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후회물 남주를 사양한 이유
(74/79)
74화 후회물 남주를 사양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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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후회물 남주를 사양한 이유
2023.08.16.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만하고.”
저렇게 진지한 세르디스의 모습은 처음 본다.
“그렇게 해서까지 내 마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게다가 솔직했다.
‘처음부터 속내를 숨기지 않고 솔직했다면 지금 사이랑 달라졌을까?’
그의 마음을 받아주는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쓰레기로 보며 꺼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고 주인공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건가요?”
나는 정원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추궁하듯 물었다.
아직 내 머릿속엔 그날 일이 생생하다.
근데 세르디스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마치 기억을 못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게 나로서는 그와 멀어진 가장 큰 계기였다.
“나는 네가 첫사랑이라 다른 사람이랑 연애는 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어. 너처럼 나도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몰라.”
하나부터 열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 남자를 보고, 나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오늘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아예 인연을 끊어 보자!
“달리아 성녀님의 기일 연회가 있던 날. 정원에서 제게 강압적으로 구셨던 걸 기억하지 못하신다고요?”
세르디스의 입이 다물렸다.
“그때 의상실에 만나서도 말씀드렸잖아요. 겨우 전하 품에서 탈출한 제가 멀쩡한 정신으로 전하를 마주 볼 수 있을까요? 솔직히 황자 전하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신분이 높지 않았더라면 경비대에 넘겨 감옥에서 썩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자 전하니까 이렇게 가족이라는 핑계로 이야기하는 거죠. 이젠 전하의 진심을 알았으니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서로 보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잠깐만.”
세르디스는 손을 뻗어 나를 말렸다.
“할 말 더 있으시면 그거 양심 없는 건데.”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퍽 억울한 눈이었다.
이 상황이 억울해? 자기는 황자고 나는 일개 백작 영애니까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나올 수도 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저 쉬쉬하며 넘겼겠지.
근데 나는 시한부라 이 말이야.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할 말은 하고 죽어야지.
‘시원하다, 시원해.’
세르디스의 마취 능력 덕분에 몸이 가벼워서 그런지 입도 신나게 움직인 것 같다.
“그거 말고.”
그가 내 어깨를 살포시 눌러 자리에 앉혔다.
“네가 나를 싫어하는 진짜 이유 말이야.”
세르디스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전에도 넌 나를 피해다녔어.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야. 그때 일로 헤르티안이랑 결혼을 한다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결혼까지 두고 봤다고 치자. 근데 두 사람 진짜 결혼 아니잖아. 결혼했으면 됐지, 이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네?”
나는 입을 앙다문 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잠자코 지켜보았다.
“내가 널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그것밖에 없어.”
정확하다.
그동안 얌전한가 싶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해내었다.
“그런 이유는 없어요. 무슨 상상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틀렸습니다.”
그가 의심을 품고 있다고 해도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세르디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네트. 그럼 그건 뭐야? 내가 특별 마카롱을 선물하겠다고 너를 초대했을 때. 그때까지는 네가 나를 호의적으로 봤어. 분명. 근데 네가 쓰러지고 다음 날, 넌 갑자기 날 귀신 보듯이 쳐다봤어. 안절부절못하고 나와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으려고 결혼한다는 거짓말도 했잖아.”
그가 애원하듯 내 손끝을 잡았다.
“일일이 의미 부여하지 마세요. 전하 생각대로 단순히 부담됐을 뿐이에요. 전하께선 황태자가 될 몸이고 훗날 황제가 될 분이잖아요. 근데 전하와 인연이 되는 순간 단두대에 올라서 모든 시험을 받아야 할 게 부담스러웠을 뿐이에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황자 자리를 버려도?”
“그게 무슨!”
그가 헛웃음을 켰다.
“아니잖아. 넌 내가 황자 자리를 버린다고 해도 날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정원에서 너를 곱게 보내줬더라도 마찬가지겠지.”
“…….”
“넌 이미 계약 결혼 상대를 찾고 있었지. 그리고 정원에서 나를 본 네 표정은 꼭 봐선 안 될 걸 본 얼굴이었어.”
내가 떠날까, 그가 큰 소리를 내어 나를 붙잡았다.
“나는 죽었다.”
나를 보는 빨간 눈동자가 꼭 핏물 같았다.
“딱 이런 표정으로 넌 날 봤잖아.”
차마 그 눈을 쳐다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세르디스를 보며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죄책감이란 것이 밀려들었다.
“……근데 말이야. 내 마음을 한 번만 이해해줄 순 없어?”
세르디스 딴에는 답답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상대가 갑자기 자신을 피해 다니고 벌레 보는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 일 때문에 나도 마음 놓고 세르디스를 싫어해도 된다고 생각했어.’
못된 생각이었다.
스스로 합리화하며 마음껏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내가 살려면 밀어낼 수밖에 없었어.
어차피 우리 둘은 이어지면 파국으로 끝이 나는 사이니까.
“저는 원래 이유 없이 사람 싫어하는 이기적인 인간이에요. 굳이 이유를 듣고 싶으세요? 억지로라도 붙여서 말씀드리길 원하진 않으시겠죠.”
나는 최대한 매몰차게 이야기했다.
이제 와 그건 미안했다며 사과할 수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그가 나를 미워하는 편이 나았다.
“아니. 너한테는 분명 이유가 있어. 너 나 잘 알잖아. 뒤에서 네 계약 결혼을 방해했으니까. 솔직히 이번에 헤르티안 그놈을 도운 것도 다 내 앞에서 무릎 한번 꿇려보고 싶어 그랬어.”
웬일로 세르디스가 가식적인 가면을 벗고 자신이 벌인 일을 인정했다.
“계속 말해 주지 않으면 나도 계속 뒤에서 네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캐낼 수밖에 없어.”
“협박인가요?”
물론 방식은 전혀 잘 못 되었다.
“계속 나랑 끈질기게 엮이기 싫으면 이유를 제대로 대. 네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세르디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일렁거리는 빨간 눈빛이 내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대답하면 영원히 제 앞에서 사라져 주실 거예요?”
“납득이 된다면.”
납득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내가 세르디스를 만나면 끝내 변방으로 팔려 가 죽을 거란 말을 누가 들어주겠어.
하지만 계속 이렇게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드느니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황자 전하와 만나면 저는 죽어요.”
나는 여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결론만을 말해주었다.
“아네트. 내가 너를 죽이라도 한단 뜻이야?”
세르디스는 기함을 토했다.
“내가 왜 너를 죽이겠어? 만약 연인으로 만나서 나쁘게 헤어졌다고 해도 내가 헤어진 연인을 죽일 정도로 못된 놈은 아니야.”
“물론 직접 죽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전하와 만났다는 이유로 저는 변방에서 쓸쓸하게 죽어갔을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아마 누구에게 말했어도 그저 답답하고 이해 불가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제게 예지력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시죠?”
일그러진 눈빛이 번뜩거렸다.
“……알아.”
“전하와 차를 나눠 마시는 순간 제 미래를 봤을 뿐입니다. 처절하게 죽어가는. 말라비틀어져서 벼랑 끝에서 떨어질 날을 기다리는 제 끝을 본 거예요.”
불현듯 타운하우스에서 본 거울 속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가죽만 남은 얼굴로 누군가를 향해 도망치라고 소리치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마 세르디스에게서 도망치라는 거였겠지.’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사이인데 왜 경고를 던지나 싶었더니, 오늘 일을 예견한 모양이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진짜 나를 본 거 맞아?”
끄덕, 고개를 숙였다.
“이제 모든 이유가 설명되었죠?”
“그럼. 결혼은? 일부러 한 거잖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나서려 하자, 그가 내 드레스 자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네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결혼도 나를 피해서 억지로 한 게 맞잖아.”
“대공님과 결혼한 걸 이 일로 엮지 마세요. 그리고 제게 볼일이 있으면 저를 탓하지 괜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아주세요.”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제 황자님과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나는 그가 꽉 틀어쥔 드레스를 놔달라는 의미로 드레스를 툭툭 건드렸다.
“아네트.”
하지만 그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목을 끌었다.
“황자궁으로 가서 마저 이야기해.”
“아뇨. 곧 대공님이 오십니다.”
“그놈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제발 제대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하지만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헤르티안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나를 잡고 있는 세르디스의 손에 머물렀다.
“그 손버릇은 대체 언제쯤 버릴 요량이지?”
헤르티안이 흉흉해진 눈빛에 세르디스의 손이 타들어 가는 줄 알았다.
“이거 놓으세요.”
나는 억지로 세르디스의 손을 떼어낸 뒤, 헤르티안에게 다가갔다.
세르디스의 마비 능력이 뻗치는 사정거리를 지나치자, 몸이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인간은 편한 것에 더 빠르게 적응한다더니. 그 짧은 시간 동안 맛본 자유가 나에겐 크게 작용했나 보다. 가뜩이나 안 좋은 몸이 바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이만 가요.”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찮습니까?”
그가 내 손목을 조심히 들어 살폈다. 그새 약한 피부 위에 빨간 자국이 난 걸 보고 슬그머니 팔을 빼냈다.
“다 자기 것인 양 멋대로 구는 건 여전하군. 그래.”
헤르티안의 화살은 다시 한번 세르디스에게로 향했다.
“아네트랑 얘기 중이니까 잠시 나가 있어.”
“부인은 할 이야기 없다고 하신다.”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쓸데없는 말싸움 하지 말고 잠깐만 나가 있으라고.”
반대로 세르디스는 조금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아까 나와의 대화로 지쳐 보였다.
“볼 일 없다. 부인 가시죠.”
“명령이다. 대공비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가.”
“명령?”
“건방지게. 결혼하고 나니까 두려울 게 없든? 네가 나보다 서열이 낮다는 걸 황궁 기사들 죄다 모아다가 알려줘?”
“치졸하게 기사들로 제압할 생각 말고 힘으로 붙어라.”
헤르티안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세르디스가 코웃음을 치며 맞받았다.
“네가 전쟁터 좀 굴러다녔다고 이길 거라 생각하나 보지?”
“적어도 황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일부러 져주는 기사를 상대로 자만에 빠진 누구보단 실력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향한 언성이 높아졌다.
“그만 좀…… 유치하게들 왜 이래요?”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양팔을 벌렸다.
평소 참을성 많은 헤르티안도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
나는 헤르티안을 보며 부탁하듯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가요.”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던 모양이다.
“결투 신청을 하지.”
기어코 사건이 터졌다.