전부입니다.”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것 참. 제가 조금 더 과감하게 알아냈어야 하는 건데. 제가 워낙 간이 콩알만 하다 보니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어 죄송합니다.”
미카엘이 난감한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미안하기는. 그게 잘못도 아니고.”
“미카엘이 미안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애초에 알아 와 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럼 선물 받은 디저트나 함께 먹을까요, 부인?”
“좋죠! 헤르티안은 그 파티세리 마카롱 드셔 본 적 없으시죠?”
헤르티안이 화제를 돌린 덕분에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환기되었다.
그가 사 온 먹음직한 마카롱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분홍색 꼬끄에 봄 딸기가 더해져 달큰한 향기가 풍겼다.
그걸 내려다보던 헤르티안이 미카엘을 향해 물었다.
“파티세리에 다른 마카롱도 있었나?”
“제가 갔을 무렵에는 많이 빠져서 몇 종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건 뭐가 있었지?”
미카엘이 약간 당황하자, 헤르티안이 덧붙였다.
“북부로 돌아가기 전에 몇 개 사갈까 해서.”
“……오렌지를 곁들인 것과 블루베리로 만든 게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기억나지 않네요. 워낙 사람이 많았던 터라.”
헤르티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의 까만 시선이 나를 향했다.
“부인께서는 어떤 마카롱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저는…….”
“아닙니다. 괜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북부에 돌아가기 전에 딸기 마카롱을 사겠습니다.”
헤르티안은 당연한 걸 물었다며 내가 딸기 마카롱을 좋아하는 걸로 결론지었다.
딸기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마카롱은 따로 있었다.
“저는 블루베리 마카롱을 제일 좋아하는데요?”
디저트는 가리지 않고 먹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따로 있었다. 블루베리 잼과 크림치즈를 섞어 만든 마카롱.
어느 가게를 가도 기본적으로 있는 마카롱이지만, 나는 그걸 제일 좋아했다.
“그러십니까? 저는 있는데도 사 오지 않으셔서 그 두 개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친구라도 해도 서로의 입맛까지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
당황한 미카엘에게 헤르티안이 묻자, 그는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마치 정말 잊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딸기도 좋은걸.”
나는 마카롱을 크게 한입 베어 물으며 기쁘게 웃었다.
내 생각을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렇게 넘기려고 했는데.
“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게 있으니까 블루베리는 그걸로 만들어 먹으면 되죠.”
내 말에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기도 하다.
카시안이 내가 블루베리를 좋아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작년 생일에 블루베리 잼을 직접 만들어 줬던 것도 잊었어요?”
직접 만들어 보낸 선물도 잊어버릴 리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