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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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고백
2023.08.02.
쓰러져 있는 아네트를 붙들은 헤르티안이 애처롭게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부인!”
자신을 따라 하는 가짜 앞에서도 꼿꼿했던 태도가 단숨에 무너져내렸다.
평소 힘이 들어 기절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축 늘어진 채 괴로운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이마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으며 심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왜 부인이 여기 혼자 있던 거야? 왜 혼자였냐고!”
헤르티안의 목소리에 뒤따라온 집사와 하녀들이 쓰러진 아네트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대공비 전하께 물을 가져다드렸는데 혼자 할 테니 나가보라고 하셔서 나왔는데…….”
아네트의 시중을 맡았던 하녀가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그동안 보았던 헤르티안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였다면 골백번도 더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전까지 몸 상태는?”
“평소랑 같으셨습니다. 그래서 미처 대공비 전하께서 쓰러지실 거라고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어서 의원을 불러와!”
헤르티안의 벼락같은 음성에 하녀와 집사가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방금까지 미카엘과 기 싸움을 벌이던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안아 든 작은 품이 곧 부서질 것처럼 잘게 떨렸기에.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미카엘을 밀치고 그녀를 조심히 안아 들어 옮기는 것밖에는.
***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이라기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비교적 최근에도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니까.
언제였더라.
분명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이곳이 소설인 걸 알게 된 날이었으니까.
눈앞에 병실에 웅크려 있는 내가 보였다.
앙상한 몸으로 허공을 바라본 채로 죽음을 기다렸다.
숨이 껄떡거리며 꺼져가는 순간에도 곁에 아무도 없었다.
원래 아무도 없었잖아.
죽는다고 해서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건 아니잖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외로운 인생이었으니까.
곧, 느린 속도로 내쉬던 숨이 잦아들었다.
스무 살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던 순간이었다.
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꿈으로 보게 된 내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지, 난. 나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도 누군가 울어주지도 않았잖아.’
화면이 뒤바뀌었다.
컴컴하고 딱딱한 병원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예쁜 햇살 아래 서 있는 두 아이가 보였다.
하나는 햇살 아래 긴 머리를 늘어트린 채로 눈을 비비는 어릴 적 나, 아네트.
남은 하나는 아네트를 똑 닮은 짧은 머리의 사내아이, 리안이었다.
그곳은 수풀 어딘가였다.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나뭇잎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 작은 리안과 아네트가 있었다.
리안은 어린 아네트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얼마 안 가 눈을 번쩍 뜬 아네트를 보고 리안이 말했다.
“넌 내 여동생이 아니구나. 아네트는 정말 죽었구나.”
이상한 말을 하는 리안.
기억 속에는 없던 장면이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작은 리안이 물었다. 그러자 어린 아네트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말 못 해?”
도리도리.
작은 고개가 돌아간다.
“그럼 너는 누구길래 내 동생이 된 거야.”
수풀에 털썩 앉은 리안이 작은 손을 맞잡았다.
작은 아네트가 한참이나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포근한 손길로 자신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처음이라, 그녀는 힘든 과거를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는 아팠어.”
“어디가?”
“몰라.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어. 매년 몸을 째서 수술해야 했는데 항상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안 좋았어. 죽기 전엔 몇 년 동안 수술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너무 아팠는데 아픈 걸 말할 사람이 없었어.”
“가족이 있잖아. 친구도.”
도리도리.
“너는 혼자였어?”
그제야 작은 머리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리안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고는 불쑥 아네트를 잡아 일으켰다.
“그럼 나랑 가족 할래?”
“진짜?”
작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나도 동생이 없으면 심심하니까. 너도 심심하잖아.”
“그래도 괜찮아?”
“당연하지. 대신 이건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야. 알겠지?”
“응. 약속할게.”
어린 아네트는 꺄르르 웃으며 답했다.
수풀 사이에서 이뤄진 약속.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난 뒤에 있었던 일인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떠오른 과거에 질끈 감겼던 눈이 뜨였다.
안심하라는 듯 이곳은 병실 천장이 아닌, 이 세계의 천장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곁엔 헤르티안이 있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늘이라고 하기엔 그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걸 보면 그간 꽤 가까워졌던 것 같다.
“헤르티안.”
내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답지 않게 흐트러진 차림새였다.
“아팠으면 말을 하시지. 왜 혼자서 쓰러져 계십니까.”
목소리가 먹먹했다. 까만 눈은 촉촉하게 젖어 들어 있고.
“울었어요?”
“또 이러면 울 겁니다.”
“하여간 마음이 여리다니까.”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잖아요. 제가 쓰러진 거 어디 한두 번 봐요?”
“부인은 아픈 게 익숙합니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익숙하다면 익숙할 것이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부터 나는 계속 아팠었으니까.
죽을병인지 모를 아네트의 병 정도는 아픈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기절하는 거야, 두통에 조금 시달리면 그만일 뿐이니까.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이렇게 푹 자고 일어나면 금방 개운해져 있는걸요.”
나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쓰러지고 나면 한동안은 쓰러질 위험이 없어서 오히려 좋달까요?”
늘 그렇듯 걱정을 가득 품은 그를 달래듯 말했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 내 곁엔 이렇게 사람들이 있었다.
그전에는 항상 빈자리였는데, 이제는 이렇게 누군가가 곁을 지켜준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그게 너무 좋아서 그를 잃고 싶지 않아 계속 변명거리가 늘었다.
“최근엔 북부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편하게 지내서 안 쓰러질 줄 알았는데. 수도에만 오면 생각할 게 많아지나 봐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헤르티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그럴듯한 변명이었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 매번 괜찮다고만 하십니까?”
그의 낮아진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유는 몰라도 이전에 쓰러졌을 때와는 다르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매번 왜 괜찮다고 웃어넘기기만 하시느냔 말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답답함이 섞인 무거운 음성. 그것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건…… 전 진짜 괜찮아서요.”
사실 입 밖으로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나서서 걱정을 살 바에 괜찮다고 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리고 나는 낯간지럽게 위로나 걱정을 받을 줄 몰랐다.
그런데, 헤르티안은 왜 이 문제로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나는 퍽 억울해졌다.
“네. 부인은 큰 잘못을 했습니다. 아픈데 아프지 않다고 말하고 괜찮다고 말하다가 이렇게 쓰러져서 사람 걱정시키는 거. 그게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왜.
“그럼 헤르티안은 제가 조금만 아파도 옆에서 아프다고 징징거리기를 바라요? 시도 때도 없이 원인 모를 병 때문에 당신에게 매달려 울기를 바라냐고요.”
“차라리 그래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조금이나마 부인의 고통을 짊어질 수 있을 테니까.”
“왜요? 제 아픔을 헤르티안이 뭔데 짊어져요.”
답답함에 못된 말이 나왔다.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에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방금 말은 실수예요. 잊어 줘요.”
헤르티안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서로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대화는 화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다음에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불현듯 떠오른 미카엘에 나는 몸을 번쩍 일으켰다.
“혹시 미카엘은 돌아갔어요?”
아마 걱정했겠지?
하필 서운한 티를 잔뜩 낸 상태로 밖에 나왔으니까.
“아직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미안하지만 다음에 만나자고 전달해 줄 수 있어요?”
딱 보기에도 내키지 않는 눈빛이었다.
방금까지 투닥거려놓고 부탁하는 내 잘못이었다.
“아니에요. 피곤할 텐데 헤르티안도 들어가서 쉬어요. 밖에 있으면 제가 직접 말할게요.”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순간 몸이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숨 막히는 방에 있느니 바깥바람을 쐬는 게 났겠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지나치려고 했을 때였다.
그가 내 팔을 살포시 잡아끌었다. 약한 힘이었는데도 약해진 몸은 휘청거리며 그의 품으로 무너졌다. 졸지에 난 앉아 있는 그에게 공주님 안기로 안겨 있게 되었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가 나를 놔주지 않아, 일어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헤르티안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헤르티안답지 않게 왜 이래요.”
그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헤르티안이 말했다.
“고통을 왜 짊어지느냐에 대한 대답을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꼭 이 대답을 들어야만 그가 비켜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헤르티안이 내 계약 결혼 상대라서. 그리고 당신이 필요한 시간 동안 제가 필요해서 당장 죽으면 안 되니까.”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그간 우리가 지낸 시간이 있으니까 당신이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 준다는 건 알아요. 당신은 다정하고 배려심 있고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제 아픔을 이해하고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겠죠.”
나는 그동안 쌓아왔던 말을 쉼 없이 내뱉었다.
“근데 저는 당신이랑은 달라요. 어차피 우리는 언젠가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할 텐데……. 괜한 걱정을 끼치고 민폐 끼쳐서 당신에게 마음의 짐으로 남고 싶지 않아요. 그저 지금처럼 당신과 즐겁게 보내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그렇게 동료처럼 살다가 멀어지고 싶어요.”
이게 내 진심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내 병에 관한 책임은 오로지 나한테 있는 거잖아.
그걸 헤르티안이 왜 짊어지는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
“난 동료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감정이 밀려들어 폭발하기 직전, 헤르티안이 내 감정을 깨부수며 들어왔다.
나를 살며시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팔을 타고 올라왔다.
“난 단 한 순간도 당신과 헤어질 생각 따위 한 적 없으니까.”
“헤르티안. 그게 무슨……”
“이렇게 대놓고 고백하는데도 눈치 못 챘다고 하는 겁니까?”
고, 고백?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연애에 서투른 나도 고백이라는 건 좋아하는 사람한테 마음을 드러내는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면…… 헤르티안이 나한테 감정이 있다는 말인데.
“어…… 에?”
직접적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고백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마침내 의미를 파악한 순간. 나는 고장 난 사람처럼 어버버거렸다.
“다, 당신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